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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속 녀

윤청은 파랗게 질렸다. 사람이 하는 짓이라니! 정말로 왜 이런 세상을 살아야만 하는 걸까? 이름만 듣던 그 사시미 칼이라는 것을 보는 순간, 아뜩한 느낌은 세상의 온갖 것이 다 싫어질 듯한 느낌이었다. 김기섭 원장이 연민이 담긴 눈길로 우두커니 그녀를 보았다.
“이 이상의 증거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어쨌거나 실재의 상황이었다. 또 다른 경고의 장이었고 경각심을 다지기에도 충분했다. 흰 가운을 입은 김기섭 원장의 사범 네 명이 들것을 정리했다. 머리 모양새만 영락없는 차승조인 채 이마 언저리까지 시트에 덮인 모형은 아침까지 정육점에 걸려있던, 어느 암소의 갈비언저리로 가슴 언저리만 살 덩이었다.
“지금쯤 저들은 성공을 자축하고 있겠지요.”
착안을 했던 김기섭 원장의 눈에 핏발이 서 있었지만 입가에는 통쾌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넌 2백 년은 살겠구나.”
차승조는 고개를 반쯤 들어 또 하나의 죽어 있는 자신을, 상징성이 짙은 고기 덩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 생각엔 어쩌면 좋겠니? 어디까지나 본인과 관계되는 일이니까 네 의견을 먼저 들어야겠다.”
“공연히 해보시는 말씀이죠? 제 생각을 아실 텐데요.”
“그래. 이런 걸로 증거 삼을 너는 아니니까.”
윤청을 돌아다보며 김기섭 원장이 물었다.
“그럼, 부회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제 생각도 차승조 씨와 같아요. 복수든 징벌이든 비열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는 쪽이라면 뭐든 찬성이에요. 물론 지금은 아니고.”

* * *

박희주의 안색이 삽시에 확 달라졌다. 그는 원래 시끄럽게 추적해 오는 것보다 조용한 것에 늘 불안감을 느끼는 편이었다. 폭풍전야의 불길함은 뇌리를 짓누르는 스트레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말이야. 분명히 엠브런스가 연희동을 진입하는 걸 보고나서 돌아 나왔다고 했잖나! 응?”
그는 말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필이면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예, 형님! 아직 아무런 소식을 접한 게 없습니다만…….”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벼락을 치는 듯한 박희남 회장의 호통이 전화통에 울렸다.
“너 계속해서 신수작을 늘어놓고 있는데 말이야! 이제 아주 끝장을 보고 싶은 거냐?!” 박희주의 몰골은 마치 걷어 채인 강아지 꼴이었다. 앞으로도 형이 얼마나 심하게 굴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아주 끝장을 보고 싶은가고? 친척들을 푸대접하는 거야 형이 늘 자행했던 일상사였다. 정신이 들자 그는 북북 이가 갈렸다. 그동안 침전물처럼 가라앉아 있던 감정이 문득 복받치려고 했다.
언제든 형은 저만 알았다. 사람을 무시할 때보면 만정이 떨어졌다. 아니,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 터에 이제라도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어쨌거나 형 탓이었다. 실은 한때 대명그룹에 몸담았던 것도 형을 골탕 먹일 생각에서였다. 단 한번에 박살낼 궁리를 하던 차였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재계에서 승승장구하면서 혼자서만 너무 거들먹거리는 꼴도 미웠다. 남보다 인척이 훨씬 멀고도 가증스러운 존재일 수 있다는 걸 웅변적으로 보여주던 인사였다.
복도를 어슬렁거리며 모종의 결심을 굳히기까지 박희주에게 필요했던 시간은 불과 3분도 되지 않았다. 한 찰나의 충동적인 것은 아니라 해도 어쨌거나 불현 듯 머리를 스쳤다. 밀고를 할 수도 있었다. 그의 비리를 몽땅 까발리지 않아도 단 두 가지만 아니, 한 가지만 결정적인 것, 그의 두 무릎을 몽땅 꺾어 놓을 수 있는 아킬레스 건 하나면 충분할 것이고 그 증거는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
‘차승조의 건? 아니지. 세종대왕의 귀걸이가 더 강도가 높은 지진이 될 걸? 진도 8.7의 초유의 강진…….’
생각만으로도 속이 다 후련했다.
형이 좀 가만히만 있었던들 차라리 그는 대명그룹에 그냥 몸담아 있었을 지도 몰랐다. 대명그룹에서 쫓겨난 것도 형이 무리하게 요구했던 탓이었다.
