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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해선 안 된다
이도선 편집인 yds@yna.co.kr
어
느새 가을 속으로 성큼 들어섰다. 깊어 가는 하늘과 함께 기온은 하루가 다르게 내려가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확연하다.
전국을 만산홍엽(滿山紅葉)으로 물들였던 단풍도 절정을 지나면서 거리의 낙엽을 치우는 손길들이 분주해지는 시절이다.
일견 평화로운 모습이다.
경제도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고 있어 다행이다.
위험이 완전히 가셨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작년 하반기의 미국발(發) 금융 위기에서 비롯된 경기 침체의 먹구름이 전 세계를
뒤덮었던 초봄과는 확 달라진 분위기다.
그때는 불황의 터널이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혹독하리라는 암울한 예상으로 모두들 불안에 떨었고 구조적으로 세계의 경기
변동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은 아연 위기감에 휩싸이며 10여 년 전 외환 위기의 악몽을 떠올려야 했다.
이젠 세계 경기가 바닥을 쳤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특히 한국은 주요 선진국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침체를 벗어나며 지구촌의 경제 회복을 선도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제무대 발언권도 크게 신장돼 세계 최고 경제협의체로 자리매김한 주요 20국(G20) 정상회의에서 영국, 브라질과
함께 트로이카 공동 의장국을 맡은 데 이어 내년 11월 G20 정상회의 유치까지 성사시켰다.
우리나라가 변방에서 중심국가로 발돋움할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그러나 눈길을 우리 스스로에게 돌리면 그림이 영 딴판이다.
너나없이 뜻과 힘을 합쳐도 외환(外患)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은 터에 곳곳에서 분열과 갈등이 넘쳐나니 국민은 맘 둘 곳이 없다.
이런 나라가 어떻게 세계 불황 돌파의 향도가 되고 있는지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다.
하긴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패거리나 지어 허구한 날 쌈질이니 제대로 된 나라꼴을 기대한다는 게 애초부터 무리인지도 모른다.
세종시만 해도 그렇다. 정운찬 총리가 총리 후보로 낙점된 직후 “수정 추진이 옳다”는 소신을 밝히면서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공사가 이미 시작됐는데도 부처 이전 고시 등 후속 조치에 손대지 않고 미적대던 정부와 한나라당은 정 총리가 ‘뜨거운 감자’를
용감하게 탁자 위에 올려놓자 내심 크게 반색이다.
하지만 야권은 이런저런 이유로 ‘원안 고수’를 위해 결사항전도 불사하겠단다.
민주당은 ‘우리 편’으로 여겨 오래 공들인 차기 대통령 후보감이 ‘적’으로 돌변하자 국정감사와 재보선 등 기회 있을 때마다
정 총리와 여당을 거세게 몰아붙였고 ‘충청권의 맹주’를 자임하는 자유선진당은 "세종시 문제는 충청인의 자존심과 혼이
걸린 문제"라며 지역감정까지 건드리고 나섰다.
서로 핏대를 돋우며 날선 공방을 주고받긴 일반 국민과 지방자치단체, 시민단체 등도 매한가지다.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세종시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은 말뚝 중 제일 잘못된 말뚝’으로 규정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세종시
이전 계획을 바로 잡을 것을 촉구하자 이완구 충남지사는 "국민적 합의로 국회를 통과한 법률을 무시하는 발언은 도지사로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며 “김 지사는 도지사직에나 충실하라"고 쏘아붙였다.
사회 원로.지식인 1,200명 성명 등 세종시 추진 중단을 요구하는 의견이 쏟아지지만 현지에서는 단식 농성과 궐기대회 등으로
강력히 맞서고 있다.
기실 정 총리가 세종시 수정 추진 명분으로 내세운 ‘행정 낭비’는 새로운 얘기도 아니다.
수도를 둘로 쪼개면 행정 낭비가 빚어지는 건 불문가지다. 화상회의니 뭐니 대체수단들을 내놓지만 그래도 쪼개지는 건
쪼개지는 것이다.
과천청사보다도 행정 낭비가 심할 게 뻔하다.
당초 행정수도를 만들려다 헌법재판소에 의해 좌절되자 편법으로 나온 게 12부4처2청(정부 조직 개편으로 지금은 9부2처2청)만
옮겨 세종시를 건설하는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안'으로 2005년 3월 여야 합의로 통과됐다.
그렇다고 충청권 표심을 노린 ‘정치권 야합’을 ‘국민적 합의’로 둔갑시키는 건 좀 심하다.
‘유령 도시가 되면 큰일’과 ‘유령 도시가 되든 말든 약속대로 하자’는 주장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선 형국이다.
하지만 세종시는 성공하든, 실패하든 모두 문제다.
성공하면 ‘우리도 정부 좀 떼어 달라’는 요구가 여기저기서 빗발칠 게 틀림없다.
대한민국에서 비단 충청도만 ‘핫바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수도가 여럿으로 갈라지는 황당한 상황이 오지 말란 법도 없다.
실패하면 더 문제다.
일각의 우려처럼 ‘유령 도시’가 되면 이미 퍼부은 수십조 원만으론 어림없고 두고두고 ‘밑 빠진 독’이 될 테니 말이다.
세종시는 낙후된 충청도를 발전시키려는 게 목적이지, 나라야 어떻든 지역 이익만 챙기려는 괴물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본디 목적은 어디 가고 ‘원안 대 수정’의 기싸움만 남았다. ‘원안+α'라는 대안 역시 원래 목적과 유리돼 있긴 마찬가지다.
특정 지역에 대한 정치권의 신의가 아무리 중요해도 국익에 비교하면 전체와 부분일 뿐이다.
'없던 일’로 돌릴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국가 백년대계에 어긋날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강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멍석을 펴고 마주앉아 차분히 따져 봐야 한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한 시대라지 않는가. 의견 대립이 첨예할 때에는 서로 허심탄회하게 논의해야 비로소 상생에 이를 수 있다.
급하게 서두르기는 4대강이나 외국어고, 군 가산점 등 거의 모든 사회 현안에 공통된 현상이다.
목적은 아랑곳없이 지엽말단에만 매달리다 후손들에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렸다는 비아냥거림에 몰린 사례는 우리 역사책에
숱하게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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