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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이사제도, 기대 못미친다
경영감시 치우쳐 기업가치 향상에 걸림돌

침체된 기업의 활력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분식회계 방지 등 경영감시 역할만 강조되고 있는 현 이사회의 기능을 자문 및 경영전략 수립 위주로 재편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사외이사 제도의 성공적인 정착ㅇ르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발표한 '주요국 기업의 이사회 기능과 정책 시사점'을 검토함으로써 대안을 찾아본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휴렛패커드(HP)본사. HP의 이사회에는 보잉의 전 회장인 콘딧 등이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기업경영이 경험이 풍부한 이들이 회계분식 방지 등 경영감시 역할에만 머물지 않고 있음은 당연하다

사외이사 제도 꼭 필요한가
사외이사의 역할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긍정론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비판론이 강하게 제기된다. 이런 논란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이런 와중에 대한상공회의소 (이하 대한상의)가 한국의 이사회 기능에 문제를 제기해 주목된다. 요지는 미국기업의 이사회 기능이 자문 및 경영전략 수립에 초점을 맞춘 데 반해 한국은 경영감시 역할에 지나치게 편중해 있다는 것.
대한상의 측은 최근 발표한 ‘주요국 기업의 이사회 기능과 정책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이 같이 밝히며 “사외이사 제도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서는 이사회의 독립성 못지않게 효율성과 전문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는 대주주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기고 사외이사로 취임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는 결국 그동안 쌓아온 경험이나 회사에 대한 관심을 기업성장에 활용할 기회를 원천봉쇄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사회분위기와 정책풍토 때문에 투자 등 전략적 의사결정에 있어 기업가 정신이 위축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외이사 비중에 대한 부담 때문에 사내이사의 수를 줄이고 있어 중·장기적으로 이사회의 기능이 크게 약화된다는 우려 역시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해 대한상의는 몇 가지 제도 개선을 주문한다. 첫째, 회계·감사 제도가 선진국 수준으로 정비되고 증권 집단소송제가 도입된 만큼 자산 2조 원 이상 대형법인의 경우 이사회의 과반수를 차지하게 된 사외이사들이 기업가치 향상에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이사회의 기능을 재인식해야 한다는 것, 둘째, 경영감시 기능에 편중된 제도 여건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상의 기업정책팀의 이경상 팀장은 “IMF 이후 기업부문 구조개혁의 일환으로 사외이사 제도가 도입됐다. 그럼에도 사외이사를 공익 대표처럼 인식하는 경향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다”며 “경영감시 기능은 이사회가 담당해야 할 역할 중 하나일 뿐이며, 우리 기업의 지배구조가 정상궤도를 찾아가고 있는 만큼 이사회가 경쟁력 제고나 투자결정 등 기업가치 향상과 직결되는 보다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경제위기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며 우리 기업들은 다양한 변화를 경험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과제 중 하나는 기업지배구조의 개혁. 수많은 대기업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이러한 문제의 직접적인 원인을 비효율적인 기업지배구조에서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던 까닭이다.
기업지배구조의 변화를 위해서는 이사회 기능이 정상화돼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사외이사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압력도 커졌다. 이러한 와중에 2003년 4월에는 상법이 개정돼 감사역을 폐지하는 대신 사외이사가 과반수를 차지하는 감사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사외이사 제도가 어느새 기업지배구조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기업지배구조 논의의 궁극적 목표는 단순한 경영자 감시가 아니라 최종적인 경영의사 결정의 효율성 향상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식 사외이사 제도가 과연 효율적인가 하는 문제를 미국, 유럽, 일본의 상호 비교를 통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기업지배구조와 이사회
기업은 주주, 종업원, 경영자, 채권자, 공급자, 고객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 집단으로부터 제공되는 각종 유무형의 자원을 결합함으로써 제품 및 서비스를 제공하고 가치를 창출하는 조직. 기업지배구조란 이러한 책임과 권한을 규정하고 보호하는 제도적, 규범적 장치를 말하며, 크게 주주 자본주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나눠진다.
