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중국 선전의 파운드리 업체인 D사가 갑자기 첨단 비메모리 반도체를 양산할 계획이라는
정보가 홍콩에 전해졌다.
오디오.비디오 시스템에 들어가는 모터제어 드라이브 IC 제조기술은 당시만 해도 한국 등 반도체 선진국만이 갖고 있는
기술이었다.
조심스럽게 진위를 알아보던 한국 당국은 여기에 국내 비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I사의 전 홍콩지사장 박모 씨가 개입한
사실을 파악했다.
이 기술을 중국으로 유출, D사와 반도체칩 양산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메일 등 통신수단을 통해 지속적으로 원격으로 기술을 지원하며 자체개발 기술로 위장하려 했던 사실도 밝혀냈다.
중국의 한국에 대한 기술 수집 대상이 휴대폰.전자제품.자동차 등 대기업의 최첨단 기술 분야였던 것을 넘어 소위
‘돈이 되는’ 중소기업의 부품.소재 기술로까지 무차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최근엔 중국에 대한 정보통신(IT) 제품 수출 증가율이 2002년 이후 처음으로 두 자릿수 이하로 하락했다고 한다.
올해 1∼7월 사이 대중국 IT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7.4% 증가에 그쳤다.
이는 2005년 증가율 28.7%의 4분의 1 수준이다.
특히 반도체는 지난해 117% 증가했으나 올해 1∼7월에는 4.5%로 급감했다.
특히 한국과 중국 간의 IT 기술 격차가 2003년 2.6년에서 올해 1.7년으로 단축됐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한국의 강점 분야인 차세대 이동통신, 광대역 통합망(BcN) 등에서 지속적으로 기술격차를 줄여나간 결과다.
앞으로 5년 내에 한국과 중국간 이동통신, 2차 전지, 기전 등 주요 IT 분야에서 기술격차는 1년 정도로 줄어들 전망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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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컴퓨터 인수전에 뛰어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던 ‘레노보’의 컴퓨터 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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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이처럼 한국과의 IT 기술 격차를 줄이면서 한국으로부터 IT 제품 수입을 줄이고 있는 것을 무조건 중국 산업스파이
활약이나 핵심기술자의 유출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무엇보다 중국이 지속적으로 IT 육성전략과 과학기술 정책을 추진하면서 선진기술 확보에 노력하고 있는 것이 중국
IT 발전의 주요 요인일 것이다.
거대한 시장을 배경으로 현지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연구개발(R&D) 투자와 인수합병(M&A)을 추진하면서 급속히 성장했다.
하이얼, 롄샹(레노보), TCL 등 세계적 기업들이 출현하고 LCD TV, 휴대폰 등 첨단제품 생산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기술개발에서 수십 년간 뒤쳐졌던 중국이 이를 하루 속히 만회하기 위해 ‘손쉬운’ 방법을 선호하고 있다는 게
정설인 만큼 한국으로선 여기에 손을 놓고 있어선 안 된다.
첨단 IT 기술 확보 방안으로 중국은 먼저 한국기업 인수에 주목하고 있다.
중국 BOE그룹이 지난 2002년 11월 하이닉스 반도체의 TFT-LCD 사업부문을 3억8천만 달러에 인수한 것을 시작으로,
중국 최대 온라인 게임 유통사인 샨다네트워킹은 2004년 ‘미르의 전설’ 시리즈로 잘 알려진 국내 게임업체
액토즈소프트를 인수했다.
최근엔 삼보컴퓨터 인수전에 레노보가 뛰어들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중국은 이들 기업 인수 후 자금지원, 구조조정을 통한 실적 개선보다는 첨단기술 이전에 우선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BOE그룹이 인수한 하이디스는 지난해 대규모 적자를 냈고 올 상반기에도 870억 원의 영업적자를 기록, 부채 규모가
6천억 원에 달하고 있다.
당초 인수금액 3억8천만 달러 가운데 지금까지 40%인 1억5천만 달러만 지급하고 추가 자금지원에 인색한 결과다.
액토즈소프트도 올 상반기 영업손실 규모가 26억 원에 이른다.
최근에는 협력업체나 기술자, 설계도면을 통한 기술유출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큰돈이 드는 M&A보다는 ‘머릿속’에 기술을 갖고 있는 핵심 엔지니어를 끌어들이는 것이 손쉽기 때문이다.
이번 I사의 기술유출 사건에 앞서 2005년 7월엔 O사가 반도체용 웨이퍼 제조기술을 중국으로 유출하려다 적발됐고,
2004년 7월엔 M사 연구원이 휴대폰 생산관련 핵심기술을 홍콩을 통해 중국으로 넘기려 했다.
2003년 12월엔 L사 연구원이 휴대폰 컬러모듈 설계기술의 중국 유출을 시도했다 적발됐다.
I사가 기술을 유출했을 경우 한국에 미치는 피해는 2천350억 원.
앞서 일어난 세 건으로 인한 예상 피해 규모는 각각 3천500억 원, 4조 원, 4조3천억 원에 이른다.
국가정보원은 2003년 이후 올 상반기까지 모두 72건의 기술유출 시도가 있었으며, 이 기술이 유출됐을 경우 피해규모는
90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72건 가운데 전기전자 36건, IT 기술이 18건 등 모두 54건으로 75%에 달한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 유럽도 중국의 산업스파이에 경계령을 내리고 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최근 중국 스파이들이 군사기밀은 물론 각종 기업정보, 첨단기술을 본국으로 빼돌리고 있다고
판단하고 엄청난 자금과 인력을 투입했다.
지난해에는 미국의 대표적 IT 기업인 선마이크로시스템스와 트렌스메타에서도 산업기밀 유출사고가 발생할 뻔했다.
이들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중국인 기술자 2명이 기밀정보를 획득,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이용해 중국으로
도망치려다 FBI에 체포됐다.
최근엔 핵심인력의 스카우트 외에도 컴퓨터 바이러스를 활용하는 수단이 동원되고 있다.
‘트로이 목마’와 같은 악성 프로그램을 기업 컴퓨터에 침투시켜 기업의 핵심기술을 빼내고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포브스지에 따르면 현재 기업정보를 빼내기 위한 변형 프로그램만도 인터넷상에 10여 개가 떠돌고 있다고 한다.
일단 중국은 한국에 대해선 핵심기술을 확보하고 있는 전.현직 직원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기업간 전직에 대해선 법적 제한을 받지만 해외기업으로 옮기는 데는 별다른 제약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구조조정이 상시화되면서 신분보장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는 이들 핵심기술자는 일확천금을 노리고 기술을
유출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 기업에 1∼2년간에 걸쳐 핵심기술을 전수한 이들 기술자도 곧 ‘팽’당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현재 중국 광둥 지역에만 중국 기업에 고용돼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한국 기술자가 수백 명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국 IT 분야의 인재들이 기술유출.판매에 대한 유혹에 취약한 점은 우리가 장기적으로 극복할 과제다.
하지만 먼저 정부나 기업이 기술유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충분한 예방 보안체계를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가안보와 직결된 핵심산업에 대해선 미국의 ‘엑슨-플로리오법’처럼 해외매각에 제약을 두는 법적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구조조정 차원의 기업매각에 대해서도 정부가 일정지분을 보유, 약속 이행시까지 감시하는 방안도 논의돼야 한다.
기업 입장에서도 중국 현지 R&D센터를 설립, 중국이 편법을 통한 기술확보 수요를 차단하고 기술유출의 위험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 해당 정부기관에 협조를 요청하거나 신고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주호 홍콩 특파원 | jooho@yn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