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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속 녀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도로 위를 세 대의 차량이 질주해서 연희동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맨 앞에 윤청이 타고 있었고 뒤를 따르고 있는 두 대의 차량에는 장학출과 남형준, 그리고 임원들이 타고 있었다. 모두들 병원에서 떠난 길이었다.
김하일 비서가 손에 핸드폰을 쥐고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골목이 가까워오자 휴대폰의 덮개를 열고 단축키 하나를 길게 눌렀다. 경비원 박씨의 음성이 요란스레 핸드폰을 울려 나왔다.
“김 비서! 지금 기자들이 엄청 몰려와 있어요! 아까 손 기사랑 김 비서가 부회장님 차를 타고 나갈 때 여기 있던 기자가 눈치를 채고 사방으로 연락했어요!”
김하일 비서가 재빨리 말했다.
“2분 후 도착하십니다.”
경비들이 쩔쩔매며 길을 터놓고 있었다. 세 대의 차들이 차례로 집안으로 들어갔다. 남형준이 먼저 차에서 뛰어내렸다. 뒤따라 장학출과 김한중 이사가 서둘러 차에서 나왔다.
윤청은 두 명의 경비가 팔을 넓게 벌려 막고 서있는 옆을 지나갔다. 장학출과 남형준, 그리고 김한중이 거칠게 기자들을 저지하며 서있었다. 굵은 목소리가 윤청의 등 뒤로 날아들었다.
“윤청 부회장님! 윤청 부회장님!”
그녀는 현관으로 오르는 여섯 개의 층계를 두어 개쯤 남겨 두고 문득 걸음을 멈췄다. 누군가 또 다시 그녀를 불렀다. 뒤이어, 매우 분명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그 자를 쏠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느낌은요?!”
또 다른 음성이 날아왔다.
“그 자가 쏘려고 했을 때 그토록 빨리 반응할 수 있는 방법을 어디서 터득했던 겁니까?”
“정식으로 사격술을 훈련받으신 적이 있습니까? 오한수 회장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계획을 세운 겁니까?”
치밀하게 다져진 뼈아픈 질문 하나가 윤청의 두개골을 향하여 날아왔다.
“물론 정당방위이긴 합니다만 애초 죽일 생각을 하셨던 겁니까?”
기자들, 하고 윤청은 생각했다. 저마다 삶의 소리를 외치고 있구나. 분명한 것은 저들이 뭔가를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순간,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장학출은 꿀꺽 침을 삼켰고, 남형준은 두 주먹을 부르쥔 채 유심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요기롭도록 아름다운 얼굴에 냉기가 서려 있었다. 단 하나 뚜렷하게 표정이라는 것이 보였다. 보아라, 이것이 살인자의 얼굴이다. 곧 이어 섬광이 번쩍거렸다. 남형준이 재빨리 팔을 치켜든 뒤에서 헤아릴 수 없이 셔터가 터졌다. 불과 수초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마침내 그녀는 돌아섰고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겨놓았다. 세상이 온통 소기의 목적이나마 달성했기 때문일까. 어느새 주위는 조용해져 있었다.
그들이 앉아 있는 곳은 어두웠다. 김하일 비서가 어둠 속에 서 있다가 말없이 다가와 시중을 들고는 했다. 회의가 끝나고 있었고 새벽이 오는 모양이었다. 천창을 통하여 여명이 비쳐들고 있었다. 표현하기조차 어려운 감흥을 지닌 채 장학출과 남형준은 여전히 침묵한 채였다. 한밤중에 김 박사의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간 이후, 그녀가 돌아왔기 때문에 이제 겨우 안심이 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심정은 착잡했다. 어떻게 그것을 입 밖에 내어 말인들 할 수 있을까? 나무 밑동어리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친다 한들! 아니면 바람에 대고 말할까? 둘은 가 슴 속으로만 여전히 어금니를 깨물며 옆에 있어도 그리운 그녀에 대해 처절한 느낌이 들고 있는 연모의 정을 몰래 삼켰다.
이응렬 변호사와 박용찬 회장이 김한중 이사와 함께 돌아간 지 반 시간이 넘고 있었다. 잃었던 주 군을 찾은 듯한 표정으로 그들은 일어서 나갔다. 거듭거듭 자상한 위로의 말을 그녀에게 남기고. 마 지못해 자리를 떴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참 얼마나 다행이냐는 듯…….
구경(G)그룹의 적대적 M&A에 관해 말하는 건 시기장조인 듯했다. 현안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짤막 한 보고가 끝났다. 수사선상에 있는 레빈스키에 관해서도 묵계가 이루어졌다. 세 사람 다에게, 거짓 을 조장하기 위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동조해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애꿎은 이율배반이기는 했지만 지 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레빈스키의 예우에 대해 모든 것은 윤청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지 도록 결말을 보았다.
인간에게 늘 존재하게 되는 미해결의 문제가 삶을 연결시키는 고리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장학 출 사장이 보기에 윤청은 이제 의연해졌고 바쁜 일정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듯이 보 였다. 당장에도 그녀는 전화기에 귀를 기울이는 듯이 보였고, 아무래도 병원에서 걸려올 전화 인 듯했다. 거기에 그녀는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결국, 소식이 왔다. 대단히 안타깝고 불행한 소식이.
“아아!”
윤청은 낮게 소리치면서 가슴 속에 쿵, 하고 울림이 이는 듯한 얼굴로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그녀는 핼쑥하게 굳어져 오는 멍한 얼굴로 허공에 눈길을 둔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기어이 다리 하나를 절단해야 한다는 군요…….”

