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소리' 만드는 박범훈 총장
"우리 것 찾는 인성교육 차원서 국악교육 중요"
"국악의 생활화ㆍ대중화ㆍ세계화 위해 노력할 터"
"예술인총장으로 관현악단 지휘하듯 대학 경영"
세계적 명성의 미국 트럼펫 연주자 윈튼 마샬리스(Wynton Marsalis). 그는 쥴리어드 음악원 출신의
재즈 아티스트로서 링컨센터 재즈오케스트라단의 예술감독이다. 마샬리스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에 대한 재즈교육에
심혈을 기울이는 음악예술인으로 특히 유명하다.
수년전 어느 날 그는 월스트리트저널 기자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을 주고 받는다.
『기자: 브리트니 스피어스에 길들여진 세대에 재즈를 '팔' 수 있다고 생각하나.
마샬리스: 나는 재즈를 팔지 않는다. 난 세일즈맨이 아니다. 재즈는 우리 문화의 중요한 일부며 재즈를 접함으로써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진다.
기자: 아이들은 조그만 클럽이나 바에서 재즈를 듣기 보다는 번쩍번쩍하는 조명 속에서 팝콘서트를 보는 것을
좋아할텐데...
마샬리스: 교육이란 것이 애들이 좋아하는 것만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폭력물, 섹스물 또는 욕이나 나오는 비디오를
보여주면 될 것 아닌가.
기자: 어린이들이 재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면 재즈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나.
마샬리스: 재즈가 걱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이 걱정된다.』
한마디로 그는 고집스럽다. 적어도 미국 청소년들에 대한 재즈교육에 있어서만은. 그는 틈 날 때마다 미국 전역의
학교를 돌아다니며 재즈를 가르친다. 학교에서 쓸 재즈교본은 자신이 직접 만드는 열의를 보일 정도다.
그와 비슷한 사람이 한국에도 있다. 재즈가 아니라 국악 교육에 열을 올리는 것이 다를 뿐이다.
박범훈(朴範薰.57) 중앙대 총장. 호는 '서민의 소리'라는 뜻을 가진 범성(凡聲). 국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올해 초
종합대학의 총장 자리에 오른 그는 우리 소리를 찾고, 짓고, 가르치는데 큰 힘을 쏟아온 인물이다.
"서울국악예술고 이사장을 맡으면서 6년 전 우리나라에 국악유치원이라는 것을 처음 만들었을 때의 일입니다. 주변
분들이 유치원 이름에서 '국악'이라는 말을 빼자고 해요. '국악'이 들어가면 학생들이 안 올 거라는 거죠.
'예술'유치원으로 하자는 거예요. 예전에는 우리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크지 않았습니까. 우스개 소리로 국악
하는 사람을 무당이 아닌가 하고 본 때도 있었으니까요. '국악'이라는 말을 꼭 넣어야 한다고 했죠. 그런데
'국악'유치원 원생을 모집하는데 청바지 입은 아빠ㆍ엄마들이 자기 자녀를 넣어달라고 몰려 오더라구요."
왜 부모들이 아이들의 국악교육에 그렇게 관심을 가졌을까.
박 총장은 나름대로 그 이유를 이렇게 분석한다.
"원생을 모집하면서 강조한 게 있었어요. 국악유치원이 반드시 국악인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폭넓은
인성교육을 시키는 데라는 거지요. 어렸을 때 애들에게 피아노를 치게 하는 것이 그들을 꼭 피아니스트로 만들기
위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고유의 소리, 우리 고유의 몸짓 등 예술행위를 통해 인성교육을 시킨다고 하니까
부모들이 공감을 한 것 같습니다."
고교나 대학의 국악교육과정은 일단 전문 국악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지만 초등과정은 균형 잡힌 인성교육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박 총장은 유치원 과정에 이어 2001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국악 중등교육기관인 서울국악예술중학교를 탄생시켰다.
또 중앙대 음대 안에 있던 국악 관련 학과를 통합해 국악대학으로 독립시켰으며 국악교육대학원을 만들었다.
