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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만큼 다사다난했던 한 해도 드물었던 것 같다.
IMF이후 최대의 불황이라는 서민들의 하소연이 줄을 이었고,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대선이 있었으며 연말에 터진 태안반도의
원유유출사건은 온 국민을 근심에 빠트렸다.
그러나 고난이 닥칠수록 더욱 빛나는 한국인의 저력 앞에 온갖 악재들도 서서히 걷히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온갖 고통과 재난 속에서도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힘은 희망이라는 소중한 선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08년, 새로운 한 해를 희망으로 출발하시기를 빌어본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을 때 필수적인 일이 지나간 한해를 잘 마무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고유의 풍속인 동짓날 팥죽의 유래와 팥의 약효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뜻 깊은 일인 것 같다.
동지(冬至)는 아시다시피 일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이다.
낮은 태양이 지배하는 시간이니 양(陽)에 해당하고 밤은 달이 지배하는 시간이니 음(陰)에 해당한다.
밤이 가장 길다는 것은 음기가 극에 달한다는 의미이지만 역설적으로 동지가 지나면 양의 힘이 서서히 길어진다는 뜻이다.
즉,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인 것이다.
그래서 역학에서는 동지를 새로운 한해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부터 동지를 아세(亞歲), 즉 작은 설날이라고 부른 것이다.
동짓날 팥죽이 다른 시기에 먹는 팥죽과 다른 특징은 새알심이라는 단자를 넣어서 먹는 것이다.
이 새알심을 나이 수만큼 먹어야 한살을 더 먹는다고 보는데, 여기에는 알(卵)이 상징하는 독특한 의미가 있다.
고구려의 주몽신화, 신라의 박혁거세와 석탈해신화, 가야의 김수로왕신화 등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알이다.
알은 다산과 재생의 상징이다.
또한 기존의 체제를 허물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새알심을 먹는다는 것은 지난해의 좋지 않았던 모든 일을 소멸시키고 새로운 한 해를 여는 의식인 것이다.
동짓날에 팥죽을 먹거나 집안 여기저기에 뿌리는 풍습은 중국과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인데,
여기에는 귀신을 물리친다는 축귀(逐鬼)의 의미가 있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중국 진나라 때 공공씨(共工氏)라는 사람에게 말썽장이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서 역질(천연두)귀신이 되어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다고 한다.
생전에 아들이 팥을 싫어했다는 것을 떠올린 공공씨가 팥죽을 쑤어서 귀신을 물리친 후 민간에 동짓날 팥죽을 쑤어서
역귀와 집안의 잡귀들을 물리치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이와 다른 전설이 전해지는데, 신라시대 어느 선비의 이야기다.
어느 마을에 한 선비가 살았는데, 집안이 궁핍하기는 하나 사람됨이 진실하고 덕이 많았다.
어느 날, 지나가던 과객이 찾아와 하룻밤 묵고가기를 청하니 흔쾌히 응했다.
다음날 새벽, 길을 떠나기에 앞서 과객이 선비에게 친구가 되기를 청했다.
이후 가끔씩 선비를 찾아온 과객은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어 선비를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과객은 늘 한밤중에 찾아왔다가 닭이 울기 전에 반드시 떠난다는 것이었다.
세월이 가면서 선비는 큰 부자가 되었는데, 문제는 나날이 몸이 여위고 병색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덕이 높은 스님을 찾아뵙고 방도를 물으니 그동안의 연유를 들은 스님은 그 과객에게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 과객의 답변인즉 백마의 피를 가장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과객이 무서워진 선비는 스님의 말대로 백마를 잡아 집안 구석구석에 백마의 피를 뿌렸다.
동짓날을 맞아 선비를 찾아온 과객은 이를 보고 도깨비로 변해 도망가면서 선비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후 선비는 건강을 회복했는데, 문제는 이 과객이 동짓날만 되면 다시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는 것이었다.
매년 백마를 잡아서 피를 뿌릴 수도 없고 하여 다시 스님에게 가르침을 청하니 팥물이 백마의 피와 빛깔이 같으니 팥죽을 쑤어서
집안 여기저기에 뿌리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팥은 한방에서 적소두(赤小豆)라고 칭하는데, 신장병으로 인한 부종을 없애고 당뇨, 이질, 종기 등을 치료하는데 주로 사용한다.
근래에는 비만증과 고혈압을 예방하는 약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이젠 동짓날에만 팥죽을 먹을 것이 아니라 틈틈이 먹어 건강도 지키고 액운도 물리친다면 금상첨화가 아닐는지.
하수영
한의학박사.
대전대학교 한의학과 겸임교수
라임한의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