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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천참사 이후 북한은...

'개혁 개방-빗장' 선택의 기로

북한은 17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참사지역인 룡천을 새로운 도시로 꾸민다는 계획이다. 신도시 건설의 구체적 계획안은 나오지 않았지만 북한 매체들이 그동안 보도했던 피해규모와 복구 내용 등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지작할 수 있다



북한 룡천 폭발사고 구호물자를 실은 트럭들이 비무장지대를 통과해 북으로 향하고 있다

평안북도 룡천역 열차 폭발사고는 그동안 북한 내부적으로 수없이 일어났던 단순한 사건사고 차원을 넘어서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 대외정책 등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4월 22일 룡천참사가 있은 뒤 국제기구와 국제구호 단체들이 룡천과 신의주시를 중심으로 구호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남한과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유럽연합(EU) 등 전세계가 대북지원에 팔을 걷고 나섰다.
이번처럼 국제기구와 국제 구호단체들의 북한 내 활동이 두드러지고 전 세계가 대북지원에 한 목소리를 낸 적은 북한 정권 창건 56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예상 밖의 국제사회의 지원 열기에 북한 측도 연신 ‘인민들을 고무시키고 있다’는 말로 당혹스런 표정을 애써 감추고 있다. 그만큼 룡천참사가 북한 지도부와 주민들에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이 크다는 점을 반증해준다.
그렇다면 북한은 룡천참사를 계기로 개혁개방의 폭을 확대하는 등 전화위복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체제단속을 강화하는 등 더욱 ‘빗장’을 지를 것인가가 국제사회의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룡천 신도시 건설계획...신의주 특구 배후도시?
북한은 170여명의 사상자를 낸 참사지역인 룡천을 새로운 도시로 꾸민다는 계획이다. 사고 일주일 뒤인 4월 29일 관영 조선중앙방송은 평안북도 피해복구지휘부(피해복구대책위원회ㆍ책임자 박경삼 도 인민위원장)에서 룡천읍 지구를 완전히 새로 건설하는 설계작업에 들어갔다고 보도해 그런 사실을 확인해줬다.
신도시 건설의 구체적 계획안은 나오지 않았지만 북한 매체들이 그동안 보도했던 피해규모와 복구 내용 등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우선, 피해가 극심한 룡천역 반경 2㎞ 지역부터 재건사업을 추진한 뒤 점차 주변지역으로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 도 복구지휘부는 25개의 공공건물을 신축하고 800가구의 주택(살림집)을 새로 지을 계획이다.
새 주택은 북한의 살림집 표준설계에 따라 각각 6가구, 12가구가 입주하는 2~3층짜리 연립주택 규모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 폭발 충격으로 반파된 3천600가구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실시할 방침이다.
평안북도 지휘부는 이미 도내 기관. 기업소, 시.군 돌격대(건설전담 인력) 등 매일 2만여 명을 룡천 사고현장에 투입해 구슬 땀을 흘리고 있다. 조선중앙통신(4.27)은 이에 대해 "주민 생활을 종전보다 더 높은 수준에 올려 세우기 위한 목표 밑에 통이 크게 일 판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중앙정부도 이 사업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북한 내각의 성(부처).중앙기관 간부와 전문가들로 '룡천피해복구 중앙지휘부'(책임자. 로두철 부총리)를 구성하고 각 성은 해당분야별로 피해복구 사업을 지원토록 조치했다.
룡천 신도시 개발이 끝나면 북한당국은 룡천이 ‘사회주의 선경(仙境)’으로 바뀌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할 것으로 보인다. 국제사회의 시선이 집중된 룡천 신도시는 북한이 외부세계에 자신들의 체제를 선전할 수 있는 더없는 호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신도시 룡천을 폭발사고가 있기 전의 이름 없었던 룡천처럼 그대로 둘 것인가. 신도시 룡천의 기능을 놓고 벌써부터 호사가들은 입담을 뽐내고 있다. 신의주 특구의 배후도시, 북부지역 개발 모델, 신의주에 이어 중국 동북3성과의 제2 교역도시 등 여러 관측들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관측들은 북한 지도부에서도 충분히 검토해볼 수 있는 사안들이다. 앞으로 북한이 룡천지역을 복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신도시 룡천의 기능은 윤곽이 점점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룡천참사는 북한의 국경도시들이 전반적으로 사회간접자본(SOC) 시설이 낙후돼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북한은 백두산지구 일대에 서구식 주택을 짓고 통신 현대화를 위한 광케이블을 대대적으로 깔고 있다. 이동통신망도 일부 개통했다.
룡천지역을 신도시로 바꾸는 작업은 북부지역의 도시들을 개조하는 동력이 될 것이 확실해 보인다. 또 신도시 개발과 함께 복구될 철도와 통신시설 체계도 앞으로 북-중교역을 확대하는데 요긴하게 이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렇게 되면 북한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다가 양빈 초대 신의주 행정장관이 중국당국에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되면서 주춤거리고 있는 신의주 특구 개발을 앞당길 수도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중국 방문 기간(4.19~21) 후진타오(胡錦濤) 당 총서기겸 국가주석과 장쩌민(江澤民)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우방궈(吳邦國) 전인대 상무위원장(국회의장격), 원자바오 (溫家寶) 총리, 쩡칭훙(曾慶紅) 국가부주석 등 중국 지도층을 모두 만나 북-중 경제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일부 관측통들은 북한과 중국이 김 위원장 방중 때 중국이 올해부터 적극적으로 추진 중인 랴오닝(遼寧), 헤이룽장(黑龍江), 지린(吉林)성 등 동북 3성의 진흥계획과 신의주 특구를 연계시키는 방안도 제시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신의주 특구 개발에 대해 북-중 지도부가 공감대를 형성했다면 룡천은 신의주시와 함께 북-중 교역의 핵심도시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높다.