“대명그룹에서 네가 결정적인 거 하나만 가져와 봐라. 당장에 부회장을 시켜줄 테니.”
형은 그렇게 말했었다. 가져올 것이 없으면 보쌈 같은 거 하나만 씌우도록 하라고. 말하자면 약점을 만들어 주라는 것이다. 꼼짝할 수 없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그것을 위해 참 무던히도 애를 썼건만. 그러나 오한수 회장은 비자금 문제에서만은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그가 옳았다. 결국은 함정이었다. 우선은 윤활유를 뿌린 듯 순조롭게 나갈 수 있다고 한들, 어차피 불 섶에서 화약놀이를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겠는가? 저네끼리 짜고 놀다가 돌아서서 찌르는 게 인간의 생리인 걸. 찌르고 고발하고……. 증거 들이대고 스스로 증언대에 오르고. 결국, 함께 망해가리란 걸 모르고 발뺌을 위해 검찰에는 농도 짙은 아양을 떠는 것이다. 검사가 어떤 사람들인가?
작부가 졸부 주머니에서 돈을 욹어 내듯, 화류계 인생 뺨치게 얼렀다 눙쳤다 잘도 뽑아내는 사람들 아닌가? 오한수 회장은 어떻게 그런 걸 다 터득하고 있었던 거지?
그는 다시 미칠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미 구경그룹의 ‘적대적 M&A 시도 참패’란 제목으로 신문지면에 보도된 이래 대명그룹 인수는 거의 물 건너간 얘기가 되고 있다. 오히려 먹히지 않기 위해 자구책을 강구하고 있는 마당이다. 너무 만만하게 봤던 데서 오는 참패는 불똥을 피워 올리며 이제 자신의 머리 위에도 쏟아져 내릴 기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형이 오죽하겠는가?
어쨌든, 혼자서만 망하지 않겠다는 그의 결심이 낳은 결과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것일 텐데도 그는 이미 자신이 아랑곳할 처지가 아니란 걸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 맞다. 둘 다 나쁜 놈인 건 사실이고,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엔 내가 하지 못할 일이 어디 있어?’
섣부른 밀고 따위에 형은 왼눈 하나 깜짝할 위인이 아니다. 오히려 금방 알아챌 것이다. 그렇게 밀고했다 들통이라도 나면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격으로 그 재앙은 상상키가 어려울 것은 뻔했다. 그는 금방 범인을 잡아내는데 그칠 것이고. 그때의 형이 자행할 짓거리에 비하면 요즘 형이 보내오는 칼날 같은 눈초리는 그저 솜사탕에 버금할 뿐이다.
그는 또다시 형이 복용하는 삼장약이 머리에 떠오르자 몸서리를 쳤다. 인간의 탈을 쓰고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매우 좋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 * *

레빈스키를 바라보며 장학출은 그러나 흐뭇하게 웃었다. 어쨌든 그는 윤청 부회장을 숭배하는 유일한 유럽 인이었다. 자칫하면 푸른 눈의 강력한 라이벌이 될 소지도 엿보였다. 또 한 사람의 라이벌. 그런데 그는 매우 신랄한 한마디를 하고 있었다.
“난 당신들을 알 수가 없어요. 나로선 매우 외람된 말이지만 당신네 나라 사람들은 눈앞에 닥치고 있는 위기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려 하질 않아요. 지구가 지금, 너희들 때문에 내가 자살을 해야겠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정도는 아예 외면해 버린 채고 위정자들은 어떻게 국민을 유도해서 미래의 위기에 대처해야 하는가 경각심을 갖도록 할 생각은 없이 자기들 당리당략 적 정쟁에만 급급해 있는 것 같고 말에요.”
“있는 것 같은 게 아니라 그대로죠.”
물론 레빈스키의 말 속에는 다소 황당한 환상이 섞여있다고 치부할 수는 있겠지만, 그 이면에는 대단한 권위가 느껴질 정도로 진실의 울림을 담고 있었다. 사실 모든 것이 그랬다. 지식마저 업압 당하고 있는 집단이기주의의 팽창 역시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하는 문제인 것도 그랬다. 그가 어김없이 말을 잇고 있었다.
“보니까 산업 폐기물에 관한 온갖 지침을 다 나열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겨우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은 것 같아요. 아직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당신들 땅은 이미 한계를 넘고 있어요. 그런데도 집단 이기주의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허덕이고. 마땅한 땅을 찾지도 못하면서 눈을 돌리지 않는 이유가 뭔지를 모르겠어요. 러시아의 시베리아에는 원자력 폐기물까지도 저장할 수 있는 곳이 많은데 말에요.”