먼저 주주 자본주의는 주주를 기업의 주인으로 보고, 경영자는 주주의 대리인으로서 주주의 부를 극대화할 책임이 있다고 본다. 미국과 영국은 이를 채택하고 있는 대표적 국가. 따라서 이사회 제도는 주주와 경영자 사이에 존재하는 대리인 문제를 해소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독립성과 객관성을 갖고 기업경영을 감시, 평가할 수 있는 사외이사의 중요성도 강조된다.
반면 독일과 일본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채택한 나라다. 이는 기업지배구조 논의에 있어 종업원, 은행, 공급자, 고객 등 다른 이해관계자를 포함시킨다. 따라서 독일의 이사회는 경영이사회와 감독이사회로 이원화되며, 감독이사회에 주주 대표와 종업원 대표가 동등한 비율로 참여, 주요 사안에 공동 의사결정을 한다. 일본의 이사회는 거의 전원이 내부이사로 구성돼 있으므로 독립성과 객관성을 갖고 경영진을 감시하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다. 실제로 일본 경영자들은 주가보다 성장과 수익성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이는 종업원, 은행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게 주가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한편 이사회는 크게 통제, 서비스, 자원접근의 기능을 수행한다. 먼저 통제기능은 주주들을 대신해 경영자를 감시하는 기능이다. 이는 최고경영자를 선임하고 그들을 평가해 보수를 결정하며, 주주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감시하는 활동을 포함한다. 이사회의 기능 중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서비스 기능은 최고경영자에게 조언을 제공하는 기능이다. 실제로 이사들의 일상업무 중 많은 시간과 노력은 이를 수행하는 데 들어간다. 이 기능은 관리적, 업무적 의사결정뿐 아니라 전략적 의사결정에 대해서도 이뤄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략수립 과정에 직접 참여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조직 특유의 지식을 보완할 수 있는 광범위한 지식을 경영자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원접근 기능은 이사들이 다른 조직과의 네트워크를 통해 자본이나 기업 파트너십 등과 같은 주요 자원획득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규모가 작은 기업일수록 중요하게 부각되는 기능이다. 자원 접근을 용이하게 해주고, 기업이미지를 높일 수 있는 명망 있는 인사를 이사회에 영입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이들 기업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사회는 회사에 대한 관계와 기능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사내이사로, 고위경영진과 경제적, 심리적으로 밀접하게 관계돼 있는 이사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현재 회사의 피고용인이거나 피고용인이었던 자, 자회사와 관련 있는 경영진, 고위경영진과 관계되는 자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회사의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데 있어 회사에 필요한 특수하고 전문적인 식견 및 정보 등을 제공한다. 하지만 CEO의 지휘 하에서 일상적인 경영활동을 하므로 경영진의 직권남용 등 경영상의 문제점 해결을 기대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둘째는 사외이사지만 회사의 주거래 은행이나 변호사, 또는 고문인 경우다. 마지막으로 독립 사외이사가 있다. 이는 회사의 피고용인이나 임원이 아닌 이사를 말한다. 따라서 일상적인 회사의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고, 장기적으로 전략적·재정적·조직적인 회사목표를 수립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세계적 고급차 메이커인 독일의 BMW. 이 회사에는 상대적으로 은행출신 감독이사가 적다. 다만 전체 지분의 42%를 소유하고 있는 퀀트 가문의 가족들이 포함돼 있어 경영이사회와 감독이사회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한다
주주 권리가 우선인 미국의 사외이사 제도
미국의 대다수 대기업들은 과반수 이상의 사외이사를 두고 있다. 미국기업의 이사회는 기업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사외이사 및 경영진으로 일하는 사내이사로 구성된다. 이사회 구성은 평균적으로 13명이며 이 중 약 9명이 사외이사다. 이들은 전·현직 기업경영인, 재무나 법률 전문가, 소액주주 대표로 구성된다.