지난 9월에는 80명 규모의 중앙국악예술단을 이끌고 뉴욕?워싱턴?샌프란시스코 등 3개 도시 순회공연을 하면서
다시금 국악 교육 및 보급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김성녀ㆍ채향순ㆍ김영임ㆍ안옥선ㆍ장사익씨 등 국악인이 포함된 이 대규모 국악예술단은 이들 미국 도시에서 주로 교포
및 그들 자녀들을 위한 공연을 했다.
"교포들, 특히 2, 3세들이 우리 문화에 대한 갈증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간 국악 작품들은
그들이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이었는데 공연이 끝나니까 많은 교포들이 찾아와 자녀들의 국악 교육에 관심을
보이더군요."
중앙국악관현악단, 중앙음악극단, 중앙가무단, 중앙타악연희단, 중앙컬처밴드 원 등으로 구성된 예술단은 9일간의
공연기간 중 관현악에서 민요, 가요, 가무악, 음악극 등 다양한 국악 작품들을 선보였다.
"중앙컬처밴드원은 청바지를 입고 '너영나영' 같은 곡을 재즈처럼 국악 연주를 하니까 젊은 애들이 그렇게 흥에
겨워하더라구요."
교포들과의 한국문화 공유를 위한 미국 공연이 국악 인력 양성도 목표로 했기 때문에 공연에 참석했던 교포들에게는
중앙대 입학안내서를 보낼 계획이라는 게 박 총장의 말이다.
중앙국악예술단의 미국공연이 교포들 사이에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고르고 만든 국악
작품이 갖는 보편성 때문이다.
박 총장은 원래 고향인 경기도 양평의 양평중학교 밴드부에서 서양악기인 트럼펫을 불었었다.
그러나 16세 때 우연히 그 동네를 찾은 남사당패 꼭두쇠(대장) 남운용 선생을 만나 그의 손에 이끌려
한국국악예술학교(현 서울국악예고의 전신)에 입학, 피리를 불게 된다.
소년시절부터 서양악기와 동양악기를 함께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게 된 것이다.
고교에서 국악을 하고 대학에서는 서양음악 작곡을 배웠고 다시 일본 무사시노(武藏野)음대에서 학부ㆍ대학원 과정을
거면서 작곡법을 배웠다.
이 과정을 거쳐 그의 음악은 보편성을 띠게 된다.
그가 '86 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2002 월드컵 대회 개막곡을 작곡하고 음악총감독을 맡아 지휘까지 하게 된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너무 자연스러운 결과다.
한국의 소리로서 아시아인이 이해하고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적임자였던 셈이다.
"국악의 세계화라는 것은 세계 사람들이 국악을 들으면서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수제천(壽齊天)은 우리의 훌륭한 궁중음악입니다. 독특한 한국의 것으로 인정받을 수는 있지만 그 음악 그대로는
세계인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는 없지요. 그래서 월드컵 때는 국악관현악단과 서양오케스트라는 물론 대규모
합창단을 끌어들여 수제천을 했습니다. 대금 연주와 판소리에 바이올린과 대합창, 벨칸토식 노래가 섞여지면서
한국의 소리에 외국인도 이해할 수 있는 화음이 만들어 진겁니다."
그러나 그의 국악 세계화에는 분명한 원칙이 있다.
세계화 이전에 가장 먼저 우리 국민들이 국악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하고 아시아인들이 우리의 음악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국악교육에 열을 올리고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대중음악 가수도 동원했다.
장사익, 송창식 등이 그가 만든 음악을 불렀다. 특히 마당놀이는 국악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이춘풍전',
'봉이선달전', '흥부전', '홍길동전', '놀부전', '배비장전', '심청전' 등 11개의 마당놀이 곡이 그의 손에 의해
빚어졌다. 11월에는 그가 만든 '마포 황부자'가 손진책씨 연출로 장충체육관에서 선을 보인다.