“물류비 때문이지요. 지금 당장 유라시아 횡단 철도가 개통이 된다 해도 물류비 문제는 결코 만만치 않을 것 아닌가요?”
“오, 미스터 장!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협상하기에 따라 방법이야 많지요. 아직 그걸 모르세요? 세계에서 가장 큰 호수인 바이칼 호수가 오염되어 죽어가고 있다고만 알지 그 물을 정화시켜 끌어다 쓰면 앞으로는 바이칼 호수에서 여기까지 물을 길어 나르는 게 제주도에서 서울까지보다 싸다는 걸?”
장학출은 멍한 눈길로 그를 봤다. 그는 작심을 하고 윤청 부회장에게 협조하기로, 대명그룹을 돕기로결심을 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 등등의 사업을 주선하고 전담하고 싶은 건가요?”
“아뇨. 어디까지나 그렇다는 얘기죠. 하지만 당신네 바이스 체어맨을 위해서라도 이번에 꼭 건의해 볼만한 사업이 있어요. 자세한 것은 나중에 말하겠지만, 미래의 프론 티어 사업으로 미생물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라는 얘길 해드리고 싶어요. 모스코대학의 미생물학 교수가 한 명 있는데 이번에 만나서 얘길 나누고 왔지요.”
“지금 미생물에 관한 프로젝트를 거론하고 있는 겁니까?”
“그렇죠. 지금 곧 대기업의 미래 프론티어 사업으로 미생물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갖으라는 얘길 하고 싶어요.”
장학출은 밝게 웃었다. 레빈스키는 점점 더 마음에 들고 있다.
“당신은 우리가 지금 그 사업을 구상 중에 있다는 걸 알고 말하는 것 같으니 왠일이지요? 그 엘레나 콘드라티바 교수를 우리 회사에서 초빙해 오는데 문제는 없겠지요?”
“물론이죠.”
“됐어요. 타이밍이 절묘한데요!”
“오, 그 정도인가요?”
장학출은 물끄러미 레빈스키를 보았다. 연적으로 그는 만만찮은 적수이긴 했지만 머리 속에서는 계산기가 뚝딱거리고 있었다.
장학출이 남형준과 함께 레빈스키의 제안에 대해 보고하기 위해 연희동에 도착했을 때 김기섭 원장도 방문해 있었다. 곧 김겅진 박사도 방문할 예정이었다. 윤청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마닐라 봉투를 끌어당기고 안에서 몇 장인가 사진들을 꺼내어 놓았다.
“보시고 너무 놀라지 마세요. 당장에 고발을 하실 생각도 하지 마시고요. 지금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일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으니까요.”
“이게 뭡니까?”
“아니, 이건……?!”
둘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듯이 가까이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길은 유독 한 군데만 못 박혀 있다시피 했고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는 것은 들것에 누어있는 누군가의 가슴 언저리에 기다랗게 꽂혀있는 칼이었다.
“자신들의 아킬레스건을 쥐고 있다 해서 기어이 차승조 씨를 해치려고 했던 거예요.”
장학출 사장은 조바심이 이는 눈길로 윤청을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큰 실수를 한 거지요. 결정적인 실수 말에요. 덕분에 우린 빨리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됐으니까 오히려 덕을 본 셈이죠. 어쨌든 이번에 저들은 지구 밖으로 아주 몰아내야할 만큼 부도덕한 폭력배인 것이 입증이 된 거라고 봐야 해요. 하지만 난, 우선 차승조 씨의 다리를 온전하게 되살려 내는 방법부터 강구해 놓고 봐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를 온전히 만들어 놓는다는 건 우리 대명그룹으로서는 여러 면에서 구경그룹을 이기는 길이 될 테니까요.”
장학출과 남형준은 충분히 그녀를 이해했다. 생각할수록 차승조의 등장은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아까 부회장님께서 우리 일에 지장이 있으니 당장에 고발을 하지 말자고 하셨지만 유력한 증인이 우리 편에 있는 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차승조 씨의 한 마디면 모든 게 끝장나고 말 텐데요.”
장학출 사장은 말을 끝내고 시종일관 조용하기만한 김기섭 원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많은 것을 눈으로 묻고 있었다.
