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대부분의 학교 칠판 위에 걸려 있던, 누구나 기억하는 아무 감동도 없던 메마른 시가 있었다.
푸시킨의 시다. 대충 이렇게 시작한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도대체 왜 그렇게들 푸시킨의 시를 걸어 놓았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푸시킨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고등학생에게 인생이란 항상 나를 속이려는 아주 못된 어떤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인생을 처음부터
그저 참고 견뎌야 하는 것으로 배웠다. 기쁨의 날이 오리라고 이야기는 하지만 기쁨의 내용이 어떤 것인
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아무도 그 기쁨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어데스뎀뎀’ ‘디데어데어디’를 외우지 못하면 날아오는 독어 선생의 참나무 몽둥이에 짓이겨지면
서도 나는 외쳤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서투른 주먹질로 걸려 하루 종일 교무실 앞에 무릎 꿇
고 앉아 호출당한 어머니를 기다리면서도 나는 중얼거렸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머리 몇 센
티 좀 더 길러보겠다고 피해 다니다 결국 교련 선생의 바리깡에 고속도로가 난 머리를 밀러 간 이발소의
거울에 또 그 놈의 푸시킨이 비치고 있었다. 그것도 이번에는 아주 유려한 이발소 그림을 배경으로 폼 나
게.
결국 나는 고등학교 3년을 내내 이 시의 앞부분만 반복하여 외우며 견뎌냈다. 고등학교 시절이 지나고 대
학생이 되어도 인생은 계속 나를 속였다. 도대체 이 우울한 날들을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지 아무도 이야
기해주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 기쁜 날들은 아예 안 올 것 같은 참담한 예감 마저 들었다.
학교 교문 앞에서 최루탄을 쏴대
는 전경들에게 돌을 던지면서도 나는 너무 불안했다. 도대체 이 우울한 날들은 언제까지 계속될 건가.
푸시킨의 이 무서운 예언은 군대 내무반에서도 반복되었다. 취침 전 점호시간. 침상 저 끝에서부터 기합
이 차례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군대 점호에서 기합은 순전히 일직사관 맘 대로다. 즉 아무리 점호준비를
잘 해도 일직사관이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흰 장갑 끼고 천정 형광등을 문대면
어찌 먼지가 안 묻어 나올까. 항상 그런 식이었다.
공포 속에서 곧 닥쳐올 내 순서를 기다리며 나는 맞은 편 벽의 시를 올려다 보았다. 제길 이럴 수가.
또 그 시였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그렇게 인생은 항상 나를 속였다. 내 짧은 인생에서 푸시킨의 이 우울한 예언은 참으로 오랫동안 지속되
었다. 인생은 단지 참고 견디는 것일 뿐이었다.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오게 되어 있는 기쁨의 날에는 인
생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대해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인내는 쓰고 그 결과는 단 것이라지만 그 결
과가 어떻게 단 것인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모두들 이러고 산다. 그저 이를 악물고 견딜 뿐이다.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공한 후
에도 여전히 이를 악물고 살아간다. 새해를 시작하면서도 모두들 이를 악물고 한 해를 견딜 생각뿐이다.
한 해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모두 새해의 목표를 세운다. 목표는 다양하다. 하지만 목표를 세우는 양상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지난해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해에 대한 다짐이그것이다.
하지만 어김없이 고난을 자처하고, 그것을 이겨내야 하는 ‘인내’와 ‘극기’로 일관한다. 행복하고, 재
미있게 살겠다고 목표를 세우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러니 모두들 작심삼일이 될 수밖에.
인내와 극기의 내용은 해가 거듭될수록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지만 인내와 극기의 결과로 찾아오는 행복은
갈수록 추상적이다. 잘못된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는 절대 기쁨의 날이 찾아오지 않는다.