1997년 4월, 미국의 월간지 ‘비즈니스 위크’가 미국기업의 이사회와 관련해 설문을 실시한 적이 있다. 각 기업 이사회의 우수성에 대해 평가하고, 다시 우수한 25개 회사와 열등한 25개 회사의 경영실적을 비교한 것이다. 그 결과 최우량 이사회를 가진 기업이 불량한 이사회를 가진 회사보다 월등히 양호한 경영성과를 낸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조사에서 우수한 이사회와 그렇지 못한 이사회의 차이를 구분해 주는 가장 큰 특징은 이사회 기능의 차별성이었다. 우수한 이사회는 그렇지 못한 이사회보다 기업의 전략수립에 사전적으로 참가하며 중요한 역할을 적극 수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 경우 이사회는 철저한 사전 연구를 바탕으로 전략계획을 입안하고 경영자의 실적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경영진의 전횡을 감시·견제하는 역할뿐 아니라 기업경영에 대한 자문역할도 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사외이사 제도의 무용론을 펼치는 이들도 만만치 않다. 이들은 그 이유로 사외이사의 지나친 재무적 성과 의존을 꼽는다. 또 사외이사 제도가 건전한 경영과 주주 및 채권자 보호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학자들 역시 사외이사 제도가 기대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따라서 이 제도가 꼭 필요하다는 주장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이 제도를 도입한다고 해서 기업의 건전한 경영과 효율성이 반드시 향상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미국 대기업들은 사외이사의 80%가 다른 회사의 전·현직 CEO로 구성돼 있다. 예를 들어 GM의 이사회는 메릴린치 투자은행의 스탠리 오닐을 비롯해 11인의 사외이사가 모두 다른 회사의 전·현직 CEO다.
그밖에 GE의 이사회에는 존슨&존슨의 전 CEO 라센이, HP의 이사회에는 보잉의 전 회장인 콘딧이 사외이사로 활동중이다. 기업경영의 경험이 풍부한 이들이 회계분식 방지 등 경영감시 역할만 하지 않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 중에서도 GE는 탁월한 경영자의 리더십과 더불어 효율적인 이사회 운영으로 유명하다. GE는 전체 이사회의 2/3 이상을 사외이사로 충원하고 있다. 또 전체 이사 16명 중 12명이 사외이사로, 주로 기업체, 학계, 주주대표 등으로 구성된다. GE의 이사회는 주주의 장기이익을 추구한다는 이념 하에 경영 현안은 물론이고 경영성과, 사업전략 및 전망에 관한 회의를 한 해에 8차례 갖는다. 또 산하 위원회를 통해 보다 효율적인 의사결정을 도모하며, 사내 최고경영기구와 유기적인 협조체제를 구축한다. 세계 최대의 유통회사인 월마트의 이사회는 사외이사 9명과 사내이사 5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 회사의 이사회가 다른 회사와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이사회 내에 전략수립 및 금융위원회를 두고 있다는 것. 위원회는 갖가지 금융 현안을 분석하고 회사의 장기전략 수립 업무를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위원회는 사외이사 2명과 사내이사 2명으로 구성되는데, 25년 동안 월마트에서 잔뼈가 굵은 사장 겸 CEO를 비롯해 오랜 경륜을 지닌 핵심 브레인들이 포진해 있다. 이들이 회사 내 경영임원들은 물론 외부 전문가들과 긴밀한 협력을 통해 전략을 수립해 간다. HP는 11명으로 구성된 이사회를 운영하고 있는데, 의장 겸 CEO인 피오리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사외이사다. 특이할 점은 기술개발이 중시되는 사업의 특성상 3명으로 구성된 기술위원회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 위원회의 역할은 HP의 기술경쟁력과 지적재산권의 범위 및 수준을 평가하고, 투자영역, 방향, 투자규모 등에 대해 이사회에 권고하며 기술전략을 추진하는 것이다. 또 기술전략의 시행에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는 등 기술개발과 관련한 모든 분야에서 핵심역할을 수행한다.
지배구조의 우등생으로 평가받는 화이자는 사외이사에게 보수의 절반을 주식으로 지급하는 걸로 유명하다. 이는 자사주 보유를 의무화해 사외이사가 기업가치 향상에 기여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삼성전자 주주총회에 참석한 참여연대 회원이 회사 측의 사외이사 선임 건에 반대하여 증거를 내보이고 있다(2001.3)
모든 이해관계자 고려하는 독일의 감독이사회
유럽은 단일이사회가 보편적이나 이원적 이사회를 의무화하고 있는 나라도 있다. 이원적 이사회란 감독이사회와 경영이사회로 양분된 것을 말하는데, 전자는 경영정책 결정 기능을 담당하며, 후자는 경영 집행을 담당한다.