“바로 그 한 마디를 승조가 하지 않을 거라는데 문제가 있는 거지요. 장 사장님께나 남 박사님께, 그리고 윤 부회장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그 이상의 일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종류가 다른 보은의 방법을 찾는 것과는 별개라고 봐야 합니다. 저들도 승조의 그런 면을 알고 있을 겁니다. 어떤 경우에도 승조는 밀고 따위를 하지 않을 거라는 점을 말입니다.”
김기섭 원장의 말이었다. 장학출 사장의 얼굴 위로 부인할 수 없는 경탄의 표정이 떠올랐고 마침내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차승조 씨가 무작정 입을 다물겠다는 뜻은 아닐 거리고 봅니다.”
“물론입니다. 합법적인 상황에서 정당하게 진술하게 되는 경우라는 게 있을 것입니다.”
김성진 박사는 약속했던 시간을 한 시간 반이나 넘게 도착했다. 그는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허둥거리듯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에는 피로의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기자들이 왔었어요. 아니, 가짜기자들인 것이 틀림이 없었어요. 처음엔 차군에 대해 꼬치꼬치 묻다가 신분증을 보여 달라니까 슬슬 꽁무니를 빼더니 그냥 사라져 버리더라구요.”
김 박사는 김하일 비서가 가져다 놓은 생수 한 컵을 다 비우고 나서 말을 이었다.
“세상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아직도 기자를 사칭하고 찾아드는 무리가 있으니, 원! 처음에는 깜빡 속을 뻔 했는데 질문 각도가 좀 이상하더라구요. 글쎄, 살아서 퇴원을 했는가, 아니면 죽어서 나갔는가, 그렇게 묻질 않겠어요?”
“네에?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장학출 사장이 놀라 반문했다.
“내가 무슨 질문이 그러냐고 내가 물으니까, 조기퇴원 이유가 뭔지 말해달라고 말을 바꾸더군요. 윤청 부회장이 차군을 어디서 데려왔고 어떤 관계냐고 묻기에 내가 그제야 어느 신문사에서 왔는가고, 기자증을 좀 보여줄 수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어름어름 일어서서 가 버렸어요. 그런데 여길 올려고 지하 주차장을 떠나면서 보니까 틀림없이 날 누가 따르고 있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집으로 갔다가 다시 나와서 이리로 온 거예요.”
천창이 있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후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나서 이런저런 얘기 끝에 곧 구수회의에 들어갔다. 스태판 레빈스키가 제안하는 미생물 프로젝트에 대해 김성진 박사의 반응은 대단히 긍정적인 것이었다.
“모스크바 대학의 엘레나 콘드라티바 교수라면 나도 좀 알고 있어요.”
김성진 박사는 상당히 흥겨워하며 말했다.
“하여간 나쁘지 않아요. 인터페론이나 성장호르몬 등 생체에 유용한 물질을 미생물로부터 생산하고 있는 건 알 거예요. 유전자의 일부를 잘라내어 박테리아에 넣어주면 그 유전자가 발현시키는 단백질이 만들어 지는데 대장균의 경우 그 성장속도가 매우 빨라 두 배로 증식하는데 약20분이 걸릴 정도지요. 대량으로 원하는 물질을 생산할 수 있다는 면에서 이번에 차군의 다리를 수술하는 데 있어 우리에겐 글자 그대로 적시적출이 되는 셈이지요”
김성진 박사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미생물 분야의 활성화는 정부가 앞장서서 좀더 적극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했는데, 민간기업인 대명그룹에서 단호한 시발이 이루어지게 됐으니 상당한 거죠.”
장학출 사장은 조급한 마음을 억누르기가 어려운 듯했다. 그는 자제하면서도 기어이 자신이 얻고 싶은 바를 말했다.
“우리나라 의학계에도 대단한 서광이 비쳐지게 되는 건 물론이고 아마 세계적으로 우리 의학계의 발전적 성향은 엄청나게 각광을 받게 되겠지요? 기업 차원에서도 이번의 성공 그 자체가 미래를 위해 가장 보람 있는 일이 될 테고요. 다시 말해서 황금 알을 낳는 산업이라고 할 수가 있는 거겠지요?”
“장 사장은 뼈 속까지 기업인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 게 이런 데서도 드러나고 있는데 오 회장을 그대로 닮았구만요!”
모두들 한 차례 웃고나서 남형준이 깊이 심취해 들어가는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박사님. 차군의 다리에 기계를 삽입시킨다고 말씀 하셨는데 설마 사이보그(기계인간)와는 개념이 물론 다르겠지요?”