기쁨의 날에 어떻게 행복할지 예상을 못하는데 어떻게 이 우울한 날들을 견딜 수 있을까. 행복할 생각부터
명확히 해야 인내할 수 있고 목표를 이룰 수 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인내인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목표를 분명히 하는 심리적 과정을 ‘틀 만들기(framing)’라고 부른다. 이는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
하는 방식을 뜻한다. 이 틀이 어떤가에 따라 똑같은 상황에서 사람의 행동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상황을 생각해 보자.
1 당신은 의사다. 당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600명이 죽을병에 걸렸다. 이 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A치료법을 선택하면 당신은 200명을 살릴 수 있다. B치료법을 선택하면 600명 모두를 살릴 수 있는 확률이
1/3이고, 아무도 살릴 수 없는 확률이 2/3다. 당신은 어떤 치료법을 선택할 것인가? (대부분 A를 선택한
다)
2 당신은 의사다. 당신의 살고 있는 지역에 600명이 죽을병에 걸렸다. 이 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C치료법을 선택하면 400명이 죽는다. D치료법을 선택하면 아무도 죽지 않을 확률이 1/3이고, 모두 죽게 될
확률이 2/3다. 당신은 어떤 치료법을 선택할 것인가? (대부분 D를 선택한다)
위의 상황은 잘 들여다보면 두 개가 똑같다. 하지만 1번 에서는 200명을 살릴 수 있는 확실한 A치료법(2
번의 C와 동일)을 선택하고, 2번에서는 위험한 D치료법(1번의 B와 동일)을 선택한다. 사람들은 왜 상황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할까?
자신이 하는 행위의 목표에 대한 의미부여, 즉 틀 만들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1번에서는 ‘살리는 방법’
이라는 틀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확실한 치료법 A를 선택한다. 반면 2번에서는 ‘죽게 되는 방법’의 틀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위험한 치료법 D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행위의 목표가 한 쪽은 살리는 방법에, 다른 쪽은 죽이는 방법에 맞춰짐에 따라 수학적 확률은 똑같음에
도 전혀 다른 행동선택이 이뤄진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는 것은 객관적 상황에 대한 심리
적 해석이라는 이론으로 카너먼 교수는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이 틀 만들기라는 심리적 의미부여는 도대체 어떻게 이뤄지는가? 이 물음에 대해 최근 카너먼 교
수는 아주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지난 12월 미국의 ‘사이언스’ 지에 발표된 ‘하루의 재구성
’이라는 논문에서 카너먼 교수는 약 1천 명의 미국여성을 대상으로 하루의 일과를 에피소드로 나눠 순서
대로 적게 했다.
예를 들면 아이 돌보기, 직장에서 일하기, 친구와 수다 떨기 등. 그 다음은 각각의 에피소드에 대한 심리
적 상태를 ‘긍정적, 초조한, 피곤한, 능숙한’ 등과 같은 형용사로 구분하여 점수를 매기도록 했다.
그 결과 친한 사람들 만나기, 사교활동, 휴식 등은 긍정적인 점수를 받은 반면, 직장생활, 아이 돌보기, 출
퇴근 등은 부정적인 에피소드로 평가되었다. 여기까지는 아주 평범한 연구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연구결과가 흥미로운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다. 이 여성들은 가장 피곤한 느낌을 주
는 사람으로 자신의 배우자를 꼽았고, 두 번째로는 자신의 자녀를 꼽았다.