미국식으로 바꿔 생각하면 경영이사회는 임원진에, 감독이사회는 이사회에 해당한다. 따라서 감독이사회는 사외이사로 구성된다. 주주의 권리를 최우선으로 하는 미국 이사회와 달리 독일의 감독이사회는 종업원과 고객, 경영진, 투자자 등 모든 이해관계자의 입장을 포괄적으로 고려한다. 독일의 대표적 기업인 BMW와 지멘스의 경우, 총 20명의 감독이사가 있는데 이 중 근로자 대표는 BMW가 9명, 지멘스가 7명이다. 또 다른 특징은 타사 경영이사회나 감독이사회의 이사가 감독이사회에 상당수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
BMW에는 상대적으로 은행출신 감독이사가 적다. 다만 전체 지분의 42%를 소유하고 있는 퀀트 가문의 가족들이 포함돼 있다. 이 때문에 경영이사회와 감독이사회는 다른 기업들보다 신뢰를 바탕으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감독이사회는 경영이사회에 대한 정기적인 자문기능과 감시기능을 맡는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결정이나 조치는 모두 감독이사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한편 노키아와 미쉐린은 유럽기업 중에서도 지배구조가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는 기업. 먼저 세계 최대의 휴대폰 생산업체인 핀란드의 노키아는 9명으로 구성된 이사회를 운영하고 있다. 이사회의 주요 역할은 전략 가이드라인의 확인, 정기적인 사업계획 승인, 주요투자 및 사업 철수조치 등을 결정하는 것이다. 세계적 타이어 회사인 프랑스의 미쉐린은 5명의 감독이사회를 두고 있다. 이 중 독립이사는 3명이며, 2명은 비독립 이사다. 감독이사회는 연 4회의 만남을 통해 경영이사회에 대한 감시와 전략 기능을 수행한다. 이를 통해 노키아나 미쉐린 모두 이사회의 기능이나 활동영역이 독일의 BMW, 지멘스보다 제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003년 7월 국내 기업중 최초로 '기업지배구조현장' 선포식을 가진 KT&G. 왼쪽부터 KT&G 노조위원장 전영길, 사외이사 대표 박종규, 사장 곽주영, 주주대표 정영배 씨
미국식, 일본식 놓고 고민하는 일본
일본에서는 2003년에 회사법이 개정돼 사외이사 제도가 공식 도입됐다. 그동안에는 이사회가 유명무실한 존재로 인식돼 온 것이 사실. 하지만 외국인 투자자들의 입김이 강화되면서 미국식 경영시스템을 도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세이유 백화점, 재팬텔레콤 등 일부 상장사들은 이미 미국식 이사회 제도를 도입했다. 미국식 이사회 도입을 추진중인 상장사들은 경영권과 감독권을 명확히 분리하는 한편, 사외이사진을 대폭 늘려 기업의 투명성을 끌어올린다는 방침이다. 이에 따라 신설되는 위원회의 구성원은 절반 이상이 사외이사로 채워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아직은 미국식 지배구조가 능사가 아니라는 비판적 시각이 우세하다. 이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실적이 좋은 회사는 일본형 이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사외이사 제도를 적극 도입했거나 미국식 지배구조를 지향한 기업은 모두 실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국식 지배구조의 단점으로 사외이사의 층이 얇아 철저한 감시와 적절한 조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적다는 것, 주가를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장기적 관점의 전략을 소홀히 한다는 것 등을 꼽는다. 한마디로 미국식 사외이사 제도가 일본의 경영풍토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외이사의 비율이 높은 UFJ홀딩스, 리소나홀딩스 등 대형은행과 히타치제작소, 도시바 등 종합전기메이커 등은 하나 같이 경영상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반면 마쓰시타와 도요타자동차는 경영과 현장이 괴리되지 않는 일본형 기업지배구조를 고수하는 기업이다. 마쓰시타는 사업 부문의 현장책임자를 이사회에 참여시킴으로써 경영감독과 집행의 절충형 이사회를 운영하고 있다. 이사회는 회장, 사장 등의 경영감독자와 회계, 노사 등의 실무책임자, 주력사업부문의 사업 책임자로 구성된다. 도요타는 사외이사를 단 한 명도 두지 않는 등 일본식 기업지배구조를 고수해 온 대표적 기업. 하지만 2003년 6월에 대대적인 이사회 개편을 단행, 이사회 규모를 대폭 축소하고 외부인사를 충원하기로 결정했다.