“남 박사다운 질문인데, 절대로 이번 일에 묵시록적 성격의 우려감을 지닐 필요는 없어요. 사이보그 세상이 열리는 건 나도 반대니까.”
그는 선명하고도 밝은 표정을 얼굴에 떠올리며 말했다.
“진찰도 기계로만, 그리고 치료도 기계로만 하는 게 미국에서도 점차 회의적인 견해를 넓혀가는 마당이지요. 그래서 전인의학으로 대체의학의 연구가 더 활발해지고 있는 셈이지요. 하지만 차군의 경우는 또 다른 측면에서 한 분야를 이룰 수가 있을 거예요. 이번에 윤 부회장 덕택으로 차군과 같은 환자를 발견하게 된 것부터가 우리로서는 커다란 행운이라고 할 수 있지요. 차군의 상태가 임상실험에 적절한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는 데다 새로운 분야의 개척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된 것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꿈만 같아요. 어쨌든 나는 이번의 성공 그 자체가 진일보한 과학의 한 발견이 될 거라고 봐요. 놀라운 대 발견 말에요.”
장학출 사장은 자신조차도 어이없다는 듯한, 그러나 곧 웃음이 터질 듯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 일이 성공을 해서 대명그룹의 위상이 더 높아지게 되면 그 덕은 순전히 구경그룹 때문이 아닙니까? 차군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우리에게 보내줬으니 말입니다.”
그는 차마 임상실험용으로 차승조를 얻게 됐다는 말은 할 수 없는 듯했다. 그는 곧 바꾸어 말했다.
“우리가 차군을 통해 생명공학의 새로운 미래를 열게 된 걸 저 사람들이 알면 땅을 치고 통곡을 하겠는데 말에요!”
“아직은 극비사항이니까 저들이 알리는 없을 거예요. 김 원장님께서 우연히 뒷골목을 답사하시다가 팔려고 내놓은 집을 한 채 발견하셨나 봐요. 바로 이 집 뒤쪽에 축대로 연결되어 있는 집이예요.”
그녀는 구조가 그려져 있는 도면 하나를 내어 놓았다.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연구실과 수술실, 그리고 거실을 개조해 회의실로 만들면 상당히 쓸모가 있을 것 같아 이미 주택의 명도를 끝냈어요. 그리고 개조공사는 내일부터 시작하기로 했고요.”
“호오! 벌써 그렇게 됐습니까? 빠르군요!”
남형준의 말에 윤청은 웃으며 김기섭 원장을 가리켰다.
“저 김 원장님 대단하신 분예요. 몇 년 살면서도 이 집 뒷골목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는데 보안을 위해 한번 돌아보셨나 봐요. 요 뒷집이 바로 작은 연쇄점을 하고 있던 곳이래요. 여기와 번지수가 아주 달라요. 뒷골목으로 나가면 완전히 동네가 다른 큰 차도예요. 저 김 박사님께서 드나드시기에 안성마춤인 것이 미로처럼 연결된 골목 안에 무려 세 군데나 의학협회와 관련 있는 건물도 있고 말에요.”

* * *

연희동의 회의실을 다시 개방해서 정기적인 회의를 개최하기까지는 표면상으로 장학출과 남형준의 공로가 컸다. 임원들 전체가 그것을 인정했고 사기가 높아졌다. 적어도 회의만은 그룹 부회장과 함께 주기적으로 갖게 될 거라는 것은 완전한 대명그룹 체제의 정상회복을 의미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오늘의 회의 안건은 서의개발이 위치한 지역적인 특성을 살려 미생물 전진기지를 그쪽에 창설하는 문제를 놓고 임원들의 의견수렴이 그 첫 번째였다. 서의개발의 활성화가 목적이 아닌, 어디까지나 대명그룹의 제2창업에 크게 이바지하게 될 계열사로서의 역할에 대해 다지고 들어가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있었다.
“생명공학은 돌아가신 회장님께서 이미 그 기초를 다져놓으신 바가 있습니다. 이번에 미생물 분야의 신규 사업이 어렵지 않게 그 시발을 다질 수 있는 계기도 그때 이미 싻 트고 있던 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제반 과정에 대해서는 이 파일에 상세히 기록이 되어 있고 장학출 사장님께서 보충 설명은 추후 또 해드릴 겁니다. 미생물 분야의 사업이 상당히 호조를 보일 것은 이미 검토가 끝난 상태입니다. 수질오염을 해결해주는 호기성 미생물에서부터 의학에 이용되는 미생물로 환경문제와 미생물과의 연관은 파일에 나와 있는 대롭니다.”