지도부의 개혁개방 체감지수 높여
룡천참사가 외부에 알려지면서 국제사회의 대북지원 손길이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 특히 핵문제로 북한과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미국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사고 다음 날 리처드 바우처 국무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매우 슬픈 일"이라고 위로를 표시한 뒤 "우리는 항상 북한주민들을 인도주의적으로 도와줄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도 4월 26일 북한에 인도주의적 지원을 할 것이라고 밝혔고 같은 날 미국 정부는 백악관 대변인 성명을 통해 "우리는 (북한 열차사고에 대한) 국제조사팀의 조사결과를 받았다"며 "사고로 집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구호품을 구입하도록 적십자사를 통해 10만 달러를 제공할 것"이라고 구체적 지원규모를 제시하기도 했다.
또 "필요하다면 북한인들과 협력하도록 구급의료 전문가팀은 물론 의료 장비와 의료품들도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고 한발 더 나아갔다.
미국의 대북인도지원 의사 표시와 함께 일본과 유럽연합 회원국들도 잇따라 지원의사를 표명하는 등 핵 파문으로 냉냉하던 대북 시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미국의 지원의사에 대한 북한 측의 반응도 놀라웠다.



열차 폭발사고로 파괴된 룡천역 일대 복구공사가 한창인 가운데 조총련 기관지 인터넷 조선신보에 실린 룡천 복고건설 부감도

뉴욕에 있는 유엔주재 북한 대표부의 한성렬 차석대사는 5월 4일 연합뉴스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북-미간 대화창구인 ‘뉴욕 채널’을 통해 미국의 지원의사를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면서 사고 수습 지원을 위한 양국간 대화가 계속될 것이라는 기대를 나타냈다.
한성렬 차석대사는 미국의 지원이 양국관계에 미칠 영향과 관련, "북미 관계의 근원적인 문제는 불신과 오해인 만큼 이와 같은 접촉을 통해 신뢰를 쌓을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룡천참사가 오히려 북한과 미국간의 간극을 줄이는 촉매제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 발언이었다.
이와 함께 일본의 피스보트, 일-북 국교촉진국민협회, 조선여성과 연대하는 회, 북조선 인도지원의 회의 등 7개 단체는 `룡천 폭발사고 피재자 구제 일본연락회'를 구성하고, 1천만 엔을 목표로 모금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앞서 일본 정부는 1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입장을 표명했다. 일본 사민당의 마다이치 세이지(又市征治) 간사장도 최근 총련을 방문해 서만술 의장에게 성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나라보다 동족을 돕자는 남한의 열기가 더 뜨거웠고 지원 규모도 가장 컸다.
정부와 대한적십자사, 대북지원 민간단체가 5월 2일 현재 북한의 룡천참사 현장에 지원한 구호물품은 대략 121억5천459만원 어치에 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부와 대한적십자사가 4월 28일과 30일 한광호 컨테이너와 대한항공 화물전용기를 통해 두 차례 수송한 구호물자는 의약품 81종에 3천150만원어치, 의료장비와 의료비품 91종 4억8천만 원 어치, 응급구호품 5억406만원 어치, 생필품 3억7천103만원 어치 등 188종 13억8천659만원 상당에 이른다.
또 유진벨, 국제기아대책기구, 한민족복지재단 등 30여개 대북지원 민간단체를 비롯해 51개 단체로 구성된 '북한룡천역폭발사고 피해동포돕기운동본부'(룡천동포돕기본부)와 주요 대북지원 단체들이 단독으로 북한에 보낸 구호물자는 약 108억7천800만원 어치로 추정된다.
북한 룡천역 폭발사고 피해동포돕기 운동본부 사무국을 맡고 있는 남측 민간단체인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은 5월 5일 평양에서 북측 민족화해협의회와 올해 안으로 룡천소학교, 탁아소, 유치원 각각 1개를 공동으로 재건하자는 내용의 룡천복구 합의서를 체결하기도 했다.