"어린 나이에 국악악기로 민요를 편곡했다가 선생님한테 종아리를 맞기도 했습니다. 국악을 대중화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에 대해 반발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요. 서양음악계에서는 독일의 현대음악을 흉내내느라 바빴고
국악계에서는 전통, 전통 하며 기침 소리 까지 닮으라고 하던 시절에 '돌연변이'가 나타나니까
시끄러웠던거지요."
비판은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수그러졌다. 지금은 국악을 서양식 관현악 형식으로 연주하건 재즈그룹과 협연을
하건 많은 이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문화재를 중심으로 전통적인 국악을 하는 분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통적인
국악을 바탕으로 새로운 음악교육을 시킬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어 문제 될 것이 없지요"
박 총장의 주도로 1993년에 만든 아시아민족악단(오케스트라 아시아)은 국악의 아시아화 노력의 일환이다.
"창단 이래 매년 3개국의 악단이 함께 모여 연주를 하고 있지요. 이러한 모임 때문에 우리 전통악기도 많이 개량되고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은 오래 전 수교를 통해 음악인들 끼리 교류가 상당히 진전돼 있어 악기개량도 우리에 비해 훨씬 일찍
이뤄져왔다.
"현대에 들어와 우리 음악의 발달이 늦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장점은 전통음악을 잘 보존해
왔다는 것입니다. 일제 때 판소리를 일본어로 부르도록 강요했음에도 판소리 다섯 바탕이 남았고 중국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궁중에서 연주됐던 음악이 그대로 많이 남아 있습니다. 광대ㆍ기생 취급을 받았지만 민요 등
민속음악이 많이 남았고, 노동현장에서 불리었던 노동요 같은 것을 학자들이 많이 발굴해 놓았습니다.
실제 악기개량이라든지 창작음악을 만드는 작업들이 시작된 것은 1970년대 초부터입니다."
국악에 대한 인식도 좋아지고 국악교육의 성과도 많이 나타나고 있어 즐겁긴 하지만 국악의 생활화나 세계화
과정에서 주변에 대해 불만이 없는 건 아니다.
"요즘은 젊은이들이 오디오만 가지고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영상이 아주 중요하지요. 일본 NHK TV에서는 13시간
계속해서 가부키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 KBS 등을 포함한 TV매체들은 국악 연주를 보여주는데 너무
인색합니다. 그나마 있는 '국악한마당'이라는 것도 시청자들이 몰리지 않는 시간대에 편성하기도 하고
스포츠중계가 있다고 하면 아예 안 해 버리는 정도니까요."
정부의 국악 지원에 대해서도 서운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다.
현 정부의 정책수립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386세대들이 대학시절 사물놀이와 민속춤사위 속에 민주화투쟁을
했기 때문에 국악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섭섭함을 토로한다.
"옛 일은 다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정치에 바빠서 그런지 오히려 다른 세대에 비해 더 우리 문화에 대해 소홀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도 들 정도입니다."
국악인인 박 총장이 모교의 총장직을 맡을 수 있게 된 것은 오랜 기간 쌓아온 교육행정 경험과 경영마인드
덕이다.
그는 중앙국악관현악단이나 아시아민족악단 같은 예술단체를 만들어 운영하면서 조직의 경영방법을 터득해 왔다.
또 오랜 기간 서울국악예술중고 이사장을 맡으면서 국악유치원, 국악중학교를 설립했다. 중앙대법인 처장을 2년간
맡은데 이어 총장이 되기 직전 4년간은 부총장직을 수행하면서 교육행정가로서의 경험을 축적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악인이 무슨 총장이냐'는 일각의 비판적 시각에 시달린 것도 사실이다.
"제가 부족한 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많은 작곡자가 그랬듯 항상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지휘자로서
많은 사람들을 화합시켜 새로운 음을 만들어 왔습니다. 저는 대학을 하나의 오케스트라로 봅니다.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연주자들이 화합 분위기 속에 연주를 잘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처럼 대학을 그렇게 운영하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대학 구성원들의 마음입니다. 그 분들이 마음을 열고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지휘만
해주면 좋은 성과가 나오리라고 기대합니다."