* * *

창틀의 알루미늄 새시에 반사된 빛이 병실 안에 가득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떠서 오로라의 빛 가 운데 드러나고 있는 영상을 응시했다. 태양으로부터의 대전입자(帶電粒子)가 극지의 상공에서나 드러낼 수 있는 빨강, 파랑, 연두, 분홍, 노랑색 등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듯 눈이 부셨다.
간호사가 들어와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가로 다가서며 문득 고개를 돌려 차승조를 바라보 았다. 그는 머리를 저었다. 간호사는 그대로 셔터를 열어 놓은 채 곧 몸을 돌려 차승조의 머리맡 에서 방울져 떨어지고 있는 링겔 병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곧 차트를 집어 몇 자 끄적이고는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는 여전히 있지도 않은 오른쪽 무릎 언저리가 가려운 듯이 느껴졌다. 그는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부터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계속해서 J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카메라. 바로 J가 선물했던. 그 는 예술가였다. 하지만 그는 세종대왕의 귀걸이를 본 적이 없을 터였다. 엄밀히 말하면 귀걸이는 착 용하지 않은 구멍 뚫린 귀였다.
작업 명 인터맥. 단추 하나로 만 이천 장(1억2천만 원)의 지폐에 구멍을 뚫는. 천공단조기를 갖다대 고 작은 점을 찍듯. 어째서 이미 포장된 동일한 박스 위에 그러한 반자동 수작업이 필요한지 미처 알 아차리지도 못한 채였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단지 천공펀치기의 능률적 인 작업형태에 흥미를 느꼈을 뿐이다. 우리나라 포장산업이 여기까지 왔나 했지만 어느 회사에서 제작 된 기계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나중에야 비로소 그 용도를 알아차렸다. 하필이면 딱 한번 어쩌다 급여 로 받은 지폐에서 우연히 동일한 위치에 뚫려 있는 구멍을 발견한 것이다.
갑자기 두 배로 높아진 270만 원의 급여는 두 장의 일백만 원 권 수표와 70만 원이 현금이었다. 그런 데 만 원 권 70장 모두에, 그것도 정확한 위치에 동일한 구멍이 나 있었다. 어쩌다 잘못 건네진 듯 했고, 틀림없이 박희주의 지시 하에 한밤중 은밀했던 인터맥과 관계가 있는 듯했다. 테이핑 작업까 지 끝난 박스가 다시 프레스 기계를 거치는 동안 평면의 구멍은 모두 열두 개였다. 그는 세종대왕 의 귀에 구멍이 뚫려있는 지폐 열두 장을 박스에 올려놓고 나란히 맞춰 보았다. 열두 장 모두 정확히 들어맞았다. 박스의 구멍 난 부분은 말할 필요조차 없이 세종 대왕의 귀였다!
육십억 원, 혹은 백이십억 원의 지폐에 실려 있는 세종대왕의 귀에 구멍을 뚫는 데 소모된 시간 은 5분에서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분명히 돈의 흐름을 파악하려는 목적에서인 듯했다. 그는 매우 입맛이 썼고, 왜 필요한 일인지 생각해 보고 싶지도 않았다. 뒤로 어떤 이득이 있는지 알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단지 지저분한 일의 일종임을 알 수 있었고 머잖아 떠날 생각이었다. 그 러면서도 하다 말다하는 일이어서 단순히 기업 차원의 어쩔 수 없는 과정이려니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고발을 목적으로 했던 일이 아닌 것이다. 쥐가 하품하는 걸 포착하면 걸작품이 되리라던, 희귀종이면 모두 카메라에 담고 싶어 했던 J의 생리에 조금은 물들어 있었던 지도 모른다. 그를 존경했고, 그의 예술성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가 서너 장의 사진을 티셔츠 앞가슴에, 필름은 무심결에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사진관을 나왔을 때 그들은 이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것을 그는 이내 알아차렸다. 그는 그들의 유인을 모른 척 따라갔다. 자신의 힘을 과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목적한 바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최초로 그가 내동댕이쳐진 곳은 사람의 발길이 거의 없는 도로 건너쪽 공사장에서였다. 차라리 그 러기 전에 사진과 필름을 모두 달라고 말했던들!
박희주, 한 때는 박성철로 통했던 그는 팔짱을 낀 채였다. 다섯 장의 사진은 이미 그의 손에 들어 가 있었다. 각도에서, 음영에서, 색체에서 J가 아끼고 싶어 하는 다른 것들은 이미 찢긴 채였다.
“필름은 어디다 뒀어? 응? 필름을 어디다 뒀는지 말해?”
