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속 녀
빼어난 지성, 뛰어난 용모의 재벌 상속녀.
그녀를 둘러싼 거대한 음모와 암투,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
분명히 어디선가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놈은 틀림없이 이번 기회만은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연례행사의 두 번째 날이고 공개되어 있진 않더라도 이쪽의 예정을 간파할 능력을 놈은 가지고 있다. 세르게
이와 레빈스키, 둘 중 어느 한쪽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피 맛을 충분히 보고 지금쯤 허기져 있을 것을. 윤청
은 거기까지를 예측하고 있었다.
‘만약에 그들이 이쪽의 계획을 정말로 알아차렸다면…….’
오싹 소름이 끼쳤다. 비극적인 결말 이전에 공포 이상의 느낌이 일었다. 어수룩한 은폐 작전으로 안간힘을
하고 있는 모습까지도 들킨 거라면 자존심이 더 많이 다치도록 되어 있다. 힐튼 호텔에서 차를 바꾸어
타는 것을 보고, 문정동으로 와서 택시에서 내리고 있는 오한수 대명그룹 회장 부인의 모습을 보고,
곤두박질쳐오는 경비원 이 씨를 모두 보고 있다면……. 게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고 조용히 하라는 몸짓을 하고, 경비원 이 씨에게 귓속말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그런
것을 모두 보고 있었다면 놈은 실소를 머금겠지.
그 착안점은 실로 야릇했다. 7층까지 엘리베이터가 오르는 동안 윤청은 비로소 공개된 협약 가운데서 일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움직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눈앞이 아찔했다. 누군가가 둘 사이를 오가면서
공통된 견해를 나누어 갖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진 이유는 무엇일까? 어째서 이 모든 것을 보이지 않는
미지의 적이 알아차리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게 됐는가 말이다.
혹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며칠 전의 사건으로 이쪽이 한껏 위축된 채 몸을 사리고 있을
것으로 알고 오늘의 이 행사는 예측마저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에게 절호의 찬스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오히려 적을 유인하려던 이 엄청난 시도가 하찮게 무산되어 버린다면 그 역시 얼마나 맥 빠진
노릇인가.
거기까지 생각하자 윤청은 자신도 모르게 기쁨으로 가슴이 설레어 옴을 느꼈다. 차라리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은 채 무사히 오후 하루를 보내고 내일 아침 연희동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아니야!’
소스라쳐 머리를 젓는데 그 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그녀는 밖으로 나왔다. 윤청은 오른손에
핸드백을, 그리고 왼손에는 책을 한 권 들고 있었다. 시장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안에 들어가는 길로
오랜만에 손수 점심밥을 지어 먹을 생각이었다. 아무 데도 전화는 하지 않을 생각이고 받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밤까지는 되도록 마음을 비우고 책이나 읽으면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누워 적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이토록 밝은 한낮에 적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므로.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오산이었다. 그녀답지 않은 과신이었다. 누군가가 먼저 자신의 행선지에 도착해
있으리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일생일대의 엄연한 실수였다.
상하 두 개의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한 걸음 무심히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경악의 한 순간에, 뜻밖의
상황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윤청은 알아차렸다. 그녀가 들어섰을 때 작은 평수의 아파트 현관은
이미 꽉 차 보였다!
아주 오래, 1세기 동안을 거기 그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은회색 머리의 한 외국인 남자가 권총을 손에
든 채 조용히 그녀를 향해 남은 한 손을 뻗고 있었다. 무성용의 검은 총신이 이쪽을 향한 채 허공에
떠있는 것이 한 눈에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 낚아챈 핸드백을 쥔 손으로 그는 현관문을 밀어
닫았다. 그녀의 등 뒤로 철커덕,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대명그룹의 장학출 사장은 호주머니 안에서 휴대폰의 벨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양손에 들고 있는
것이 있었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바람에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휴대폰의 벨소리는 이내
멎었다. 아마 남형준일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현관 도어를 열자 대뜸 전화벨 소리가 먼저 들렸다. 그는
바삐 전화기가 놓인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흘깃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밤이 꽤 늦은 10시 45분이었다.
뜻밖에도 연희동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장학출은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다시 한번 시계를 보았다.
더한층 가슴이 서늘해진 이유는 김하일의 예사롭지 않은 음성 때문이었다. 허둥대고 있는 듯한 느낌이
일었다. 장학출은 자신도 모르게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닙니다…….”
