독일의 원자력발전소 전면 폐기정책이 지속될 수 있을까? 독일 정부와 전력 업계는 지난 2000년 6월 독일 내
19개 원자력발전소 전부를 오는 2020년까지 단계적으로 폐쇄하기로 합의했다.
1998년 총선에서 승리해 집권한 사민당(SPD)과 녹색당 연립정권은 2000년에 원전 신규 건설 금지 및 기존
원전의 단계적 폐쇄를 규정한 법률을 제정했다. 2002년 발효한 이 법에 따라 2003년 북부지역 슈타데 발전소가
폐쇄된 데 이어 지난해 5월 남부 오브리크하임 발전소가 두 번째로 폐쇄됨으로써 독일 원전은 이미 17개로
감소했다.
원전 폐쇄정책에 대해 반대해온 기민당(CDU)-기사당(CSU)연합은 2005년 9월에 실시된 조기 총선에서 원전 폐쇄정책
재고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 기민당은 지난해 총선 선거운동 과정에서 원전 가동 시한을 연장해주는 대가로
전력회사들에 에너지 가격인하를 요구할 계획이라고 구체적인 대안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낙승이 예상됐던 기민-기사당 연합이 사민당에 근소하게 앞선 총선 결과가 나옴에 따라 지난 1968년 이래
처음으로 연방정부 차원에서 대연정이 들어서게 됐다. 대연정 협상 과정에서도 기민-기사당 연합은 원전 폐쇄 시한
연장을 주장했으나 사민당 측이 폐쇄정책을 그대로 밀고 나갈 것을 주장해 결국 대연정 합의문서에 기존의 정책을
그대로 시행할 것을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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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사민당 전당대회. 사민당과 녹색당 연립정권은 2000년, 원전 신규 건설 금지 및 기존 원전의 단계적 폐쇄를 규정한 법률을 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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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당-녹색당간 ‘적-녹 연정’에 이어 대연정 정부에서도 원전 폐쇄정책이 유지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새해
벽두에 몰아닥친 천연가스 공급 위기가 원전 폐쇄논쟁을 재점화시켰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 천연가스 가격인상을 둘러싼 분쟁으로 유럽 국가들의 가스공급이 크게 위협받게 되자 독일
정치권에서 다시 원전 폐쇄정책을 재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가격인상에 합의하고 유럽 국가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이 정상화됐으나 외국의 에너지원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원전 폐쇄를 연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미하엘 글로스 독일 경제장관은 독일의 원자력발전소는 “정치적 이유로 사망선고를 받았다”고 말해 원자력발전소
폐쇄정책의 경제적 효용에 의문을 제기했다. 기사당 출신의 글로스 장관은 “우리는 다양한 에너지원을 확보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가계와 기업의 에너지 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으로부터 들여오는 에너지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고 언제 천연가스 공급이 끊길지 모르는
상황에서 기술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원전을 폐쇄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전력 업계도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있다. 전력업계는 당초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정부의 강경방침에 밀려
원전을 폐쇄하는 데 합의했으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폐쇄 시한을 연장해줄 것을 요구해 왔다.
전력업계는 재생 에너지 개발정책은 필요하지만 원전을 특정 시점까지 강제 폐쇄하는 것은 에너지 수급과 비용
측면에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특히 아직 석탄류에 의한 전기 생산 의존도가 절반 가까운
현실에서 기후협약 발효로 온실가스 배출이 없는 원자력 발전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오는 2010년이면 천연가스 공급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대체하는 에너지원 개발이
시급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원전업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천연가스 분쟁을 계기로 원전의 안전성을 강조하면서 원전 폐쇄를 막는 데서 더
나아가 새로운 원전을 지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하고 있다. 원전 업계는 특히 이웃 프랑스와 핀란드가 핵폐기물
발생량이 적은 제3세대 원전 건설을 서두르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새로운 원자로는 더 안전하고 효율도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민-기사당 연합과 원전업계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사민당 측은 원전 폐쇄정책을 그대로 밀고 나갈 태세를 보이고
있다. 사민당 출신의 지그마르 가브리엘 환경장관은 원전 폐쇄는 예정대로 시행돼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최근의
가스공급 위기로 인한 에너지원 확보 문제는 화력발전의 효율을 높이고 대체에너지를 개발하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브리엘 장관은 원자력 발전을 대체할 수 있도록 풍력 등의 대체에너지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오는 2020년까지 독일 전체 전력수요의 20%를 대체에너지로 충당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반핵운동의 전통이 강한 독일에서 아직 여론은 원전폐쇄 쪽이 우세하다. 지난해 총선에서 원전폐쇄 시한 연장
문제가 이슈로 등장했을 당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0%가 예정대로 원전을 전면 폐쇄하는 것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천연가스 분쟁으로 원전 폐쇄정책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른 1월에 독일 공영 ARD 방송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65%가 원전 폐쇄에 찬성했으며, 34%는 폐쇄정책을 취소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독일은 현재 미국, 프랑스, 일본에 이어 세계 4위의 원자력 발전국으로 전체 전력 생산량의 28%가 원전에서 나오고
있다. 독일이 세계 최고의 풍력에너지 사용국이지만 아직 그 수준은 미미한 편이다. 풍력 등 재생에너지가 전력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9% 남짓이어서 원전을 대체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대연정 합의문서를 존중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즉 예정대로 원전을 폐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일 보수 정치권과 언론에서 문제를 제기함에 따라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허용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특히 자신이 이끌고 있는 기민당 내에서 원전 폐쇄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이 문제를 오는 4월에 열리는
‘에너지 정상회의’에서 논의할 계획을 밝혔다. 에너지 정상회의에서는 독일 정치권과 에너지 업체 경영자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독일의 에너지 정책 전반을 재검토할 예정이다. 이 회의에서 독일 원전의 운명도 결정될
것으로 전망된다.
송병승 베를린 특파원 | songbs@yn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