다음 순간, 그는 턱짓을 했고 무자비한 각목 세례가 이어졌다. 인터맥의 작업동안 악마의 웃음이 간혹 가다 그의 입가에 맴돌곤 했던 그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였다. 모두 네 명이었고 손 에는 못이 튀어 나온 듯한 각목을 쥐고 있었다. 그들은 설마하니 차승조의 바지 뒷주머니가 그들 죄악의 저장창고인 것은 모른 채였다. 가장 눈에 잘 뜨이는 곳이 가장 은밀한 곳이라고 애드가 앨런 포가 말했던가? 사람들은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을 찾으려고 언제나 더 멀리 갈 생각만 하는 거라고. 그는 또 다시 치명적인 일격이 가해졌을 때 비로소 필름의 용도가 되살아나는 듯 이 느껴졌다. 엄청난 타력이 가해질 때마다 그는 필름이 아주 망가져 못쓰게 되지 않기만을 바 랐다. 처음으로 아주 간절히 바랐다…….
여전히 알루미늄 새시의 백납 같은 반사가 맹렬히 눈 속을 파고들었다. 그는 슬며시 몸을 돌려 허 공을 응시했다. 도대체 윤리라고는 손톱 끝만치도 모르는 녀석들이었다. 처음에는 눈동자였다 던가, 오른쪽 눈에 새로 심어주는 동공. 글자 그대로 비어 있는 눈동자. 상징적으로 너무 부도 덕한 듯해서 말이지. 감히 세종대왕을 애꾸로 만들 수야 있나.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그 일은 어쨌거나 수작업이 필요했다. 당연히 극비리의 역사(役事)에도 사람이 필요하기 마련 이다. 믿을 만한 사람이. 믿을 만한 단 한 명의 직원이 묵묵히 그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누 구도 믿기는 어려운 세상인 걸 저들도 알고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중삼중으로 그들은 시 험이 필요했던 것이고. 자신이 차출된 것은 공교로웠다. 말수가 적다는 것. 그리고 타인의 비리를 폭 로하는 일을 지저분하게 여기는 결벽성 등. 추문 폭로작전의 비루함 때문에 비리 폭로 따위는 꿈도 꾸지 않으리라는 정신자세의 투철함 등이 그가 뽑힌 숙명적 이유인 셈이었다.
바로 그것이 신뢰받는 인간에게 내려진 일차의 재앙이었다. 과묵하고 믿을 만 하다고 지목된다는 바 로 그 자체가 불행의 시초였다. 아마도 그토록 적성 파악이 정확했던 이유는 박성철에서 완전히 돌아 선 박희주, 그 범죄형 인간의 예리한 관찰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꽤 면밀히 저울질해 본 모 양이었다. 시험이 치러지고 있는 동안에는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의아스러울 정도의 후한 급여를 그가 놀라워하며 의심을 품기 시작했으면서도 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진 아무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 다. 아마 죽을 때까지 자신은 그것에 대한 자책으로 시달릴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훈련을 쌓게 될 것이다.
그는 슬며시 시트 안에 손을 넣어 오른쪽 넙적다리를 만져보았다.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자 손끝에 다아지는 건 무(無)였다. 뚝 떨어져 내리는 기분 나쁜 공간이 다였다.
“내 다리……, 어디다 두셨습니까, 박사님.”
마취에서 깨어나 처음 김성진 박사를 바라보며 물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김성진 박사는 태연스 레 말했다.
“썩은 조직을 모두 잘라내고 깨끗이 씻어서 냉동실에 넣어 뒀네. 지금쯤 알맞게 얼어가고 있을 걸세. 보고 싶어도 좀 참게. 언젠가 재회를 하는 날이 올 테니까.”
수술 전, 김성진 박사는 환자의 동의를 얻기 위해 유독 윤청 대명그룹 부회장의 지시라는 말을 힘 주어 말했었다. 지금으로선 절단을 하는 것이 목숨을 건지기 위한 최선의 치료방법이다. 신경파괴제 로 고통을 줄일 수는 있지만 애석하게도 조직이 썩어 들어가는 것은 막을 길이 없다. 우선 절단을 하는 거다. 말하면서 김성진 박사는 빙그레 웃었고 자신도 빙그레 웃음이라는 걸 얼굴에 떠올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썼던 기억이 났다. 그때부터 토해내지 못했던 한숨을 그는 우-, 하고 토해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속에 또다시 J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회가 정말 문제야. 엉망이라구. 이런 사진 5백 장이 모이면 기필코 한 권의 화집으로 내놓을 거야. 사회고발의 차원에서라고 해도 좋겠지. 모두들 경각심 을 갖기는 할 테니까. 그는 얼굴 전체가 일정한 크기의 파편들에 의해 맞추어진 것처럼 보였다. 점 차 균열이 사라졌다. 그는 인간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모자이크가 아니었다. 그리고 말하고 있었 다. 상대의 비리를 폭로하는 것은 지저분한 짓이야. J는 분명 진리를 말하고 있었다. 직접 자백을 받는 거야…….
J. 또 하나의 분신. 오랜 세월 간직해 온 영혼의 시뮬레이션. 그런데 나는 이제 찢기고 해체되지 않았는가? J. 왜 내게 이런 재앙을 안겨 주었지?