어투가 애매했다. 뭔가를 숨기거나 숨기려는 의도가 아니면 낼 수 없는 그런 목소리로 윤청 부회장의
김하일 비서가 말했다.
“그냥, 계시는가 알아보고 싶어서요…….”
“뭐야! 무슨 일이 있지?”
장학출이 벌컥 언성을 높였다. 그제서야 김하일의 허공을 울리는 듯한 음성이 들려 왔다.
“사장님……. 전 어째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미칠 것 같습니다!”
“응? 부회장님은……. 지금 옆에 계신가?”
“사실은 지금 부회장님이 집에 안 계십니다!”
갑자기 결심을 한 듯 쏟아내는 음성으로 김하일이 말했다.
“오늘 낮에 문정동엘 가셨는데…… 혼자서…….”
“뭐라구?”
장학출은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벌떡 일어섰다. 김하일의 점차 경련이 일고 있는 듯한 음성이 송전화기
안에서 울리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진작 전화를 드릴 걸 그랬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명을 하시는
바람에……, 작년에도 연례행사로 하루를 묵어 오셨다면서…….”
“뭐?!”
권총을 손에 쥔 채 윤청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한참이나 들렸다. 그러다
소리가 멎었다. 낮은 발자국 소리, 인기척, 그리고 다시 조용해졌지만 윤청은 무서운 갈등에
시달렸다. 스테판 레빈스키는 안방 문이 열리는 것과 함께 무작정 발사하라고 했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해 쏘지는 말라고, 그는 웃으며 말했었다. 윤청은 약속했고 그는 바람처럼 아파트에서 사라졌다. 그는
10분 정도 아파트에 머물러 있었고, 짧지만 반세기에 버금가는 시간동안 그녀와 엄청난 질량의 대화를
나눈 후였다.
최초의 순간에 윤청은 모든 것을 각오했었다. 그가 핸드백 안에서 권총을 꺼내드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현관 도어에 기댄 채 서있었다. 도어에 기대 서 있었던 건 여유로운 행동에서가 아니라 갑작스런 충격으로
쓰러지지 않도록 몸을 가누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등을 받친 도어의 차가운 감촉은 상황에 따른 판단에
재빨리 대응하기에 도움이 되고 있기는 했다.
윤청은 줄기찬 눈초리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는 핸드백을 쥐고 있는 한 손만으로 민첩하게 내용물을
확인했다.
“오호, 츳츳…….”
그는 재미있는 얼굴로 혀를 차고는 겨드랑이와 팔꿈치로 핸드백을 끼고 권총을 꺼내어 점검하듯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다시 핸드백 안에 권총을 넣고는 조용히 뚜껑을 닫았다. 그는 한쪽 입술로만 짤막한
미소를 흘렸다. 두 사람 사이에 가로 놓였던 침묵을 깨뜨리며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걸로 날 해치도록 되어 있었군요.”
영국식 발음으로 구라파 사람 특유의 악센트가 그의 어투에 짙게 베어 있었다. 그는 두어 걸음 물러서서
작은 테이블 위에 핸드백을 내려놓았다. 아직도 권총을 겨눈 채였다. 그가 말했다.
“자, 들어오시오.”
귀에 익은 음성은 전화로 자신의 이름을 ‘조’라고 밝혔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언제나 부드러운
억양으로 말했던.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총구를 내렸다는 사실이다. 예의 그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가 말했다.
“당신이 서툴게 굴지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소. 공연히 소란을 피우거나 하지 않으리라는 걸. 그리고
지금쯤은 내가 당신을 해칠 사람이 아니란 걸 충분히 알아차리고 있을 거라고 보는데.”
비로소 윤청은 쓰러지려고 했다. 맥이 풀렸다. 안도와 경악이 동시에 뒤엉킨,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오히려 강타당한 느낌이었다. 그가 계속해서 말하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도 긴장이 풀리는 순간 정신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청은 자신을 잘 아는 편이었다. 잠시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녀는 구두를 벗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섰다. 무턱대고 그를 경계하기에는 너무 많은 좋은 징조가 그로부터 엿보이고 있었다.
“난 스테판이란 이름의 러시아인이오. 스테판 레빈스키. 물론 당신에게는 조라는 가명으로 나를 소개한
적이 있지만 그건 일시적인 필요에 의해서 그렇게 부르도록 한 거요.”
그로부터 동정어린 눈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한껏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우선 나에 대한 오해부터 풀어야겠소.”