가장 즐겁고 행복해야 할 자신의 가족이 피곤한 사람 1, 2등으로 꼽히는 것은 삶의 의미부여가 의외로 단순
하기 때문이라고 카너먼 교수는 주장한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거나 스트레스로 인한 가벼운 우울증과
같은 일상의 느낌이 자신의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즉 사랑하는 아이들, 평생 나와 함께 하는 사랑하는 남편과 같은 거창한 구호보다는 일상에서 남편에게 느
끼는 짜증스러움, 자녀들에게 느끼는 귀찮음과 같은 심리가 일상의 의미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직장에서의 성공, 결혼의 기쁨과 같은 인생의 중요한 사안들은 아주 가끔 기억날 뿐 정작 지속되는 일상의
의미에 그리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반면 친구 만나기, 사교, 휴식을 즐기는 것이 가장 기대되고
즐거운 일이라고 대답한 이유는 단순히 느낌이 좋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생 생활에 속고만 살다 가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의미부여, 즉 틀 만들기의 과정에 너무 소
홀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남편, 예쁜 아내, 사랑스런 자녀들을 곁에 두고서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일상
에서 자신이 느끼는 사소한 감정에 너무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카너먼 교수는 각국의 GNP가 그 나라 사람들의 행복의 척도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소한 감
정과 너무나 동떨어진 수치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차라리 사람들이 무슨 생각으로 일상을 보내는지,
그 느낌을 동일하게 잴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면 그것이 행복의 척도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카너먼 교수가 제안하는 행복의 조건은 너무 간단하다. 좋은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일에 시간을 보다 많이
투자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지 못한다. 실제로 카너먼
교수의 연구에 참여한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해 한 시간은 하루 평균 2시간 42분에
불과했다. 반면 즐겁지 않은 일에 사용한 시간은 9시간 36분에 달했다.
성공이라는 거창한 구호에 더 이상 속지 말아야 한다. 우울한 날을 참고 견딘다고 행복한 날이 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저 우울한 날이 계속될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해서 은퇴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
각한다.
그러나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일수록 은퇴 후 우울증에 걸려 심장계통의 질환으로 죽을 확률이 7배가
높다고 하버드 대학의 앤더슨 교수는 25년간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주장한다. 생활이 속이는 것을 그저 참
을 줄만 알았지, 행복하게 사는 법에 대해서는 너무 무지하기 때문이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또 다시 인내할 생각부터 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일이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부터 생각해야 한다. 즐겁게 ‘자~알’ 놀 생각부터 해야 한다. 일상의 사소한 느낌들을 아주 진지
하게 돌아봐야 한다.
내게 즐겁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라면 남들의 이목에 절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남의 이목에 신경
쓰는 사람처럼 바보는 없다. 이들은 자신이 정말 행복한지, 불행한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다. 평
생 그저 남들 흉이나 보며 살다 간다.
우린 그 동안 자신의 행복을 챙기는 데 너무 무지했다. 행복하고 재미있으면 죄의식을 느껴야 했다. 이 현
상은 일상의 대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린 누구나 잘 먹고 잘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욕한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우린 누구나 재미있게 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또 다시 이렇게
비아냥거린다. ‘놀고 있네!’
잘못됐다. 이런 인간들과는 이제 제발 떨어져 살아야 한다. 우린 정말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 우린 정말
잘 놀아야 한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언제 정말 즐겁고, 재미있고, 행복한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지금이라도 일상의
사소한 행복에 대해 사려 깊게 생각해 봐야 한다. 저녁 식사 후 아내 손 잡고 동네 한 바퀴 도는 것이 정
말 행복이다. 일요일 오후, 좋아하는 음악 틀어놓고 꼬박꼬박 조는 것이 정말 재미다.
착각하지 말자. 인내는 쓰지만 그 결과가 달콤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지금 삶이 자신을 속이는 것을
알면서도 참고 인내해서 나중에 많은 돈 벌면 행복해지고 재미있게 살 수 있으리란 생각은 버려야 한다.
행복과 재미는 그렇게 기다려서 얻어지는 어마어마한 어떤 것이 아니다. 행복과 재미는 일상에서 얻어지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이 사소한 사실을 발견했다고 카너먼 교수가 노벨상을 받을 만큼 세상은 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나중에도 절대 행복하지 않다. 지금 행복한 사람이 나중에도 행복한 법이다.
성공해서 나중에 행복해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지금 행복한 사람이 나중에도 성공한다.
김 정 운
명지대학교 기록과학대학원
여가정보학과 주임교수
명지대학교 여가문화연구센터 소장
저 서
[문화의 심리], [휴테크 성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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