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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도시로 거듭난 폐광촌

짧은 기간에 국제적 명성 얻어 고장 빛낸 자랑거리

폐광촌에서 영화의 명소로 탈바꿈한 일본 홋카이도 유바리 시. 인구 1만4천 명의 유바리 시는 당국과 시민의 사랑과 협조 속에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를 매년 개최해오고 있다.
외진 소도시에서 열리는 이 영화제가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문제 해결에 가장 빠른 길이 있고 거기에 시장 컨센서스가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 길을 택할 것이다.” 관료가 이 눈치 저 눈치 보다가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 부총리의 평소 지론이다. 그의‘해결사’로서의 명성은 외환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금융·기업 구조조정을 주도한 금감위원장 시절에 얻었다.


제5회 유바리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가 열린 일본 폐광촌 도시 유바리의 거리에 내걸린 영화 간판

누구든 한번 와본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일본 북부의 섬 홋카이도. 중심 도시 삿포로에서 기차로 1시간 30분을 가면 폐광촌 도시 유바리가 눈발 속에서 얼굴을 내민다. 짧은 15년 역사지만 세계 영화인들의 동경의 대상으로 성장한 유바리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가 열리는 곳. 관람객은 기껏 해봐야 종합대학 학생 수 정도인 3만 명밖에 안되지만 유바리 영화제는 아시아에서 인기 있는 영화제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번지르르한 휴양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최신 시설을 갖춘 대도시도 아니며 해발 1천700ｍ에 육박하는 고지대에 겨울 평균 적설량만 104㎝에 이르는 이 시골도시에서 열리는 영화제가 어떤 영화제에 못지않은 성공을 거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은 적게 5억 원, 많게는 10억 원 이상 국가의 지원을 받는 국제영화제가 네 군데서나 열리고 있고, 올해에는 대전이 새로 국제영화제의 이름을 달고 출범한다.

1년중 가장 빛나는 닷새
유바리의 하늘 관문인 신지토세 공항은 방송 카메라도, 시끌벅적한 환영 인파도 없었다. 정적을 깨고 본격적인 환영이 시작된 것은 뜻밖에도 유바리로 향하는 완행 열차의 첫 번째 역이었다.
마라톤 경기를 보러 나온 응원단처럼 아이들은 유바리 영화제의 로고가 새겨진 깃발을 흔들며 함성을 보내고 있었고 아저씨, 아줌마들은 꽃다발과 과자를 나눠주며 영화제 방문객의 마음을 한껏 부풀리고 있었다. 자기 고장의 이름을 알린다는 명분이나 지역 발전의 실리 따위는 없다. 으레 있을 법한 ‘바가지’ 요금은 영화제 기간에 찾아보기 쉽지 않았다. 사실 유바리 영화제는 이곳 시민에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곳에서 사진 찍기를 청하는 사람은 관광객이 아닌 지역 주민들이다. 카우보이 복장에 선글라스를 끼고 종착지인 유바리 역에서 환영인파에 섞여 있던 다시로 야스오(49) 씨는 “1년 내내 영화제를 기다렸다” 며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1년중 가장 빛나는 5일입니다. 배우든, 영화 팬이든, 감독이든 상관없습니다. 좋아하는 영화가 있고, 반가운 사람이 있는 축제니까요.”
자원 봉사자도 아닌 ‘응원단’ 명칭을 달고 있는 시민들은 포장마차에서 일하는 아줌마부터 주차를 돕는 청년, 눈 치우는 아저씨까지 영화제 기간 내내 여기 저기서 만날 수 있었다.