* * *

장학출은 조금도 거북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회의실 안의 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윤청 부회장에게 오늘 회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렸고 되도록 참석해 주기 바란다는 간곡한 전갈을 김하일 비서에 게 남겼다. 그리고 김하일 비서는 꼭 전하겠다고 했고. 그런데 방금 김하일 비서로부터 그녀가 병 원에 와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부회장님께서 못 나오시나 봅니다. 지금 병원에 계시다고 하는데 말예요……. 그냥 회의를 시작 하지요?”
“그러지요. 환자가 다리 절단 수술까지 받았다는데 부회장님 심경이 지금 오죽 하시겠어요? 제발 기자들이나 눈치를 채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말한 사람은 장학출 사장이 아니고 이응렬 변호사였다. 그는 오늘 특별히 법률고문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구경(G)그룹의 의무공개매수 규정과 주식 대량보유보고 의무규정(5%룰)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할 것을 결의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따라 이미 매집한 주식의 매각명령 및 공개매수 중지 조치를 취하도록 법원에 지분매입 가처분 신청을 제출키로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응렬 변호사는 낮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생각에는 이런 특별한 날에는 부회장님을 나오시게 할 게 아니라 임원들이 전에 오 회장님 생존해 계실 때처럼 연희동으로 가는 게 훨씬 나을 듯싶었는데…….”
신기훈이 보유하고 있던 주식 지분의 처리도 시급했고 어쨌든 지금은 구경(G)그룹과의 정면대결이 시작되고 있는 마당이었다. 그리고 대명그룹에서 법적인 대응책이 우선해야 하는 이유는 시간을 얻기 위해서였다. 신기훈의 체포로 일게 된 대내외적인 동요와 윤청 부회장의 충격, 사내의 이상 기류 등이 점차 가라앉을 때까지의 기간.
이응렬 변호사가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하여간 지금으로서는 소수 주주들의 동요를 막는 게 시급한 일이에요. 이번에 구경(G)그룹에선 아주 비열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기어이 목적달성을 하려고 들 게 뻔한데 말예요.”
어차피 구경(G)그룹의 목적은 백일하에 드러난 바가 있었다. 직접적인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라이 벌사에 대한 적대적 감정으로 대명그룹을 인수한 다음 가닥가닥 찢어 이보다 높은 가격으로 원하는 인수자에게 넘김으로써 차익을 남기려는 계획이 아주 극명하게.
“현 상황이 어지럽다고 해서 그것을 기회로 이쪽의 딴딴한 기업행태를 고려하지 않고 인수합병 전 략을 추진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란 것을 알려주도록 해야 해요.”
박용찬 회장이 걸걸한 음성으로 말했다. 장학출 사장은 생각에 잠긴 채 묵묵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문득, 프랑켄쉰타인 박사의 전철을 밟는 위험에 대해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적대적 M&A는 한 괴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과 같다. 즉 괴물에 생명을 불어넣어 깨우긴 했지만 오히려 그 괴물에게 목숨을 잃고 마는 것이다.’
갑자기 그는 딱 자르듯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칼자루를 바꾸어 쥐도록 모색해 봐야 해요. 우리가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번 기회에 구경(G)그룹이 경을 치게 하는 방법을 기필코 찾아내야지요.”
“틀림없이 이번에 법원의 매각명령이 떨어져도 구경에서는 그것을 이행한 후 다시 공개매수를 실 시하려고 들 겁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더욱 대주주간의 내분을 부추기려 들 테고. 하여간 주 주들 동향도 동향이려니와 하루 속히 신기훈 검거에 관한 설명과 함께 향후 대책에 대해 솔직히 피력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은데, 윤청 부회장님의 직접적인 설명은 필연적이거든요…….”
이응렬 변호사가 여전히 근심이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모두들 얼른 입을 열지 못했다. 나서기만 하면 100%의 효력이 발생하는 윤청 부회장의 등장, 또는 출현이 본인의 거부로 인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모두들 아는 탓이었다.