윤청은 말을 끊고 김경자 실장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이번 미생물학 연구실 개설은 김경자 실장이 팀장을 맡기로 했고 계열사들 간의 돈독한 유대를 위해서도 김 실장이 앞으로 상당히 수고를 해야 할 겁니다. 얼마 후면 러시아에서 모스코대학의 미생물학 교수인 엘레나 콘드라티바라는 박사님 한 분이 오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 장학출 사장님과 김 실장이 그분을 마중 나가셔야 할 겁니다. 그분에게 불편하신 점이 없도록 온갖 배려를 다해 주셔야겠습니다. 아마 다음 주쯤이 될 겁니다.”
김경자 실장의 눈길이 재빨리 장학출 사장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지만 윤청은 모른 척 회의의 종료를 알리는 제스처를 해보였다. 장학출 사장과 김경자 실장을 한 팀으로 아니, 그들을 한 짝으로 묶어 놓으려는 그녀의 복안은 이미 실천에 옮겨지고 있는 셈이었다. 가슴에 쓸쓸한 바람이 일고 있었지만 마음은 홀가분했다.

* * *

불구의 차승조. 27세. 장학출은 조심해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쪽 다리를 잃어 육신의 기능이 마비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나이였다. 그러나 육신이 온전한 누구보다 그는 반뜻해 보였다.
장학출 사장이 보기에도 차승조는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비굴한 추종의 표정을 애초부터 짓지 않았다. 이미 알만큼 알고 있었지만 거듭 유의해 보아도 그는 조용했고 차분했다. 그는 조용히, 아주 조용히 미래를 말했다.
“저들은 법정에 서게 될 것입니다. 증거는 그 때 가서 제시하겠습니다. 지금은 그 정도의 약점을 이용해서 나설 정도로 대명그룹이 위급한 상황은 아니지 않습니까?”
비유가 아니고 건의에 가까운, 매우 솔직한 질문이었다.
“절대로 아니지. 그러나 자네를 이 지경으로 만든 부분에 대해서는 대명그룹에서 응징을 시작할 수도 있다는 얘기야. 겸하여 윤 부회장님 말씀처럼 저들을 지구 밖으로 몰아낼 수도 있고 말이야.”
차승조는 언뜻 놀라 바라보다가 이윽고 씩 웃었다. 칼날 따위를 숨긴 듯한 웃음이 아니고 아주 기꺼운 듯한 웃음이었다. 그는 장학출 사장을 신뢰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존경심을 품게도 된 듯 했다.
“지구 밖으로 몰아내기 전에 빚을 받겠습니다. 전 누굴 길게 증오하는 것은 싫습니다. 그건 자신을 불편한 곳에 가두는 감옥일 수도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살아 있는 동안 가슴 속에 증오가 남아서 꿈틀거리게 하지 않도록 꼭 빚을 받아 내겠습니다.”
장학출은 물끄러미 차승조를 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청년이었다.
“머지않았네. 그리고 또한 자네의 신체에서 전천후의 기능이 활동을 시작하는 날도. 그때는 언제든지 자네가 하고싶은 대로 할 수 있도록 날짜를 잡게나.”
“제 기분을 이해해 주시는군요, 사장님. 감사합니다.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내게 은혜랄 게 있나. 다 윤청 부회장님께서 해 오신 일인데. 자넨 그분께 은혜를 갚기 위해서도 우리 대명그룹의 으뜸인 글로벌 인재가 돼야 하내. 어디나 필요하겠지만 우리 그룹에선 무엇보다 자네 같은 인재가 필요하니까 말일세.”
차승조는 잠시 말이 없었다.
“왜, 그 점에 대해 의심이 가는가?”
“아닙니다.”
“그럼 뭔가?”
“부회장님께서 그룹 총수의 자리를 고사하시는 이유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 바로 짚었군. 자네 같은 인재가 특별히 필요한 것과도 연관이 있는 일이지. 부회장님은 오한수 회장님의 2세가 성장할 때까지 조용히 제2선에서 그룹을 관장하실 생각을 갖고 계시지. 그 때는 더 자네의 역할이 많아질 거야, 아마. 그래서 우리도 더 미래를 위해 조용하게 실무에 충실할 인재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걸세. 이번에 새로 취임하신 새 총수님도 자넬 좋아 하고 계셔.”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여전히 생각해보는 듯한 얼굴로 차승조가 입을 열었다.