남측의 이런 지원에 대해 박봉주 북한 내각 총리는 5월 1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진행된 남북노동자 5.1절 통일대회 환영만찬에서 "룡천과 이름이 같은 남측의 한 초등학교 학생들이 모금을 한다고 들었다"면서 “각계에 고맙다고 전해달라"며 사의를 표시하기도 했다.
북한이 열차 참사 사실을 사고 발생 이틀 만에 전격 발표하고 국제사회의 지원 소식을 자세히 보도하고 있는 것은 분명 과거와 달라진 태도다.
북한의 고위인사들은 ‘내부사정’에 의해 국제사회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숨김없이 털어놓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내부사정’이란 90년대 중반부터 잇따른 자연재해로 인한 식량난, 원자재난, 에너지난을 의미한다. 북한이 자체적으로 룡천참사를 감내하기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때문에 룡천참사를 계기로 국제사회가 보여준 온정의 손길은 북한 지도부에게 북한이 문을 열어 외부세계로 한발짝 더 나아가야 한다는 개혁개방의 체감지수를 높여줬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남한과 미국 등 외부세계의 지원 사실을 감지하고 있는 북한주민들의 심리적 동요도 상당할 것으로 추론된다.

“배는 항구를 떠났다”
북한은 룡천 참사 이후 룡천군에 인접한 신의주시를 중심으로 체제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각 도에 건립된 ‘계급교양관’에 미국과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는 자료를 새로 게시하고 주민들의 참관을 독려하고 있다. 이는 룡천복구 성금과 구호품을 지원하는 미국과 일본 등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버리도록 하는 사상단속 차원이다. 그러나 룡천참사 이후 북한의 달라진 태도가 눈에 띄기도 한다.
5월 4~7일 평양서 열린 제14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남북한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였던 ‘남북 장성급 군사당국자회담’을 북한군부가 막판에 수용한 것도 룡천 지원 기류를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북한은 한반도 군사문제 만큼은 미국과 북한 사이에 해결해야 할 문제라며 남측과 마주앉길 극도로 꺼려왔다. 남북 장성급 군사당국자회담에서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해상의 군사충돌 방지 방안 등이 협의될 것이 확실시되며, 이는 한반도 군사신뢰 구축 문제를 놓고 남북한 군당국이 벌이는 최초의 협의로 남게된다. 남북국방장관회담과 철도.도로연결 실무회담은 경의선 철도와 도로 연결에 국한됐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미국은 룡천참사 성금 접수차 거주지를 이동하겠다며 북한 외교관이 낸 신청을 허용한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박부웅, 조길홍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참사관 2명은 뉴욕을 떠나 로스앤젤레스한인회가 모금한 '룡천 열차참사 성금'을 전달받기 위해 지난 5월 8일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다. 미국은 현재 유엔주재 북한 외교관의 행동범위를 반경 25마일로 제한해 놓고 있다.
이밖에 일본인 납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5월 4~5일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북-일 정부간 접촉에서 국교수립 재개 협상 탐색 등이 본격 조율된 것도 의미 있는 대목이다.
룡천참사를 계기로 북한이 개혁개방의 길로 나갈 것인 가에 대해 북측 매체들은 ‘어림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고 북한도 내부적으로 이를 경계하듯 체제단속을 더욱 강화할 움직임이다. 하지만 북한이 인정하든 그렇지 안든 그들이 서서히 변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지난해 남북한 학자들간 비공개 세미나에서 북한의 한 경제학자가 “배는 항구를 떠났다. 우리도 그 목적지가 어딘지는 아직 모른다”고 한 말은 현재 북한의 상황을 함축적으로 담고있다.

김긔근 민족뉴스국 기자 | three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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