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서
젊은 네티즌 사이에 큰 인기
6.10 만화 '100' 작가
최 규 석
요
즘 국내 만화에 젊은이들의 사랑과 일상을 말하는 말랑말랑한 웹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만
화가 최규석(32) 씨의 작품들에는 차가운 세상을 뜨겁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있다.
그의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는 귀여운 둘리를 중년의 이주노동자로 만들었고, 환경만화로 착각하게 하는 제목의
'습지생태보고서'는 비만 오면 물이 고이는 반지하 단칸방에서 사는 만화학도들의 생활보고서다.
'대한민국 원주민'에는 가난하고 평범한 보통 한국인들의 초상이 자전적인 이야기 속에 녹아 있으며, '100℃'는 1987년 부모님이
눈에 밟혀 선후배를 외면했던 대학생 영호가 광주 민주화 운동을 알게 되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겪으면서 학생운동에
뛰어든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가운데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의 제안을 받아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듯 풀어낸 '100℃'는 중ㆍ고등학생들을 위해
만들었지만 인터넷에서 젊은 네티즌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고 1년만에 단행본(창비 펴냄)으로 엮여 최근 세상에 나왔다.
그의 만화에는 사회의 동량이 아니라 이방인 신세가 된 '88만원 세대', 문명의 이기를 느끼지 못하는 시골사람들 등 우리의
이웃들이 살아 숨 쉰다. 이들이 왜곡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계속 조명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일단은 나 자신이
꼬여서 그렇다"며 웃었다.
"한 인간에게 다양한 인간들에게서 드러나는 특성들이 모두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깨닫지 못할 뿐이죠.
알 수 없는 인간의 복잡성을 하나씩 잘라 보여주는 것, 그런 데서 쾌감을 느껴요."
그는 "가장 높은 부분과 가장 낮은 부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 사회가 괜찮아진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현실을 날카롭게 반영하면서 우리가 사는 모습을 생생하게 담은 작품들을 내놓은 그에게는 오세영, 박흥용,
이희재를 잇는 리얼리즘 만화가라는 수식어가 으레 따라붙는다.
그는 이런 수식어에 대해서도 "처음 단편들 때문에 붙은 수식어 같은데 '습지생태보고서'처럼 웃음을 목적으로 한 코미디도
썼다"며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그러면서 그는 "재미가 우선, 주제가 다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둘이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의미 있으면서 지루하지도 않은 작품을 그릴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언뜻 느껴진다.
"내 주제가 의미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재미있을 수 있는 거죠. 주제란 게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긴 시간
생각해온 거니까요.
살면서 느끼는 이상한 순간, 재미있는 순간, 껄끄러운 순간이 있잖아요.
순간적으로 잡아내는 느낌들이지만, '그 느낌이 왜 중요한가'는 그동안 했던 생각을 통해 의미를 명확히 하는 과정을 거치는 거죠."
'100℃' 단행본에 붙인 '작가의 말'에서 그는 6월 항쟁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고, 당시에는 민주화를 쟁취했을지 모르나
지금의 국민은 민주화를 생활에서 느끼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처음에는 이 작업을 고사했다고 소개했다.
그의 이런 편견과 무지를 일깨워준 계기가 된 것은 어느 장애아 엄마의 한 마디였다.
'선생님은 참 좋겠어요. 언제든지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둘 수 있어서요. 하지만, 전 평생 돌봐야 해요' 라고 하더군요.
그때가 제가 23살이었는데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어요. 그때부터 그 엄마의 이야기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고민하면서
마음을 잡기 시작했죠."
그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없애려면 장애인과 비장애인ㅇ 같이 어울려서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잠깐 머무르면서 봤던 서울에 대해 '쓴소리'를 했다.
"서울에는 밖에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는것 같더라구요. 도로 구조가 휠체어 타고 다니기엔 힘든 자동차 위주의
도로 같았어요. 지하도나 계단으로도 많이 가야 되고... 이런 시스템은 노인이나 장애인에게는 굉장히 불친절 한 거죠."
하지만 그는 시스템보다도 '삶에 대한 희망'을 강조했다. "그런데 계단이나 턱이 있다고 장애인이 살기 어려운 것은 아니예요.
계단이 있어도 사람들이 휠체어를 들어 올려주면 힘들지 않지요. 최종적으로는 사람이 중요해요.
그럼에도 그가 결국 작업을 맡기로 한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 아무것도 아닌 걸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렸고 제 삶의 기회를 포기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100℃'의 단행본에는 '본격 민주주의 학습만화'라는 부제를 단 부록 '그래서 어쩌자고?'가 실려 있다.
그는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설명을 곁들여 보여준다는 전제로 쓴 '100℃'가 단행본 단독으로 실려서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이런 부록을 덧붙였다.
"6.10항쟁을 동학농민운동처럼 받아들이지 않게 하려면 현재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죠.
비정규직, 양극화 같은 현재의 문제가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설명할 때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앞의 이야기를 이왕 읽었으니 재미없는 이야기라도 한 번쯤 자신의 관점, 반대 관점을 차근차근
생각해 볼 기회를 가져보자는 뜻으로 학습만화를 덧붙였어요."
그는 스스로 '게으르다'는 겸손한 표현을 여러 차례 썼다. 진짜 꼭 하고 싶은 작업들은 계속 미뤘고 급하게 짜낸
작품들만 했다는 것이다. 차기작으로 삼을 작품은 '슈퍼 히어로' 또는 '노동 만화'라고 했다.
"외국의 슈퍼히어로 만화를 보면 엄청난 능력이 있는데도 외부인으로 묘사되잖아요. 핍박받거나 정체를 숨기죠.
뛰어난 초인들이 떼거리로 있어 기득권층이 되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또 하나는 노동계 이야기를 취재한 게 있어요.
어떤 걸 하면 재미있게 작업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죠."
김지연 문화부 기자 | cheror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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