“정말 전 행운압니다. 여러분께서 모두 그토록 훌륭하신 인품을 지니고 계시다니 놀랍습니다. 어떻게 그토록 한결같이 좋으신 분들로 모여 계시나 하고요.”
“오한수 회장님 때처럼 윗물이 맑았기 때문이야. 그걸 지금도 절대적인 표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것이 바로 현대의 기업이 갖춰야할 조건이고 덕목이 아니겠나? 오한수 회장이 생존해 계셨을 때 자네가 들어 왔어야 하는데 말이야.”
그랬다면 더 큰 비극은 막았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장학출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시렵니까?”
“아니야. 연구실에 들러 남 박사를 좀 보고 갈 생각이야.”
장학출은 차승조의 방을 나와 지하실로 가는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스톡’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남형준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떠올리며 장학출 사장을 맞았다.
“언제 오셨어요, 형님?”
“차군한테 들렸다 바로 내려왔지.”
남형준 박사의 얼굴은 며칠 동안 면도도 하지 않아 덥수룩했지만 활기가 넘쳐 보였다. 회사에서는 그가 풀로 텍스 지사의 엔엘엔시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외국 여행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수고가 많네, 남 박사.”
평일인데도 연구실은 만원이었다. 디데이가 임박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박사들 네 명이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세 개의 방은 벽마다 유리창이 끼어 있는 바람에 옆에 난 도아들 때문에도 하나로 통해있긴 하지만 용도는 각각이었다. 어느 한 군데 외부인의 출입 금지라는 팻말은 필요치 않았다. 외부인이라면 단 세 사람, 윤청 부회장과 장학출 사장과 김기섭 원장이 드나들 뿐이었다. 그 역시 거실 입구의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남형준을 잠깐씩 만나고 나가는 것이 고작이다.
“잘 돼 가나?”
“네. 이따가 김 박사님이 오시면 수술 날자가 잡혀질 거예요.”
“뭐? 벌써 그 정도로 진행이 됐단 말야?”
장학출은 말하면서 고개를 길게 빼어 연구실 쪽을 바라보았다.
“진행 정도가 아니고 완성이죠. 김 박사님께서 오늘 한서 보장구 회사를 들러 오시기로 되어 있어요. 모래쯤이면 형님께 뭘 보여드릴 수가 있을 거예요.”
“그럼 보장구 회사와 합작을 시도하는 셈인가?”
“그렇진 않아요. 부품이나 소재는 박사님께서 창안하신 거고, 단지 접합 원리를 좀 확인하시려는 것 같았어요.”
“제거해 냈던 근육을 부품으로 채우는 거야 그렇다 치고 신경 봉합이 원만히 이루어질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혈류를 지속적으로 공급 내지는 순환시킬 수 있는 모세혈관을 잇는 일이예요.”
“모세혈관이라면 소동맥과 소정맥을 연결하는 그물 모양의 가는 혈관 말인가?”
“형님께서도 어지간히 생체 연구를 하신 분처럼 아시는 게 많은 데 웬일이시죠?”
“그게 우리의 운명이 아닐까? 우리에겐 무엇보다 두루 알아야 하는 게 많다는 거 말이야.”
두 사람은 호탕하게 웃고 나서 남형준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모세혈관의 굵기를 쉽게 말하면 매우 가는 것은 적혈구 한 개가 겨우 통과할 정도니까 어느 정도겠습니까? 그걸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이어내는 것인데 이번 수술에서 난이도가 가장 높은 것 이기도 하지요.”
“그렇겠구만…….”
“생체는 알면 알수록 신비하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하게 됐어요 해부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신의 오묘한 능력을 더 많이 믿기 때문에 독실한 신자가 더 많은 것과 같아요.”
그는 절레절레 머리를 저으면서 깊이 심취해 들어가는 어조로 말했다.
“지금 한참 연구 중인 것이 신경세포를 되살려 내는 것과 병행해서 혈류공급을 원활히 하기 위한 모세혈관의 재생 작업이예요.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하기 때문에 저기 계신 박사님들이 요즘은 밤을 새우고 계시죠. 그보다 저는 며칠 후 날아갔다 날아 와야할 일이 있어요. 오늘 김 박사님께서 가져오실 전자 부품을 확인하고 나면 날짜가 정해지겠지요.”
장학출 사장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몸을 일으켰다.
“어제저녁 뉴스에 대명그룹이 기존대주주의 경영권 방어 장치는 선진국 수준이라고 보도가 되는 걸 들었는데 구경그룹이 가슴을 치겠더군요.”