제 발로 찾아오는 손님들
관람객들의 60%는 조직위가 아니라 스스로 돈을 들여 영화제를 찾는다. 경쟁부문의 경우도 출품작 감독 외에는 배우나 프로듀서, 제작사 대표들까지 교통비와 숙박비를 자비로 지불한다.
“유바리라면 자기 돈으로라도 가고 싶어하는 영화인이 많습니다. 비용 부담이 돼도 영화제가 즐겁고 일과 연계되는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죠. 유바리 영화제의 가능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영화제 관계자의 말이다.
올해 한국 영화인으로는 경쟁부문인 영 컴피티션에 초청된 ‘목포는 항구다’의 김지훈 감독과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김지운 감독, 김도혜 부천영화제 프로그래머, 김홍준 부천영화제 집행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영화제의 주요 행사장이나 숙소, 식당가 등은 유바리 시민회관을 중심으로 한 200ｍ에 모여 있다.
숙박비는 인근 삿포로보다 오히려 저렴한 편. 1박 기준으로 호텔은 1만 엔 1만5천 엔 정도며 민박은 6~7천 엔, 학생 관객들을 위해 학교 체육관을 개조해 만든 숙소는 하루 4천 엔 정도에 제공된다.

영화제를 사랑하는 사람들
저녁 6시 30분, 개막식이 시작됐다. 장소는 시 문화스포츠센터. 이곳의 개막식이 한국 영화제의 그것과 다른 가장 큰 차이는 지루하게 계속되는 시 공무원이나 스폰서의 인사치레가 없다는 것이다. 대신 초청 감독들이나 배우, 심사위원, 해외 게스트 등 영화인의 소개가 그 자리를 채운다.
이 영화제를 15년간 키워오다가 지난해 10월 사망한 나카다 데쓰지 전 시장의 영화사랑 얘기를 하며 울먹이는 현 시장의 인사말이 끝난 뒤 “유바리 영화제 최고”를 외치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개막 축하 말이 담긴 영상물이 뒤를 이었다.
유바리 영화제가 갖는 장점 중 하나는 이 영화제를 지지하는 해외 영화인이 유난히 많다는 것. 타란티노 감독은 1993년 ‘저수지의 개들’로 이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해 세계에 알려졌고, 10년 후인 지난해 자신의 영화 ‘킬빌’에 ‘고고 유바리’란 캐릭터를 집어넣으면서 영화제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유바리는 정체해 있던 내 마음을 씻겨줬다”고 말하는 대만 감독 허우샤오시엔은 ‘밀레니엄 맘보’ 에서 영화의 도입부인 긴 터널을 지나가는 수치(舒淇)의 모습과 엔딩 장면의 눈 내리는 거리를 모두 유바리에서 촬영했다.
영화제 소개 팸플릿은 이밖에 ‘폰 부스’의 조엘 슈마허, 스탠피 큐브릭 감독의 프로듀서 얀 할랜,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로버트 와이즈, 배우 존 보이트 등 스타들의 유바리 사랑을 자랑하고 있었다.


제15회 유바리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가 열린 일본 폐광촌 도시 유바리의 시내

인구ㆍ예산 줄어도 관객은 늘어
개막식장 주변에서 관객을 반기는 것은 ‘어서 오십시오’라는 문구가 적힌 투박한 눈사람. 유명 조각가의 작품이 아니라 조악하게 만들어진 눈사람이지만 타지에서 온 손님들을 반갑게 맞는 소박함이 그대로 묻어 나온다.
지금의 유바리 영화제를 만든 것은 돈이 아니었다. 영화제 출범 당시 12만4천 명이던 인구는 15년 뒤 1만4천 명으로 줄었고, 가장 많을 때 1억7천만 엔이었던 예산은 올해의 경우 7천만 엔(약 7억7천만 원) 으로 줄어들었다. 반면 영화제를 찾는 관객의 수는 점점 늘고 있다. 약 8천 명으로 시작했던 관객 규모는 해마다 꾸준히 증가해 올해는 3만 명을 넘어섰다.
예산 7천만 엔은 타 지역의 영화제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 60억 엔 규모의 방콕 영화제에 비해 8분의 1 정도인 셈이다. 국가 지원금도 1천600만 엔밖에 안된다.
한국의 경우 예산은 15억 원(광주)에서 37억원(부산)에 달하며 이 중 광주영화제와 전주영화제는 국가에서 각각 5억 원을 지원받는다.
“성공하는 영화제를 만드는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강조하는 고마쓰자와 요이치 집행위원장의 말이 인상적이다.

