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지난해 연말 예산안 협상의 극적 타결로 위기의 해를 무사히 넘긴 배경엔 독일의 첫 여성총리
앙겔라 메르켈의 눈부신 활약이 한몫했다. 협상 직후 ‘미스 유럽’ ‘유럽의 여왕’이란 찬사가 쏟아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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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주요국이 부흥의 가시밭길이 아닌 쇠락의 안락한 길을 택할 경우 유럽문명의 세계지배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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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바로 메르켈 총리의 대연정 출범을 계기로 유럽에선 포스트 개혁시대의 막이 오른 것 아니냐는 다소
빈정대는 투의 관측들이 나오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볼프강 문초는 메르켈
독일 새 정부 출범에 대해 “독일 유권자들이 경제개혁의 10년 세월을 보낸 후 포스트 개혁시대란 새로운 시대를
출범시켰다”고 평했다.
더 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아나톨 칼레츠키는 “늙은 유럽이 쇠락을 선택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늙은 유럽이란
그의 표현을 빌면 유럽대륙의 2천 년 역사를 지배해온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를 일컫는 것이다.
이 같은 시각은 독일 총선의 핵심 주제를 앞선 프랑스 EU 헌법 국민투표 부결사태 때와 마찬가지로 유권자들이
정치.경제계 엘리트들이 주도해온 경제개혁 아젠다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는 해석에서 비롯된다.
문초가 정곡을 찌른 것은 독일 유권자들이 10년에 걸친 경제개혁의 피로감에 지쳤다는 사실을 짚어낸 것이다.
쉽게 말하면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 등 독일의 정계 지도자들이 개혁을 잘못 이끌었다는 얘기다.
연금 축소 같은 비인기적 축소형 정책에 집착한 반면, 시장자유화와 금융규제 철폐 등 고용창출적 정책을 미룬
잘못된 정책판단 때문이었다고 문초는 지적한다. 그 결과 10년 동안 개혁을 한다면서 약속했던 삶의 질을
향상시키지도, 경제성장률을 높이지도 못했다.
이 같은 배경에서 탄생한 메르켈 새 정부는 대연정 파트너인 사민당에 외무, 재무, 노동, 보건, 환경, 교통
등 개혁의 핵심 포스트 각료직을 내줌으로써 개혁은 물 건너가게 됐다는 분석이다.
칼레츠키는 한 걸음 더 나가 독일의 상황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도 거의 그대로 재현될 것으로 내다본다. 이미
지난해 여름 EU 헌법 부결사태로 개혁에 식상한 유권자들의 뜨거운 맛을 본 프랑스에선 오는 200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개혁파의 입지가 갈수록 축소될 것으로 전망된다.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의 타협적인 현상유지 정책이 경쟁자인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의 급진적이고 역동적인
정부 공약을 슬금슬금 갉아먹고 있는 양상이다.
이탈리아에선 이미 오래 전에 의미 있는 경제개혁 정책을 포기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정부를 현상유지 쪽으로 좀
더 기운 중도좌파 쪽이 대체할 것 같은 모양새다.
EU 차원에서 보면 독일과 프랑스 유권자들의 개혁 거부 선택은 유럽에서 시장지향 컨센서스를 이끌어내려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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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새 정부가 대연정 파트너인 사민당에 개혁의 핵심 포스트 각료직을 내주면서 개혁은 물 건너가게 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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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새 정부가 새해 들어 극도로 신중한 시라크 정부와 협력할 공통조항을 찾아내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며,
강력한 독-불 축을 다시 구축해 EU 차원에서의 급진 개혁을 저지할 것으로 칼레츠키는 내다본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이러한 개혁의 실패 내지 중단이 관점에 따라 이해가 갈린다는 데 있다고 칼레츠기는 지적한다.
21세기 미국, 중국과 3강의 하나가 되기 위한 유럽합중국의 꿈을 간직한 이상주의자들에겐 경제주도권의 상실을
의미하는 개혁의 실패가 재앙을 의미할 수 있다.
실제로 기업인들은 버거운 사회복지 제도와 경직된 노동시장의 개혁, 그리고 또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는 보호주의
철폐 없이 EU의 경쟁력 제고를 바랄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탈리아 기업가인 카를로 드 베네데티는 “아무도
손대려고 하지 않는 연금과 노동개혁을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그런 다음 이민 우대정책을 폄으로써 젊은 유럽을
만들어야 한다" 강조했다.
세계 최대 철강기업 아르셀로의 최고경영자 기 돌레는 “시장점유율을 떨어뜨리는 쪽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세계
최고의 유럽기업을 만들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요제프 아커만 도이체방크 회장은 “우리가 질투심에 불타 국익만을 보호하려고 하면 그만큼 더 가난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유럽의 일반 시민들에겐, 그것도 노동조합의 보호 아래 튼튼한 직장을 갖고 있는 장년층 이상의 보수적
시민들에겐 경제적 활력의 상실쯤은 중요한 일로 인식되지 못한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연금의 혜택과
고용보장이며, 젊은이들과 비노조원들에게 고통을 안기는 높은 실업률은 당연히 감내해야 할 작은 희생일 뿐이다.
이처럼 유럽통합 회의론자들은 경제개혁 모델의 무력화를 오히려 반길 것이다. 하지만 정말 비극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가 끝내 부흥의 가시밭길이 아닌 쇠락의 안락한 길을 택할 경우 세 나라가 주로 창출한 찬란한
유럽문명의 세계지배를 상실할 것이란 점이라고 칼레츠키는 개탄하고 있다.
이상인 브뤼셀 특파원 | sangin@yn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