* * *

구경(G)그룹의 박희남 회장 앞으로 주식 대량보유보고 의무규정(5%룰) 위반에 관한 대명그룹의 고발 로 통지서가 배달된 것은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고소 요건에 따른 통보서라면 화급을 다투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조금 전 참으로 얼토당토않게 청천벽력에 가까운 소식이 박희남 회장실로 날아든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박희남 회장의 고성에는 쇳소리가 섞여들었다. 가뜩이나 더 이상 위축될 수 없을 정도로 입지가 졸아 들고 있던 박희주의 표정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김준희를 저주했다. 어제까지도 김준희는 엄연히 자 신의 심복이었다. 아직 말단이었고 서열로 치면 회장에게 직접 보고를 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그런데 직접 보고를 한 것이고, 그 자체부터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차라리 진작 알렸다면 회장은 다른 대책을 강구했을 것이다. 어쩌면 대명그룹을 인수 합병하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품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내 말 안 들리냐? 녀석이 살아서 그 여자의 보호를 받고 있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구?!”
“예……, 그게, 실은…….”
그러잖아도 놈은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거라는 얘기를 다섯 번도 넘게 했었다. 마지막 처치과정에서 옆을 지나는 두 명의 행인이 없었다면 필름을 찾지 못했더라도 깨끗이 처리될 수 있었다는 변명은 이제 시효를 넘긴 마당이었다. 차승조의 본가를 찾아낸 것도 불과 몇 시간이 늦은 후였다.
김준희는 약삭빠른 녀석이었다. 녀석은 차승조의 집을 알아냈을 뿐 아니라 반죽음이 다 되어 집에 도착해서 자리보전하고 누워 있다가 이틀 후 한밤중에 집을 떠났다는 것조차 알아냈다. 녀석을 싣고 나갔던 검은색 그랜저의 차번호를 기억한 사람은 민박을 하고 있는 옆집 남자였다. 그는 자신의 집에 민박을 하게 된 손님의 차가 아닌가 했다. 그래서 적어 놓았고 한밤중에 화장실 창문 너머로 녀석이 차에 실려 나가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던 것이다.
“대명그룹 남형준 부사장 차를 윤청 부회장이 운전해서…….”
거기까지 듣고 나자 박희남 회장은 차라리 조용해졌다. 녀석의 집에서 녀석을 싣고 나간 차를 대명그룹 총수나 다름없는 윤청이라는 여자가 운전하고 있었다니, 진정으로 귀신이 곡을 할 노 릇이었다. 아니, 귀신이 곡을 하는 건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건 그 수천 배의 어처구니없는 일 이 아닌가? 하필이면, 하필이면! 백 번을 되뇌어도 그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의 하필이면 이라는 것이 여전히 눈앞에 넘치고 있는 것이다.
애초부터 지저분한 일에는 사촌형제가 철통 같이 뭉쳐있던 공모자들이었다. 겨우 정신이 들자 박희남 회장은 음성을 낮춰 물었다.
“놈이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알아봤어?”
“네……. 알아봤습니다.”
박희주의 눈치만으로도 박 회장은 이미 눈을 감았다.
“오한수 회장 친구인 김성진 박사에게 연락이 갔던 모양입니다. 목숨을 건지긴 했는데 다리 하 나를 못 쓰게 됐나 봅니다.”
“그러니까, 결국…….”
박 회장이 스스로 바보 같은 질문을 멈추며 욱, 했다. 어차피 모자이크 하나가 정교하게 빈 자리를 메우고 있는 중이었다. 대명그룹의 행방불명이던 윤청 부회장이 이른 새벽에 귀가를 했고, 틀림없이 병원에서 오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는 윤청이라는 여자에 대해 들을 만큼 들어온 터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오한수 회장의 원수인 암살범을 현장에서 총으로 쏘아 얼굴 한복판에 구멍을 뚫어놓은 여자가 아닌가?
“우선은 차승조야. 놈이 퇴원을 해서는 안돼.”
박희남 회장은 조용히 말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칼날 같은 눈길을 그대로 허공에 묻어둔 채 그는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박희주는 그가 자신을 스쳐갈 때쯤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순간, 사촌형제의 밀실회의가 이것으로 종지부를 찍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박 희주의 뇌리를 스쳤다. 사촌형의 눈초리에서 분명히 그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보통의 것으로 는, 사극에서나 거론되는 ‘수급’을 가져다 바치기 전에는 남아 있는 차승조의 다리 하나를 마저 가져온다 해도 결코 만회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는 세종대왕의 귀에 구멍을 뚫어놓고 귀걸이는 전혀 엉뚱한 귀에 걸어 놓았던 사람이었다. 조 용히, 단 한 번의 전화로 두고두고 노예가 되어버린 고매하신 정치가는 박희주가 알기에 세 사람 이었다. 형이 전화를 걸고 있을 때도 그는 바로 옆에 있었다.
사촌형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이런 전화를 걸게 되서 유감입니다만, 지난 번 제게서 받아간 돈은 민생 돌보는 데 쓰라고 했 지 살롱 아가씨 낙태수술 하라고 줬던 건 아니질 않습니까?”
그런 전화를 받았던 다른 두 사람은 정치고 나발이고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그들은 차라리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했다. 협박의 수위가 너무 높았던 것이다. 아들 혼사비용이 꽤 많이 들었더구 만요. 그거 눈먼 돈인 줄 알았지요? 우리가 뼈 빠지게 벌었던 돈입니다요. 그래서 우리도 감시 할 권리 정도는 있는 겁니다요.
그것으로 족했다. 일이 술술 풀렸다. 막힘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더 이상 주기적으로 갖다 바칠 필요조차 없었고, 쉰 배도 넘게 본전을 찾았다. 상대는 정계를 은퇴하고 싶어도 할 수없었다. 형은 끄나풀이 필요했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야만 쓸모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징검다리가 놓여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제 박희남 킹덤의 존재 가치가 하찮은 녀석 하나 때문에 눈앞에 돌풍이 몰아닥치고 있는 것이다. 온통 붕괴의 조짐을 불러 일으키며 온갖 것을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말듯이.
‘음……. 빌어먹을 녀석 하나 때문에 이대로 망해갈 수야 없지.’
박희주는 어금니를 사려 물고는 물끄러미 허공을 바라보았다.

