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전일식 'YEN'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주목받는 요리사를 꼽으라면 그 중 한 사람으로 남경표 세프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때 퓨전 푸드가 인기를 구가하는 동안 일식 퓨전의 일가를 이루면서 지금도 꿋꿋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퓨전 붐은 언제 있었냐는 듯이 식고 말았지만 남경표 세프가
직접 운영하는 '옌(yen)'은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솜씨를 통해 퓨전 음식이 단
순히 서로 다른 외래 음식을 범벅 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음식들의 개성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를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클럽 스시, 시즌스, 그리고 무비 등이 남경표 세프가 옌을 열기 전에 거쳐
온 곳들이다. 그 면면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굵직굵직하게 동선을 그리고 있는 지 알 수 있을 듯하다.
남경표 세프가 만들어내는 음식의 장점은 탄탄한 기본기에 있다. 핫토리 영양 전문학교에 5년 동안
유학하면서 배운 일본 요리가 지금의 실력의 기초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한 기초를 바탕으로 일본인을
위한 요리가 아니라, 외국인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요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지금 보여주는
옌 요리의 근간이라고 보면 맞을 듯하다. 하지만 일본인들도 와서 그의 요리를 먹어보고 맛있다고
칭찬하는 걸 보면 맛이라는 것이 어떤 특정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보편한 게
아닌가 하는 점을 느끼게 된다.
실내는 깔끔하다. 미니멀리즘 적 디자인이 반영된 모던한 형식의 일식 집이라고 생각하면 무난할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주방에서 일하는 요리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가끔씩 다이에 앉아서 먹기도 하지만 이 집은 일품 요리 중심의 메뉴를 내놓기 때문에
테이블이 중심을 이룬다. 음식을 주문해서 먹어보면 그동안 다른 식당들을 거치면서 서서히
완성되어 가는 남경표 세프의 솜씨를 느낄 수 있다.
장어 그린 샐러드부터 살펴보자. 적당한 크기로 썬 장어는 구워냈고, 차조 잎, 무순 등 다양한
야채를 곁들였다. 기름진 장어의 맛과 야채의 신선한 맛들이 부딪히면서 맛의 결과를
이끌어낸다. 기름짐은 신선함에 신선함은 기름짐에 서로 의지하는 것이다. 장어를 먹으면서도
그다지 기름지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건 그런 재료들 간의 조화 때문이다. 참치 회와 아보카도,
바질 소스 등을 곁들인 음식의 이름은 참치 타르타르다. 참치 사시미라고 쓰지 않고 참치
타르타르라고 이름을 붙인 게 일식 퓨전다움을 더 드러낸다. 서구에서 먹는 날고기 요리들을
타르타르라고 부르듯이 이 음식은 동서양의 재료들을 교묘하게 섞어낸다. 참치 타르타르를
적당량 덜어서 밀전병에 싸서 먹으면 입안에서 씹히면서 참치와 아보카드 등이 자아내는 기름진
맛들이 느껴진다. 방울 토마토, 파, 무순 등을 곁들여서 그 맛을 중화시켜주고, 라임을 살짝
뿌려서 먹으면 더더욱 신선함이 감돈다.
남경표 세프의 음식을 먹는 즐거움 중 하나는 재료에 있다. 재료를 고르는 솜씨가 좋을뿐더러
그 재료들의 맛을 고스란히 잘 살려내기 때문이다. 그동안 퓨전을 표방한 음식들의 실패 원인
중 하나는 재료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재료들의 맛을 제대로 끌어내지 못하다 보니 음식 전체의
맛을 만들어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경표 세프는 일식 요리사답게 재료들의 순수한
맛들이 음식 전체에서 살아 숨쉬게 만든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장점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을 고려한 간에 있다. 일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그의 음식은 약간 강하게 느껴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옌을 운영하는 곳이 동경이 아니라 서울의 한복판임을 감안한다면
그가 설정한 음식의 간이 얼마나 손님들의 전반적인 입맛을 배려한 것인 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글 고형욱 음식.와인 칼럼니스트
사진 강성철 기자 | wakaru@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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