그제서야 윤청은 조금 몸을 움직였다. 점차 여유가 생겼다. 마주앉은 위치에서 그의 등 뒤로 벽에
걸린 액자가 보였다. 숲이 자욱한 시골길 옆에 오두막 같은 것이 그려져 있는, 윤청이 아주 좋아하는
그림이었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라면 저런 곳에서 살고 싶다고 그녀는 말한 적이 있다.
“어떻든 당신으로 인하여 내 입장이 매우 난처해졌던 것만은 사실이오. 해리 디킨스라는 미 외교관
때문에 말이오. 하지만 무턱대고 사람을 해칠 정도로 우리가 막된 테러리스트 집단은 아니란 걸 당신에게
말해 주고, 그리고 보여 주고 싶었소.”
윤청은 어깨를 조금 내렸고 막혔던 숨을 토해내기 위해 얼른 입을 열었다.
“우리?”
그녀는 반문했다.
“그렇소. 우리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었소.”
윤청은 조소를 머금었다. 어떤 경우에도 의식이 있는 동안에는 망각할 수 없는 원한이 그녀에게
있었다. 이들은 오한수 회장과 이종국을 해치지 않았는가? 그녀가 말했다.
“도대체 이 만화 같은 이야기의 실체는 뭐예요?”
스테판은 윤청의 야유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당황하고 놀라고 황급히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 상황에서
코웃음이라니? 그는 경이로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 맙소사! 이 모든 걸 만화라니?”
그는 어이없는 눈초리를 거두며 한껏 우호적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참으로 대단한 여성이오. 전부터 그걸 느끼고 있었는데 당신은 여자인데도 우두머리의 자격이
있소.”
그는 머리를 흔들다 말고 한껏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정말이지 당신이 여자라는 사실이 놀랍소. 가짜 염제호를 당신이 그런 식으로 놔준 걸 보면서 난
결심했소. 절대당신을 해치지 않기로 말이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경우 절대 그런 식으로 놓아
주진 않을 거요. 기어이 경찰에 넘겼겠지. 그럼 결과는 뻔하오. 헌데 당신은 먼 앞일까지 훤히 내다보고
머리카락 한 올만큼도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빈틈없는 처리를 한 거요. 우리에게 당신만한 요원이
있다면 세계를 제패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당신이 탁월한 여성이라는 걸 그 때 확인했소. 이제
내가 왜 당신을 돕기로 했는지 알겠소?”
그는 불타는 눈길로 바라보며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윤청을 향해 눈을 한번 찡긋해 보이고 나서 말을
이었다.
“만화라니? 오, 그래요! 이 모든 사실이 언젠가 공개되더라도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얼른 납득하기가
어려울 거요. 당신네 나라, 조용한 아침의 매우 봉건적인 나라에선 그야말로 만화 같은 얘기지. 헌데,
이건 사실이잖소?”
윤청은 여전히 불길이 이는 눈초리로 스테판을 보면서 말했다.
“어떤 사실요? 차를 폭파시켜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이구, 선량한 한 젊은이를 그토록 잔인하게
사흘이나 걸려 죽게 만들어 놓은 것 말인가요?”
“그건 내가 한 짓이 아니었소.”
스테판이 말했다. 윤청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한 짓이 아니었다구요? 오, 이종국을 죽게 한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까 당신은 뭐, 지휘자나 그런
인물이었겠군요?”
그는 머리를 가로젓고는 주위를 한 바퀴 휘돌아 보고나서 갑자기 달라진 냉랭하고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말하자면 길어요. 차차 판단이 서게 될 거요. 그래서 좀더 분명한 사실을 말해 주려고 여기에 먼저
와서 당신을 기다렸던 거요. 우리들 러시아 사람들은 일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지만 순박하고
섬세한 사람들이오. 한껏 궁지에 몰려 있으니까 재정적 이득을 위해서는 사실 범죄 행위도 사양할
겨를은 없지. 하지만 전체가 아닌 소수의 의견이 우리를 배반하고 독자적으로 이해를 추구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오. 그 때문에 우리도 골치를 앓고 있으니까.”
그가 말을 이었을 때 어투는 좀 전의 것보다 훨씬 빨라졌다. “우린 친구요. 지금 당장은 시간이
없지만 얘기를 나눌 기회는 많을 거요. 세 시 정각에 난 모처에 전화를 걸기로 되어 있소.”