내부인사 중심의 한국 이사회 제도
우리나라에서 이사회 제도가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은 IMF 이후 많은 기업들이 부실의 주요인으로 낙후된 기업지배구조를 인식하면서부터다. 나아가 세계적으로 기업의 투명성이 대두되면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정부는 급기야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방안으로 98년 2월 사외이사 제도를 도입했다. 나아가 2003년 4월에는 사외이사가 과반수를 차지하는 경영감시위원회 설치도 가능해졌다. 사외이사의 자격에 있어서는 증권거래법상 10%(증권회사의 경우 1%) 이상 해당회사 주식보유가 금지돼 있다. 이에 따라 해당회사 주식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감시역할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등 구설수에 오르는 실정이다.
또 사외이사의 비중에 대한 부담 때문에 사내이사의 수를 줄이고 있어 중·장기적으로 경쟁력 제고와 관련된 이사회의 기능이 크게 약화될 우려를 안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사외이사 제도는 내부인사 중심의 이사회에 약간의 외부인사를 영입하는 정도로 실행되고 있다. 사외이사 제도를 도입하고 초기에는 긍정적인 면에 대해 많은 기대를 가졌던 것이 사실. 하지만 실제로는 경영에 대한 이사회의 견제기능을 크게 기대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이 제도가 도입되고 6년여가 지난 지금은 제도의 효과에 의문을 갖는 사람마저 많이 생겨났을 정도다.
2002년 8월, 영국의 정보조사기관인 EIU는 엔론 사태 1주년을 맞아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의 50대 기업 CEO를 대상으로 기업지배구조와 관련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 사외이사의 수를 늘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라는 의견이 도출됐다. 사외이사의 수가 많다고 해도 부정행위는 얼마든지 자행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CEO들은 대신 이의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 감사위원회의 권한 강화, 부외거래의 철저한 공시, 외부감사인의 정기 교체 등이 필요하다고 답변했다.

최종 부도 처리된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서 직원들이 힘없이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 모습(2000.11). 우리나라에서 이사회 제도가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은 IMF 이후 많은 기업들이 부실의 주요인으로 낙후된 기업지배구조를 인식하면서부터다.
사외이사 제도와 관련해 일본 ‘닛케이 비즈니스’의 조사결과도 우리에게 상당히 의미 있는 결론을 제시해 준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 증대이기 때문에 형식에 얽매인 제도는 중요하지 않다’며, 미국식 지배구조 도입에 신중히 접근할 것을 주문한 게 그것이다. 미국식인가, 일본식인가는 기업이 처한 환경에 따라 달라질 문제다. 다시 말해 기업지배구조는 국가 베이스가 아니라 기업 베이스로 선택돼야 한다는 결론인 셈이다.
그에 반해 우리 사회는 사외이사의 역할을 너무 과신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물론 기존의 이사회가 감시와 견제를 제대로 하지 못한 데서 오는 반작용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한 일본과 유럽은 물론, 가장 먼저 도입한 미국에서조차 사외이사 제도를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사외이사 제도를 급하게 도입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무리라는 비판도 있다. 선진국과 우리는 제반 환경에서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사외이사 제도가 갖는 또 다른 문제점은 경영자들의 기업가 정신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사회의 통제기능이 강화됨으로써 경제성장의 원동력인 기업가 정신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지적은 분명 되새겨봐야 할 점이다.
따라서 이사회 제도는 경영자가 장기 비전을 갖고 의욕적으로 투자할 수 있도록 기업가 정신을 함양하는 방향으로 운영될 필요가 있다. 이사회의 통제기능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서비스 기능이나 자원접근 기능을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 또 단순히 사외이사의 수를 늘리기보다는 능력 있고 독립적인 이사를 선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인력 풀이 제한돼 있는 우리나라에서 사외이사 제도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에는 아직도 많은 어려움이 산적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정리 강윤경 기자 | bookwor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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