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운시프트 족
바쁜 건 싫어, 인간답게 살고 싶다
이것 역시 웰빙(well-being), 잘 먹고 잘 살기의 일환일까?
몸과 마음의 건강 찾기가 지난 한 해 동안 전국을 뜨겁게 달구는가 싶더니 올해는 연초부터
다운시프트(downshift) 족이 새롭게 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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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신도림역 구내의 출근하는 시민들. 바쁜 현대인의 하루는 출근 전쟁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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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시프트족이란? 사전적인 의미를 따지자면 ‘저속 기어로 바꾼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돈도 싫고,
높은 사회적 지위도 싫다는 사람들. 한도 끝도 없는 부와 명예를 쫓기보다 느긋한 마음으로 삶을 즐기려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남들은 다들 좋은 직장이라고 부러워했어요. 하지만 막상 들어와 보니 비전이 없었죠. 경제적인 안정이야
보장되겠지만 5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이렇게 살고 이렇게 늙어가겠구나 생각하니 끔찍했어요.”
몇 번의 실패 끝에 시험에 패스해 꿈에 그리던 아나운서가 된 A씨. 그러나 그녀는 날이 갈수록 일이 주는
재미보다 보이지 않는 미래가 암울하게 느껴져 견디기 힘들다고 고백했다. 때로는 새벽에, 때로는 한밤중에
출근하고 퇴근하기를 반복하며 그녀는 내적으로 고갈되어 가는 느낌을 버릴 수 없었다.
자기계발은커녕 가족도, 친구도, 소중한 그 무엇도 챙길 수 없는 시간들. 취미는 무엇이었던가? 꿈은
무엇이었던가? 생각하면 아물아물해지기만 하는 하루하루가 의미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선택했다. 미련 없이 직장을 떠나기로. 자신이 가장 자신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서 그것뿐이라고 생각하자 비로소 주위의 만류에도, 걱정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후 그녀는 긴긴 휴식에 들어갔다. 듣고 싶던 음악도 실컷 듣고, 좋은 사람들과 삼삼오오 짝을 지어
때로는 혼자서 여기저기 여행도 훌쩍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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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산책하는 사람들. 도심 속에서도 사람들은 자연의 정취를 만기하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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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생활비며 각종 경비는 생각보다 넉넉히 받은 퇴직금으로 충당. 꿈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직 다가
오지 않은 미래를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싶지 않은 게 그녀의 마음이다. 알고 보니 그녀는 하고 싶은 일을
많이 갖고 있었다. 취업준비에 밀려 뒷전으로 미뤄뒀던, 그러나 사실은 정말로 하고 싶었던 공부가 그녀에겐
따로 있다.
등산을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만큼 자주 낯선 땅을 밟고 산에 오르리라 다짐도 해본다. 남이 들으면
웃을지 모르나 춤추고 노래하는 것도 무척 좋아하니 기회만 생기면 신나게 놀아야겠다는 생각도 빼놓을
수 없는 일 중의 하나다.
이름만 대면 금방 알 수 있는 대기업의 잘 나가던 컴퓨터 프로그래머 B씨도 과감히 회사를 그만두고 다운
시프트 족에 합류한 케이스. 마술이 좋아 마술사의 길에 들어서기로 한 그는 자신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제대로 빛도 못 보고 이대로 도태될지 모른다. 월급은 형편없이 줄어들었고 가끔은 생활비조차
모자라 쩔쩔맬 때도 있다. 사회적 기준에 비춰보면 어디 가서 명함 한 장 제대로 내밀기조차 쑥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A씨도, B씨도 그런 자신이 더없이 만족스럽단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규격에 맞춰 자신을 몰아가는
대신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어서, 자신이 비로소 자신답게 느껴져서 더없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당연히
아직까지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다고.
이런 그들에게 앞으로 뭘 할 거냐고, 당분간은 푸욱 쉬더라도 조만간 다른 일을 찾아야하지 않겠느냐고
물으면 그건 우문이 될 뿐이다.
먹고 사는 문제는 그 때가서 생각할 일. 산 입에 거미줄 치는 법은 없다지 않던가? 몸 하나 튼튼하니
아르바이트는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테고, 그렇게 되면 주변에 손 벌리지 않고 제 힘으로 생활비는 댈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론 다소 쪼들리더라도 일과 놀이를 병행 해 가고 싶은 게 이들의 꿈이기 때문이다. 하나밖에
없는 사다리를 제각기 남보다 먼저 올라가기 위해 쉼없이 밀치고 젖혀야 하는 서바이벌 게임에서 이제는
그만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치열한 생존경쟁과 그로 인한 긴장이 잠시도 쉬지 않고 사람의 숨통을 조여 오는 게 현대인의 삶. 이들
다운시프트 족은 여기서 스스로 이탈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특히 유럽을 중심으로 다운시프트 족이 늘고 있는데, 증권·금융업자, 법조계 인사, IT업계 종사자 등
중산층 전문직 종사자 중에 많이 나오는 것도 특징의 하나다.
계곡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허브 농원. 오붓하게 거닐며 사색하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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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요가 수련을 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심한 스트레스에 쌓여 요가원을 찾은 이들은 대부분 고요한
명상을 몸과 마음의 힘을 회복하고 자신에게 깊이 몰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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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은 한창 바쁘게 일하고 경력을 쌓아갈 시기인 30대와 40대가 대부분. 영국의 시장조사기관인 데이터
모니터가 조사한 결과 2002년 한 해 동안 무려 190만 명이 스트레스를 피해 직장이나 집을 옮겼다고 한다.
또 1천200만 명은 급여를 삭감하는 대신 적은 근로시간을 택했다고.
데이터모니터는 또 다운시프트 족이 지난 6년간 약 30% 이상 증가했으며, 오는 2007년에는 1천600만 명에
달할 것이라 내다봤다. 당장 올해만 해도 약 3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는 전체 노동인구의
약 10%에 해당하는 무시하지 못할 숫자다.
사회는 어쩌면 이들을 부적응자, 이단아로 볼지 모른다. 이들이 넘어야 할 산은 그런 시각뿐이 아니다.
경제적인 제약도 아마 생각보다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젊을 때는 그럭저럭 자유롭게 보일지 모르나 나이가
들수록 생활유지에 급급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시사하는 것은 적지 않다. 빠르고 현란하게 돌아가는 삶에서 제자리를 찾고자
하는 욕구, 생계유지를 위해 사는 대신 인간답게, 자신답게 살겠다는 의지, 돈이나 명예의 구속에서
벗어나 근본적인 자유를 만끽하고자 하는 욕구.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잔뜩 대출을 받아 집 평수를 늘려가는 것 따위는 이들에게 안중에 없을 것이다.
밀린 대출금을 갚기 위해 잔뜩 허리띠를 조여 맬 필요가 없는 삶, 월급이 적더라도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삶, 쫓기지 않고 느리게 사는 삶,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자신이 원하던 삶을 하나하나 그려갈 수
있는 삶, 자녀가 커가는 모습을 그때그때 곁에서 지켜보며 동참할 수 있는 삶.
이들이 원하는 것은 어쩌면 작지만 큰 것일지 모르겠다.
치열한 생존경쟁과 그로 인한 긴장이 잠시도 쉬지 않고 사람의 숨통을 조여오는 게 현대인의 삶.
이들 다운시프트 족은 여기서 스스로 이탈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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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 기자 | bookwor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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