“…….”
“지금은 누구란 걸 밝히지 않겠소. 언젠가는 밝혀지겠지만 내 입으로는 아닐 거요. 지금쯤 한국
경찰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듯하니까. 하지만 이거 한 가지는 말해 줄 수 있소. 그 자가
나를 시켜 당신을 해치도록 보내면서도 당신이 권총을 휴대하고 있을 거란 얘긴 내게 안 해줬소.”
‘그 자?’
윤청은 피가 맺히도록 그 자가 누구를 말하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쉽게 궁금증을 들어내 보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먼저 말려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신 핸드백에서 권총을 발견한 순간 난 이미 당신을 해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더 한층
깊이 하게 된 거요. 물론 그러지 않았어도 당신을 해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긴 하지만
말이오. 다만 선택의 여지가 좀 더 빨라졌을 뿐이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소?”
윤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녀는 최초로 감정이 어른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알겠어요. 당신을 믿어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오! 대화가 될 줄 알고 있었소. 당신의 그 유창한 영어 덕분에도 말인데 그 동안 우린 상당히 친해진
거잖소?”
윤청은 어이없는 얼굴로 스테판을 바라보며 조금 웃어 보였다.
“구태여 말할 필요는 없지만 그 자는 오늘밤 당신이 나를 쏘도록 한 거요. 나쁜 자식. 그 자는
정말이지 세기에 하나 날까 말까 하는 자요. 아주 교묘하게 일을 꾸밀 줄 아는 놈이란 말요.”
“…….”
“만약 내가 당신에게 당하지 않고 당신을 처치하고 나면 세르게이를 시켜 나를 처치하도록 각본을
짜놓았을 거요. 그러니 당신은 여전히 위험하오.”
어느 때보다 긴 침묵이 흘렀다. 둘 다 생각해 보고 있는 중이었다. 스테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몹시 혼란스러울 테지만 날 믿어요. 난 진실을 말하고
있으니까. 우리 조직의 명예를 위해서도 이제 난 당신을 돕지 않으면 안 되오. 전엔 당신들 내부의
암투에 서로 죽이고 죽고 하는 일은 내게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소. 사실은 나도 조직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만큼의 돈을 받고 조용히 사라질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달라요. 왠지 아오?”
그는 상의의 단추를 끄르고 좀더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건장한 체격에 다리가 길었다. 모습은
수려했지만 그가 남편을 해친 사람이라면 그는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 동안 죽 당신을 지켜봤어요. 다시 말하지만 당신은 전혀 빈틈이 없었단 말이오. 게다가 아주
인간적이고. 이미 오래 전부터 당신은 죽이기에 진정으로 아까운 여성이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소. 아니,
아깝다기보다 숭배자가 된 거겠지. 반지 도난 사건에 얽힌 문제를 아주 멋지게 해결하는 걸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어쨌든 민정애란 여인을 지금은 아주 행복하게 살게 해줬잖소? 멋진
아파트에서 아들은 수술을 받고 완쾌해서 함께 잘 살도록 해 놓았소. 그리고 당신 부하가 죽기 전
병원에 있는 동안 당신은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소. 아무나 그렇게 하진 않소.”
‘당신 부하’라는 말을 들으며 윤청은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방울져 흐르는 눈물을 훔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녀는 고즈넉한 눈길로 스테판을 바라보았다.
“울지 말아요, 미세스 오. 맹세하오. 당신을 돕겠소.”
그는 초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 손은 아직 깨끗해요. 난 당신들 중에서 아무도 해친 일이 없소. 그러니 날 믿어도 좋아요. 자,
이젠 작별 인사를 해야겠소. 한 가지 유감스러운 일은 이 이상은 당신을 도울 수가 없다는 거요. 그것이
내가 당신을 돕는 방법이오. 당신은 내 입장을 알겠소?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신 스스로가
판단할 문제요. 경찰에 연락할 수도 있겠지만 그 자가 틀림없이 전화를 도청하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해봐야 할 거요. 이 길로 당신이 위험한 이 곳을 벗어날 수도 있고. 아니면 남아 있다가 내 말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지. 선택은 당신 자유의사에 달렸소.”
이제는 그 자가 누구인지 물어야 할 차례인지도 모른다고 윤청은 생각했다. 그러나 묻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짐작하고 있는 바였다.
“내가 당신의 비서에게 연락해 줄 수도 있소. 어떻소?”