대학총장으로서의 직무수행과 작곡 활동을 양립시킬 수 있느냐는 질문에 너무 바빠서 작곡활동은 예전처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부총장 때는 그래도 살금살금 했는데 총장이 되고 난 후에는 시간내기가 무척 힘듭니다. 점심 식사 후 잠깐 쉴
때 조금씩 하지만 그렇게 해 가지고는 안 되지요. 주말에 쉬면서 급한 작품 같은 것은 조금씩 손을 봅니다."
11월부터 하게 된다는 마당놀이극 '마포 황부자'도 곧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제게 작곡을 의뢰한 분들이 불평이 많아요. 지난 20년간 작곡을 해주었던 마당놀이 같은 것은 제작자들이 제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 상황이죠."
그는 한 2년 치 분량의 작곡을 이미 의뢰받은 상태.
"작곡가로서 이 정도의 의뢰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는 평소 친분이 두터운 일본음악 작곡가 미키 미노루
선생의 예를 든다. 미키 미노루는 일본음악집단을 창단한 일본의 대표적 작곡가다. "그분은 제가 총장이 됐는데도
축하도 안 해요. 작곡가가 작곡만 해야지 무슨 총장이냐는거예요. 작곡이 몇 년 치가 밀렸느냐고 해서 2년 치라고
했더니 자기는 10년분이 밀려 있다는 겁니다. 80세가 다 된 분이 정말 대단하지요."
박 총장은 다작(多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편이다.
"할 수만 있으면 다작 하는 것이 좋죠. 시도 때도 없이 곡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보면 먹고 살기
위해 곡을 많이 쓴 사람들이 좋은 작품들을 많이 남깁니다. 베토벤도 먹고 살기 위해 곡을 쓰지 않았습니까.
고상하고 배부르고 행복한 나머지 큰 걸작을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거기 매달린 작곡가 치고 좋은 작품을 남긴
예가 거의 없습니다."
그간 쓴 작품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이 어느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즉답을 피한 채 그냥 자신이 작곡한 곡은 별로
안 듣는다고 얘기한다.
자신의 곡은 다른 사람들이 연주를 할 때 비로서 들을 수 있는 것인데 연주가 잘 안 된 부분만 귀에 쏙쏙 들어오는
바람에 신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당놀이곡이나 88올림픽 또는 월드컵 대회 개막식 음악은 그가 작곡한 많은 곡들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관현악곡 중에서는 김덕수 사물놀이패와 함께 한 '사물놀이 협주곡 신모듬'이나 '신내림', '나나니', '춘무'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곡이다.
그는 기독교를 믿는 가족의 다른 구성원과는 달리 불교에 심취해 동국대에서 불교철학을 공부해 박사학위까지
땄다.
그 과정에서 '보현행원송' 같은 불교음악과 특히 찬불가로서 '가야지', '어화너', '찬미의 나라' 같은 곡들이
탄생했다. "찬불가를 많이 작곡하다 보니까 저를 보고 '생불'이라면서 합장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라며 박 총장은
웃는다.
그가 작곡한 곡들은 지난해 '박범훈의 음악세계'라는 큰 제목으로 23개 음반이 출반됐다. 박 총장은 지난해에는
또 '내가 만난 소리?내가 만든 소리: 소리연(緣)'이라는 제목의 자서전 겸 작품해설서를 냈다. 총장이 되기 전에
일단 그런 큰 작업들은 마쳐놓았으니 박 총장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 주변의 생각.
그는 총장실에서의 인터뷰 중 이번 임기의 총장직을 잘 끝내고 연임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예의성 발언에 대해
"저한테는 임기 4년도 너무 깁니다. 연임까지 하면 예술가로서는 끝이 나는 거지요"라며 손사래를 친다.
강일중 편집국 기자 | kangfa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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