* * *

뜻밖의,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일이었다. 다름 아닌, 바로 돌연한 사태로 그 일은 비롯되었다. 거의 어처구니는 한순간에…….
윤청은 오후 세 시경 서울대 부속병원에 도착했다. 김하일 비서와 두 경호원의 기상천외한 방법이 그녀가 연희동을 빠져나오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임원 전용의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운 윤청은 두 명의 경호원이 따라붙는 것을 저지하지도 못한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녀가 원치 않더라도 두 경호원은 장학출 사장의 지상명령을 받들고 있었다.
윤청은 다섯 시 정각에 김기섭 원장과 함께 김성진 박사의 방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고 엘리베이 터에서 내렸을 때 금방 복도 끝에 있는 의자에 김기섭 원장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맥 빠진 초췌한 모습이었다. 고뇌의 빛이 서린 얼굴로 물끄러미 허공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후배가 다리를 절단한 터에 그가 고뇌에 잠겨 넋을 놓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조용하고 잘 정돈된 모습이었고 윤청이 다가가자 얼른 고개를 들었다.
“아! 오셨군요.”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윤청을 향해 말했다.
“지금 김 박사님은 안에 안 계십니다. 응급환자가 생겨 방금 중환자실로 가셨거든요. 부회장님 오시면 승조가 입원해 있는 병실로 먼저 가 계시라고 하시더군요. 승조한테 좀 가보시겠습니까?”
윤청은 억지로 자신을 향해 밝게 말하고 있는 그를 보면서 가슴이 시려오는 것을 느끼고는 얼른 흔쾌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죠. 저도 승조씨가 보고 싶으니까요. 승조씨 어머니도 함께 계시겠지요?”
“아뇨. 아침 일찍 승헌일 데리고 잠깐 시골에 다니러 가셨습니다. 뭘 좀 가져오실 게 있다고.”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김 원장님이 수고가 많으시군요. 듣자니까 죽 병원에만 게셨다고 하던데, 검도장은 어쩌시구요?”
김 원장은 얼른 손을 들어 휘저으며 밝게 말했다.
“사범들이 여섯 명이나 되니까 검도장은 괜찮습니다. 그보다 승조가 용기를 잃을까봐 걱정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나 회복이 빠른지 김 박사님도 놀라고 계 시니까요.”
차승조가 입원해 있는 병실은 대명그룹 임원들의 정기검진 등으로 자주 이용하는 특실이었다. 김기 섭 원장이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고 경호원들은 문 밖에서 걸음을 멈췄다. 윤청이 입구의 작은 거실을 거쳐 한 걸음 막 안쪽으로 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갑자기 쿵, 하고 뭔가 도어에 부딪치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도 뒤를 따르고 있던 경호원 한 명이 어느새 윤청을 앞질러 병실의 도어를 열다가 그만 실수로 손에 들고 있던 무전기를 떨어뜨린 것이었다.
순박하기 짝이 없는 젊은 경호원은 황급히 바닥에 떨어진 무전기를 집어 들고는 훌쩍 뒤로 물러 섰다. 장학출 사장으로부터 첨예하게 훈련을 받은 그의 보호본능이 저지른 실수였다.
“아, 죄송합니다…….”
윤청은 가늘게 눈살을 찌푸리며 무심결에 차승조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바로 그때였다. 순간 자 신도 모르게 날아오는 칼날 같은 눈초리에 윤청은 멈칫했다. 마치 전광석화 같았다. 윤청은 놀라 그를 주시했다. 거의 불가사의에 가까운 느낌이 삽시에 가슴에 들어찼다.
순간, 전율 비슷한 것이 그녀의 뇌리를 훑고 지나갔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섬뜩하도록 광채가 이는 눈빛! 그것은 오한수 회장의 것과 너무나 흡사했다. 너무나 흡사하게 오한수 회장의 눈빛을 그대로 닮고 있었다. 아니, 차갑고 더 정교해 보였다. 심취하며 더 없이 깊게 사물을 헤아려 보는 그의 눈은 언뜻 현재의 상황에 대해 분노보다는 원인파악에 더 주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주 차분히, 그리고 조용하게. 다음 순간 윤청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리고 점차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기개가 전천후의 불가사의를 지니고 있다 한들 결코 오한수 회장에 버금갈 수는 없는, 어쨌거나 그는 너무 젊었고 너무 여렸다.
“부회장님…….”
윤청의 귓가에서 독심술마저 작용하고 있는 듯한 김기섭 원장의 음성이 들렸다. 그녀는 돌아다 보았다. 그는 눈으로만 말하고 있었다. 승조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기억해 달라고. 침묵이 세 사람 사이를 누비는 동안 이미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했다. 김 원장은 차승조를 보고 있었 지만 시계 안에 그녀를 담고 있었고 경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 때 윤청의 등 뒤에서 방금 전 차승조가 보고 있었던 듯한 텔레비전으로부터 앵커의 음성이 들려 왔다. 무심결에 다시 차승조를 향해 시선을 옮기던 윤청은 갑자기 그의 얼굴이 차게 굳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시선이 텔레비전 화면을 향해 날아갔고 그녀의 귀에도 좀더 또렷 이 앵커의 음성이 들렸다.
“……구경(G)그룹의 적대적 M&A에 대한 대명그룹의 대응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하겠습니다.”
김기섭 원장이 한 걸음 껑충 앞으로 나서고 있었고 거의 들릴락 말락 볼륨이 낮았던 텔레비전의 리 모콘을 향해 팔을 뻗었다. 윤청은 그때서야 김기섭 원장에게는 구경(G)그룹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말 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냈다. 구경(G)그룹 임원들의 얼굴이 한데 섞여 텔레비전 화면을 메우고 있 었다.
윤청은 고갯짓으로만 텔레비전을 가리키며 말했다.
“차승조 씨를 이렇게 만든 게 바로 저 사람들 아닌가요?”
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김성진 박사가 안으로 들어 왔다.
세 사람 사이에 아직은 의학사상 그 유례가 없는 최초의 토의는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김성진 박사 와 윤청, 그리고 김기섭 원장은 바로 김 박사의 진료실 옆방에서 두 시간 가까이 머리를 맞대고 있 었다. 오한수 회장의 가장 절친했던 친구 김성진 박사는 놀라운 제2의 천우신조가 윤곽을 드러내는 순간에 웃으며 600만 불의 사나이를 거론하고 있었다.
“제가 왜 차승조 씨의 절단한 다리를 보관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내 오랜 꿈이기도 하지만, 윤 부 회장의 그 굽힐 줄 모르는 개척의지에 힘입은 탓일 거예요. 내가 오랫동안 연구해 온 분야를 어떻게 아셨는지 대뜸 차승조 씨가 다리를 절단하더라도 보관해 줄 수 없겠느냐고 묻지 않으시겠어요? 그리고 지금 김 원장이 말씀하신 대체의학도 그렇고……. 대체의학. 다른 의사들은 뭐라고 할지 모르지만 절대로 도외시할 수 없어요. 의학 분야에서 아직 정복하지 못한 부분은 많으니까 그걸 접목시켜 할 수만 있으면 다각도로 시도해보는 것도 결코 나쁘진 않아요. 윤청 부회장 능력도 있으니까 아마 잘 될 거예요! 까짓것 우리라고 600만 불의 사나인들 못 만들겠습니까?”
그의 말 속에서 시간관계상 언뜻 발설을 삼가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걸 김 원장과 윤청은 동시에 느 꼈다. 그와 함께 윤청의 얼굴에 번개처럼 스쳐가는 표정이 있었다. 그녀는 타는 듯한 눈길로 김성진 박사를 바라보았다. 600만 불의 사나이? 그렇다…….
어찌 보면 김성진 박사의 오랜 숙원이 마침내 그 시발을 다지는 첫 순간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차승조 가 엄연히 그 빌미를 제공한 셈이고. 그리고 반드시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김성진 박사의 한 마디로도 입증되었다.
“실은 내가 사재를 털어서라도 연구해 보고 싶었던 분야인데 윤 부회장이 그토록 적극적으로 나서니 꿈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성공 확률 1퍼센트라도 시도해봐야 한다는 윤청의 말은 그에게 엄청난 힘을 불어넣고 있는 듯했다. 그 는 확신이 일고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내 제자들 중에 언젠가 함께 모색해 보자며 뜻을 모은 박사들이 다섯 명이나 있어요. 그러니 팀 구 성이야 곧 끝날 거고, 내 생각에는 연구실은 인천에 있는 서의개발 공동부지에 새로 마련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지난 번 제가 한번 가봤잖아요. 내가 욕심이 난다고 했던 말 기억나세요?”
윤청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농담이신 줄 알았어요. 거긴 의학 분야의 연구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알았거든요.”
“그래서 보안이 더 잘 유지될지도 모르잖아요. 옆에 아주 널찍한 스페이스가 남아 있는 곳이 있던데 수술실을 비롯해서 회복실과 물리치료실을 함께 설치하면 이상적일 것 같단 말예요.”
“어머나! 그게 가능한가요?”
“물론이죠! 거기라면 경비 절감에도 크게 도움이 될 테고.”
김성진 박사는 그답지 않게 곁눈질로 슬쩍 웃고 나서 덧붙였다.
“기업을 하던 내 친구 오 회장과 오랜 세월 가깝게 지냈더니만 나도 반은 사업가가 된 모양 아닌가요? 인류의 복지를 위하는 마음에 앞서 대명그룹 사업성까지 염두에 두게 됐으니 말예요.”
윤청은 어이없어 하다가 오랫만에 소리내어 깔깔 웃었다.