윤청은 비로소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결정을 하기에 그다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말했다.
“날 믿고 오늘 밤까지 기다리세요.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말구요. 부탁이에요.”
윤청의 그 제안은 매우 현명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 자’가 어떤 작전을 짰든지 종착지까지 갈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도 결정적인 증거는 스테판의 은밀한 귀띔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었다. 스테판이
빙긋했다. 윤청의 생각을 간파한 듯한 얼굴로 그가 말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겠소. 어떻든 예정대로 난 자정에 여기 나타날 거요. 난 무성총을
가졌지만 당신이 나를 향해 총을 쏘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총을 쏴야 하오. 하지만 나를
다치게는 하지 마시오. 그럼 되는 거요.”
“세르게이는? 그 자는 어떻게 해요?”
문득 공포에 질린 음성으로 윤청이 말했다. 스테판은 한동안 물끄러미 허공을 응시한 채 서 있다가
윤청에게 눈길을 돌렸다.
“설득해 봐야죠. 어차피 죽을 목숨이긴 하지만 알아듣도록 해볼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말을
듣지 않을 때는…….”
“죽일 셈인가요?”
“아니오. 난 함부로 동료를 죽이진 않소. 아마 체포해서 상부로 넘기게 되겠지. 어차피 너무 많이
우리에게 먹칠을 하고 있으니까 놈은 반드시 본국에 억류돼야만 할 거요.”
그는 한동안 윤청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일어서서 나갔다. 그는 올 때처럼 비상계단을 통해 아파트에서
사라졌다.
한참 후 또다시 닫긴 도어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도어의 실린더 돌아가는 소리가 조금씩 희미하게
들렸다.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너무 신중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스테판이라면 저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조용히 속삭여서 알려 줄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안심을 하고 문설주를 향해 총을 쏘아댈
수도 있다.
혹시, 그가 아니면? 뭔가 일이 잘못됐거나, 스테판이 장난을 친 것이라면……?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 사람의 눈을 보면서 분명한 것을 느낄 수 있었어. 적어도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어.
문이 열렸다. 윤곽이 너무 희미했다. 아니, 윤곽을 살필 만큼 자신이 강심장이 아니란 걸 윤청은 안타깝게
느꼈다. 전혀 보이지 않았고 숨이 끊어질 것처럼 심장이 엄청난 진동으로 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다. 그가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분명히 손에 권총을 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팔을 움직였다!
윤청은 무턱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 순간, 그가 뭔가를 말하려 했던 것을 알았지만 너무 늦었다. 그가
왼팔을 움직였다는 것도 바로 그 순간 느꼈다.
“이런…….”
낮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내밀려던 손을 옆 이마에 가져가고 있는 스테판의 모습이 좀더
똑똑히 보였다.
“아아, 당신이었어요?”
윤청은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쉿! 조용히 해요. 하마터면 정통으로 맞을 뻔했소. 좀 다친 것 같소.”
머리에 손을 댄 채 중얼거리듯 그가 말했다. 윤청은 화석이 된 채 망연한 얼굴로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가만히 있어요. 당신은 이제 죽은 거요, 알겠소? 일이 좀 꼬이고 있단 말이오. 그러니 조용히 있으
시오. 난 가겠소. 무슨 일이 있어도 밖으로 얼굴을 내밀지 마시오.”
모든 것은 수 초도 걸리지 않은 사이에 일어났다. 그는 바람처럼 현관문을 통해 밖으로 사라졌다. 출구는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사방에서 문이 열리고 있는 것 같았다. 머잖아 총소리에 놀란 주민들이 밖으로
나올 기미가 보였다. 스테판은 어둠에 잠긴 모퉁이를 향해 아파트의 화단을 두 개나 뛰어 넘었다.
그는 구석진 곳의 가장자리에 돌출해 있는 교석에 심하게 부딪혔다. 정강이를 조금 다친 것 같았다. 얼굴을
찡그리고 두어 번 펄쩍 뛰었다. 그 때, 피융! 하고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렸고 가슴에 날아와 꽂히는 것이
있었다. 그는 사정없이 비틀거렸다. 그리고는 반쯤 옆으로 쓰러졌다.
그는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으므로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그가 바짝 다가와 있었다. 귀 언저리에
차가운 금속이 밀착해 있었고 이마에서는 가느다랗게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좀더 효과적이란 걸
알았다.
“당신도 다쳤군. 그 여자는?”