한국영화제에 대한 뜨거운 관심
올해 유바리에서 상영된 영화는 공식 초청작 12편을 포함해 모두 84편. 이 중 개막작 ‘큐티 하니’와 태국 영화 ‘라스트 라이프 인 더 유니버스’(펜엑 라타나루앙)와 ‘옹박’(프라차야 핀케오), 일본 영화 ‘치루소쿠의 여름’, 영국 영화 ‘아메리칸 스플렌더’(샤리 스프링어 버만, 로버트 풀치니), 그리고 한국의 ‘목포는 항구다’(김지훈), ‘장화 홍련(김지운) 등이 많은 관심을 끌었다.
개막작 ‘큐티 하니’는 70년대 만화로 만들어져 인기를 모은 동명 원작을 실사영화로 옮겼다. 만화 ‘큐티 하니’는 우리에게는 ‘마징가 Z’로 알려진 나가이 고의 작품. 여자 주인공의 섹시함이 강조되고 의상 변신을 통해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등 이후 비슷한 작품의 원형이 됐다.
게다가 감독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안노 히데아키 감독. 최고의 원작을 가장 주목받는 애니메이션 감독이 만든 실사영화이니 현지 반응은 폭발적일 수밖에 없다. 강한 모습의 여주인공 캐릭터가 여주인공 에리코 사토를 통해 바보스러워졌다는 악평도 있었지만 안노 감독 특유의 철학적 깊이가 신선한 화면과 함께 보여졌다는 호평이 우세했다.
최근 일본에서 높아진 관심을 반영하듯이 한국 영화는 상영작 모두 매진되며 좋은 평가를 이끌어냈다. 김지훈 감독의 ‘목포는 항구다’는 경쟁 부문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올해 영화제의 ‘승자’. 한국에서 구해온 영화의 한글 전단을 끄집어내며 감독에게 사인을 요구하는 한국 영화 마니아에서 처음 한국영화를 접한다는 일반 관객까지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장화 홍련’도 김 감독의 높은 지명도를 바탕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만나고 싶은 감독은 어디서나 만나
영화 상영 시설이 집중된 영화의 거리에 있는 음식점은 서른 곳이 채 안 되며 게스트들이 묵는 호텔은 단 두 곳뿐.
유바리 영화제의 가장 큰 매력은 원하는 게스트를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는 데 있다. 영화 상영이 끝난 밤 시간 주점에는 삼삼오오 스타들이 함께 하는 술판이 벌어지고 자원봉사자, 시민, 관객 등 원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이는 유바리 같은 작은 영화제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 스타와 팬, 게스트와 관객 사이의 기준은 모호해지고 영화인들은 영화에 대한 열정을 되살릴 수 있으며 팬들은 영화의 호평과 혹평을 쏟아놓는다.

유바리는 신이 눈 뿌리는 장소
영화제가 후반부로 치달은 3일째. 밤새 흩날렸던 눈은 유바리 영화제를 가장 유바리스럽게 만들었다. ‘신이 눈을 뿌리는 곳’이라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찬사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하얀 눈의 연인’. 이는 이 지역에서 유명한 과자의 이름이지만 이만큼 유바리 영화제를 잘 표현하는 말도 없다.
“누구든 한번 와본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는 한 자원봉사자의 말은 유바리 영화제가 영화제 이전에 매력적인 축제이기 때문에 빈말이 아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은 ‘포화 상태’에 이른 우리 영화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개성 없는 미인이 사랑을 받을 수 없듯이 겉보기는 번지르르해도 매력이 없는 영화제는 영화팬의 마음을 빼앗지 못한다.”

김병규 여론매체부 기자 | bk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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