* * *

불과 일주일 동안에 일반인의 한 달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일이 처리되자 장학출은 실로 어 이없는 기분이었다. 검찰과 경찰, 그리고 안기부까지 동원된 합동수사반이 철수한 것은 윤청의 진 술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무엇보다 특기할 만한 것은 합동수사대의 연희동 방문조사에서 보인 윤청 의 만만치 않은 응수였다.
워싱턴에서 한필순 씨 등이 도착할 때까지 진술을 유보해 왔던 윤청은 침착하게 자신의 입장을 피력한 바가 있었고 수사관들은 결국, 그녀를 이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수사반장 이원호의 질문은 송곳보다 더 날카로웠다.
“레빈스키는 장 사장님에 의해 고용되어 있었는데, 왜 세르게이를 막아야 하는 시간에 신기훈 씨와 다투고 있었던 거지요?”
윤청은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다투고 있었던 것이 아니란 건 아시잖아요? 미스터 레빈스키는 순간적으로 위기에 쳐해 있었던 것이고 그러면서도 세르게이의 배후를 확인하기 위해 덫을 놓고 있었던 거예요. 제게는 세르게이가 곧 급 습해 올 거라는 것을 알린 직후 아파트를 떠났으니까요.”
“그럼 윤 부회장께선 세르게이가 곧 나타날 거다, 그럼 쏴야지 하면서 기다리고 계셨단 말인가요?”
윤청은 언뜻 눈살을 찌푸렸지만 의연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유도신문에 말려들 수는 없다는 듯한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변명을 할 생각은 없지만 진실을 말하라면 하겠어요. 제가 세르게이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일념이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아녜요. 미스터 레빈스키와 의논을 했는데 더 큰 적 이 누군가 알고 싶었을 뿐이고 미스터 레빈스키가 그를 저지하리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세르게이 는 우리 둘을 숨어서 보고 있었던 거예요.”
“세르게이에게 당할 뻔했다는 얘깁니까? 장학출 사장님이 미스터 레빈스키를 채용했는데도 레빈스 키는 더 큰 적을 유인하려는 생각으로, 그러니까 윤청 씨를 보호하기는커녕 위험에 노출시킨 채 따로 떨어져 나가 있었다 그런 얘기가 아닌가요?”
그녀는 단호한 표정으로 얼굴을 젓고는 말했다.
“미스터 레빈스키는 할 만큼 한 거예요. 위장이긴 했지만 내가 미스터 레빈스키를 쏘았기 때문에 세르게이는 내가 당한 것으로 알고 물러나리라 생각했죠. 나를 두 번씩 죽일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요.”
“미스터 레빈스키나 윤청 씨께서는 착각을 하신 거란 얘기지요?”
또 다른 유도심문의 원형이다. 윤청은 머리를 저었다.
“상황을 다시 설명하고 싶진 않아요. 어쨌든 저는 살아 있잖아요? 그대로 서서 그 자에게 당할 수는 없었고 그래서 쐈을 뿐예요.”
마치 서바이벌 게임을 하듯 질의문답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응렬 변호사가 그녀를 저지하고 나섰다.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장학출은 모골이 송연한 느낌으로 이응렬 변호사와 윤청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로라하는 여성들은 미국에서도 많이 보아온 터였다. 그는 제반 조건에 부합되어 활동하는 여성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편은 아니지만 무조건적인 여권신장이나 우대는 혐오스러웠다. 절대적인 검증을 거친 여성이 아닌, 정치가들의 표밭에나 적용되는 그런 부류의 여성이 더 많이 사회를 떠도는 것도 문제인 셈이었다. 바로 그것이 망국병의 일종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도 그는 절감했던 적이 있었다. 그들의 취약점이 힘의 논리에 있다고 평가한 나머지 소아병적인 고집에만 의존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 실소를 머금었던 적도 몇 번인가 있기는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는 마음이 홀가분해져 있었고 그녀에 대한 신뢰감이 신앙의 경지에까지 이르고 있는 자신에 대해 더 이상 불만을 품지 않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도 남자인 터여서 기분이 늘 맑지만은 않으리라는 것을 스스로 감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쨌든 자신은…… 남자니까.