쉰 목소리로 신기훈이 말했다.
“해치웠소. 그 여자가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는 건 미처 몰랐소.”
“흥, 내가 말해 줄 걸 그랬나? 어쨌든 수고했군!”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잠시 주의력이 흩어졌고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이었다. 누군가의 재빠른
손길이 어둠 속에서 신기훈의 팔목을 후려쳤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스테판과 신기훈을 가로지른 그
일격은 실로 엄청났다.
신기훈은 땅바닥을 구르는 권총을 바라볼 겨를이 없었다.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멍하니
앞을 봤다. 바로 그 때 아래쪽에서 두 번째 일격이 목 줄기를 훑고 그의 턱에 명중했다.
“억!”
신기훈은 몸의 중심을 잃고 아파트 건물 벽에 전신을 부딪히며 휘청했다. 눈앞이 아찔했고 본능적인
방어 태세를 취했지만 세 번째 일격이 날아올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잠시의 여유도 두지 않고
팔목에서 철커덕 수갑 채워지는 소리가 났다. 멍하니 올려다보는 신기훈의 눈에 임 형사의 상기된
얼굴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파르스름한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파트의 7층에서는 거의 동시였다. 아니, 스테판이 아파트를 나가고 수 초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윤청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분명 세르게이였다. 그가 세르게이란 걸 윤청은 단박에 알았다.
“악!”
”너희들 놀고 있군?”
윤청은 숨을 들이킨 채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거의 심장이 멎고 있었다.
“그렇게 된 거군?”
검은 총구가 윤청의 얼굴을 똑바로 겨누고 있었다. 죽지 않을 만큼 놀란 상태였고 심장이 위태롭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정신은 말짱했다. 조금 전까지도 손에 권총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스테판이 나간 후 아무렇게나 나이트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었다. 한 걸음 내딛고 엎드려서 아주
크게 손을 뻗어야만 하는 곳에 있었던 것이다.
“당신 대단해. 대단한 여자라구. 스테판을 포섭하다니. 하지만 여긴 좀 전에 내가 먼저 와
있었다구. 스테판이 아무 말도 없이 나갔다면 깜빡 속을 뻔했잖아.”
윤청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고즈넉이 서 있었다.
“‘하마터면 정통으로 맞을 뻔했소, 좀 다친 것 같소’ 라구? 하!”
딱딱한 영국식 발음으로, 그러나 느긋하게 웃으며 세르게이가 말했다. 그가 말하고 있는 동안 윤청의
머릿속에서 비행기의 프로펠러보다 더 엄청난 두뇌 회전이 일어났다. 다음 순간 윤청의 눈이 갑자기
세르게이의 머리 위에서 크게 확대되더니 멎었다. 그녀는 아악, 하고 길게 비명을 질렀다. 세르게이의
얼굴이 정신없이 자신의 머리 위로 향했다. 자동 반사였다.
그 때였다. 윤청은 오른쪽 발목에 비끄러매 놓은 줄을 뒷발질 하듯 사정없이 나꿔챘다. 세르게이는
한 찰나 동안만 어리둥절했다. 그의 이마로 쏟아져 내려오는 것이 있었다. 함정이었다.
스테판을 다 믿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스테판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하고
윤청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결과는 끔찍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쳐놓았은 그물이었다. 그것은
하찮은 무게의 헌 다리미였다. 다용도실에서 거둬낸 가느다란 빨랫줄에 아슬아슬하게 연결시켜 도어의
바로 위에 걸어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한 쪽 끝은 발목에 걸어 놓았다. 이 일로 오후 한 때는 나름대로
분주했었다.
그것이 떨어져 내리는 순간, 세르게이의 온갖 주의력은 몸의 중심과 함께 완전히 분산되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이었다. 윤청은 한 걸음 내어디뎠고 길게 팔을 뻗었다. 둘 다 동시였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세르게이가 반쯤 몸의 균형을 잡았을 때 그의 면전에서 최초의 총성이 울렸다.
“탕!”
최초의 총알이 세르게이의 얼굴 한복판에 명중했다. 게임이었다. 텔레비전 게임에서도 그랬다.
앞으로 쏟아져 오는 검은 구멍을 향해 윤청은 두 번째 방아쇠를 당겼다.
“탕!”
어디를 맞췄는지 알 수 없었다. 윤청은 여전히 눈을 꽉 감은 채 다시 한번 방아쇠를 당겼다.