* * *

손 여인이 전에 이종국이 거쳐하던 뒤채에 들어와 살기로 결정된 이후 가장 반색을 한 사람은 충주댁이었다.
“들어가 보세요. 어차피 들어와 사실 텐데 그러고 서계시면 어떡해요?”
충주댁은 일부러 짓궂게 말했다. 원래 온순한 성품에 집안에 식구가 늘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즐거운 얼굴이었다. 사람 사는 집에 사람이 꾀야 한다는 것이 늘 충주댁이 푸념처럼 해오던 말이었다.
“네, 네…….”
손 여인은 쩔쩔매며 몸 둘 바를 모르는 듯 방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녀가 살던 시골집에 비하면 천국에 버금갈 만한 곳이었다.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현실이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바람에 그녀는 거의 말을 잃은 채였다. 충주댁의 독촉은 성화같았다.
“아, 왜 그러구 서계세요? 좀 있다 사모님이 나와 보시고 섭섭해 하시면 어쩌시려구요.”
아무래도 자신의 할 일은 손 여인이 마음의 부담을 덜 느끼도록 너스레를 떨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대저택 깊숙이 자리 잡은 이런 곳에 들어와 살라니 누군들 그러지 않겠는가? 충주댁은 좀 떨어진 곳에서 얼굴을 붉히며 목덜미를 쓸어대고 있는 소년을 향했다. 학생도 어서 안으로 들어가 봐요. 공부방이 아주 마음에 들 거예요. 어제는 하루 왼종일 침구를 내어다 일광소독까지 다 끝마쳤는데 사모님이 얼마나 신경을 쓰셨는지 모를 거예요. 이젠 내 집이다 하고 사셔야지, 안 그러면 도리가 아닌 거예요. 그녀는 흥겨운 듯 계속 말했다.
“우리 사모님 자상하신 거, 아무도 못 따라가요. 공연히 마음 어지럽혀 드리면 안 된다구요.”
윤청은 이층 창가에 선 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충주댁이 손 여인과 손 여인 막내아들과의 상견례에서 매우 자상한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는 듯했다. 윤청은 미소하면서 햇살이 손 여인의 흰 옷에 바스라질 듯 쏟아져 내리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맑게 갠 손 여인의 표정을 보며 가슴에 잔잔하게 물결쳐 오는 즐거움이 느껴졌다. 기연이랄까, 생각해 보니 맨 처음 손 여인에게서 느꼈던 감정도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던지, 누군가가 꼭 마련해 놓은 것처럼…….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외로움에 잠겨 있는지 비로소 느껴졌다. 메마른 풍토에서 암혹과 독거에 자신이 얼마나 바스러질 듯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지도. 표현할 때도 없었다. 그러다 비로소 알아차린 것이다. 혼자서는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이라는 것을.
‘그이가 나를 그 곳에 인도했던 것은 아닐까?’
아무래도 그런 것만 같았다. 무턱대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그 필연성이야 말로! 그리고 이제 와서는 돌아올 수 있었던 다행함도 모두 인위적인 우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이제 함께 살아가야 할 가족이 생기지 않았는가?
등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언닌 그래, 전엔 알지도 못했다면서 함께 살 생각을 한 거야?”
아침나절부터 민정애와 함께 달려 들어온 난이는 겨우 현 상황에 대한 염탐이 끝난 듯했다.

* * *

“어제 여러분들이 내놓았던 안에 대해 들었는데, 이 시점에서 우리가 새로운 안을 들고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자는 건 무엇으로 보나 기발한 아이디어인 것이 틀림없어요.”
장학출 사장이 제시했던 ‘새로운 장난질’에 대한 박용찬 회장의 의견이었다.
“뒤통수를 누가 갈겨도 앞으로만 뛰자는 식으로 가면 뒤통수 맞는 게 속도를 더하는 순풍작용을 할 테니까. 줄다리기에서 팽팽하게 잡아당긴 줄을 이쪽에서 얼른 놓아주면 엉덩방아는 저쪽에서 찧게 될 거고 말이지. 처음에는 저것들이 미쳤나 할지도 모르지만 차차 알게 될 것 아니겠어요?”
모두 웃었다. 이제 여유마저 생긴 것이다. 잠시 막간을 이용해서 나누는 대화였다.
드디어 회의실의 도어가 열리고 윤청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윤청을 주축으로 연희동에서 열리는 첫 회의였고 오후 늦게 긴급소집으로 이루어졌다. 윤청이 자리에 앉자 방금 일어섰던 임원들 모두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회의실에 모인 임원들은 아홉 명이었다. 세 사람은 오늘의 일정이 바뀐 데 대해 비서들에게 사방으로 전화를 하도록 했고 두 사람은 지방으로 내려가던 고속도로에서 차를 돌려 서울로 급히 되돌아온 길이었다.
어차피 긴급상황에 버금가는 일이 생긴 건 사실이었다. 눈앞에 전개되기 시작한 상황도 상황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침에 구경(G)그룹의 신문광고가 국내 유수 일간지에 모두 실렸고 정오가 되면서부터 선전포고의 첫 일발이 대명그룹을 겨냥하고 날아든 것이었다. 갑자기 강도를 높인 듯한, 오만방자하기 짝 없는 그 일발은 도전장이나 마찬가지인 통보와 버금했다. 유례가 전혀 없는 최루탄 투하 작전이나 다름없었다. 구경(G)그룹의 임원비서실에서 대명그룹의 임원비서실로, 구경의 기조실에서 대명의 기조실로. 임원실, 기조실, 그리고 홍보담당 이사에게 20분 간격으로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우리 협상을 합시다. 불필요한 신경전을 버리고 투항하는 의미로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면 그 쪽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수락할 용의는 있소.”
요지는 그랬다. 경영권 인수 절차부터 순서를 밟았으면 한다는.
윤청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구경(G)그룹에 대해서는, 자기들의 일방적인 판정으로 M&A 시장에 매물로 내놓은 적도 없는 대명그룹에 대해 명예를 짓밟고 나오는 처사에 관해 우선 법적으로 대응을 해야겠지만 그런 건 나중 문제예요. 실은 오늘 여러분과 상의하고 싶은 건 좀 다른 거예요.”
임원들의 다소 의아스러워 하는 표정은 아랑곳없이 윤청은 김하일 비서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김하일 비서는 문 가까이 서있다가 얼른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김하일 비서가 나간 사이에 윤청이 말을 이었다.
“그동안 여러분들도 조금은 알고 계셨겠지만 인천에 본사를 두고 있는 서의개발에서 이번에 새로 선을 보이기로 한 것이 있어요.”
윤청이 말하고 있는 동안 김하일 비서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등 뒤로 대명그룹 계열사이면서 윤청이 직접 거느리고 있는 서의개발 김경자 실장이 따르고 있었다. 임원들 모두에게 그녀는 낯선 얼굴이었다. 김하일 비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는 매우 민첩하고 순발력이 엿보이는 태도로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
“서의개발 김경자 실장입니다.”
회의실 안의 누구도 입을 열 겨를이 없이 그녀는 곧 브리핑에 들어갔다. - 계속 -

글 김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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