모두들 올려다보았다. 심지어는 수갑에 채워진 신기훈마저 얼굴을 높이 들고 아파트 쪽을 보았다.
“오, 노우…….”
스테판의 음성이 크게 울렸다.
“그녀가 당했어!”
장학출 사장은 미친 듯이 그녀가 있는 아파트의 현관 쪽을 향해 내달았다. 엘리베이터가 막 닫히려
하고 있었다. 그는 발길질을 하면서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 들었다.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세상의 온갖 것에 대한 저주가, 분노가, 그리고 울분이 혈관의 피를 치솟게 하고 있었다. 그는
임 형사를 저주했고 김하일을 저주했고 오한수 회장을 저주하면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맴을
돌았다. 드디어 7층에 다다랐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길다랗게 복도가 이어졌고 사람들이 몰려 서 있었다. 그는 단 몇초 사이에 사람들을 헤치고 아파트
안으로 뛰어 들었다.
“부회장님!”
비틀거리며 윤청은 걷고 있었다. 저만치 이정표가 보였다. 그녀는 중얼대고 있었다. 가는 거야……. 모두
싫다구! 모든 게 다 싫어! 너무 피곤해. 난 너무 지쳤어……. 사람을 죽인 것이다. 얼굴 한복판에서, 뻥
뚫린 구멍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한기가 엄습했고 몹시 추웠다. 초저녁 내 작은 아파트 안에서 아늑했던 한 순간이 문득
눈앞에 떠올랐다. 아무도 모르게 영원히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 사정없이 몸이
떨려 왔다. 어디엔가 기대고 싶었다. 아늑하고 포근한 곳, 누군가의 가슴에 아늑하게 기대 방울져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아니야! 다 소용 없어. 그저 이 한기를 멈출 수만 있다면…….’
그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필사적으로 눈앞을 바라보았다. 택시…… 택시가 왜 한 대두 없을까…….
그때 저만치서 두 줄기의 헤드라이트가 하이빔으로 눈을 부릅뜬 채 무시무시한 속도로 질주해 오는
게 보였다. 누군가가 엄청난 기세로 차를 몰아왔다. 그녀는 웅크린 채 길 옆으로 몸을 비켰다. 모래
먼지에 섞인 거친 바람을 흩뿌리며 그녀의 옆을 차가 스쳐 갔다. 그 바람에 그녀는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한기가 더욱 심해졌다. 그런데도 점점 몸이 퍼졌다. 의식이 곧 멀어질 것만 같았다.
멀리 등 뒤에서 삑! 하고 차바퀴의 마찰음이 밤의 정적을 길게 찢었다. 곧이어 무섭도록 차바퀴가
끌리는 듯한 소리가 이어지고 차를 후진시키고 있는 어마어마한 역회전의 배기음도 울려 왔다.
그녀는 돌아다보지 않은 채 혼자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 그 자가 왔어…… 날 쏠 거야…….’
그 때였다. 바로 옆에서 차가 섰다. 남형준의 차였다. 윤청은 돌아다보았다. 몽유병 환자인 양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의 귀에 큰 소리로, 마치 천둥을 치는 듯 남형준의 음성이 들렸다.
“부회장님! 무사하셨군요!”
바로 그 순간 그녀는 허물어져 내리듯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장학출이 세르게이의 시체를 확인하고, 그녀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스테판
레빈스키를 통해 그녀가 살해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전하게 사람들을 피해 자취를 감췄을
거라는 레빈스키의 견해를 확인하고 나서 차에 올랐을 때였다. 남형준이 전화로 자신이 어디론가
윤청 회장을 데려가고 있다고 통보해 왔다. 단지 그 뿐이었고 전화는 끊겼으며 신호음조차 꺼져
버렸다. 남형준이 휴대폰을 꺼버린 것이었다.
그를 만나면 목을 비틀어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을 하기 까지 계획 따위란 필요하지 않았고, 무자비한
살상에 대한 결심을 하기까지 수 초도 걸리지 않았었다. 귀에 남는 건 오직 남형준의 목소리뿐이였다.
“윤 회장님은 지금 쇼크 상태입니다. 충격이 너무 크신 듯합니다.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합니다. 며칠
걸릴 겁니다. 제가 모시고 안정을 취하시도록 하겠습니다. 절 믿으세요, 형님!”
그러나! 광기어린 그녀에 대한 연모의 감정은 남형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글 김나경 | 그림 이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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