남형준이 말했다.
“그렇게 됐어. 그 사람들 제 일차 시너지 효과는 물거품이 됐고 도덕성에 금이 가고 있는 중이라구. 만회하기 어려운 곤궁에 처하게 되는 건 시간문제인 것 같아.”
“정말 통쾌하군요. 대명그룹은 이제 적대적 M&A 공격에 대해 긴장을 풀어도 되지 않을까요?”
“아직은. 부회장님께서 생각이 계신 것 같아.”
“제가 없어서 형님이 더 바쁘시겠군요.”
“사실은 지금 플로텍스 관련 진행 능률이 영 아니라구. 하지만 뭐, 순풍에 돛을 달기 시작한 건 꽤 됐으니까 그럭저럭 풀려나가겠지.”
“그럼요. 엔엘엔시 시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게 풀로텍스일 텐데요. 업계를 깜짝 놀라게 할 역사적 신규사업에 병합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부회장님께서 하고 계시는 것 같던데 말에요. 하여간 기대가 커요, 형님.”
“나도 그래.”
그는 저력이 넘치는 김경자 실장을 기억에 떠올리며 말했다.
“계열사까리 함께 손을 잡게 된다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 * *

화려한 독신? 이예라는 실소를 머금은 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입에 올릴 수 있는 멋들어진 단어라면 사양 없이 지껄이는 친구 윤미가 싫었다. 그러나 반박할 여지를 찾지 못하고 잠시 동안이나마 당황했던 자신도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매조소프라노 이윤미의 결혼 생활이 성공적이라는 거야 알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그러나 늘 비아냥거리는 습성을 지니고도 결혼생활이 무난하다는 사실이 이예라에게는 기이한 느낌이었다.
그녀가 복창을 하듯 말했다.
“글쎄 왜 결혼을 안하냐구?”
“좀 전에 그랬잖아. 내가 화려한 독신을 선호하느냐고 말야.”
“얼른 대답을 안 했잖아? 그렇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글쎄, 둘 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이예라는 넌더리가 쳐졌다. 이런 얘기처럼 싫증나는 얘기는 없다. 그녀는 휑하니 분장실을 나와 버렸다. 어쨌거나 이윤미와 같은 무대에 오른다는 건 재앙이었다. 원만한 결혼 생활을 죽도록 과시하는 그녀에게 화려한 독신으로 버티는 노처녀의 대결이랄까…….
‘화려한 독신이 뭐 말라 죽은 거야?’
이예라는 자신도 모르게 과민반응이 일고 있음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남형준이 금방 눈앞에 떠오른다는 자체 때문에도 그녀는 견딜 수 없이 화가 났다. 그는 출장을 갔다는 것이고 자신에게는 다녀오겠다는 인사 한 마디 없었다. 회사에서는 정확한 행선지를 알려주려 하지도 않았고. 가을이 오고 있는 탓인지 모른다. 마음이 스산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젓고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의 덮개를 열었다 닫고는 다시 조심스레 열었다.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김하일 비서는 약간은 당황한 듯한 얼굴로 윤 부회장에게 그녀가 왔다는 걸 곧 알리겠다고 말했고, 그녀를 거실로 안내하고는 돌아서서 나갔다. 그녀는 거실을 서성거렸다. 전에 비해 침울함이 말끔히 가시고 있는 듯한 거실 안에 국화꽃 향기가 그윽한 걸 느끼며 그녀는 무심결에 정원이 바라다 보이는 창가로 다가섰다. 저택의 규모도 규모지만 이곳 정원은 거의 이름이 났을 정도의 명소인 것을 생각하며 오른쪽으로 얼굴을 돌렸을 때였다.
“응?”
창문에 밀착 하다시피 화단을 따르던 이예라의 눈길이 갑자기 딱 멎었다. 분명히 남형준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회사에서는 출장중이라던 그가 외출복 차림이 나닌, 소매를 걷어 올린 와이셔츠 바람으로 팔짱을 낀 채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옆을 엇비슷이 윤청이 따르고 있다. 둘은 대화를 나누며 거닐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윤청의, 어느 때보다 밝아진 얼굴이 들어나는 순간 그녀는 화석처럼 굳어버렸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녀는 얼핏 돌아서서 거실을 둘러보았다. 지난 번 이태리로 떠나면서 잠시 인사를 왔을 때는 구석구석 어둠이 스민 듯 침체된 분위기였던 거실의 가을 향기 그윽한 화사함이 그제야 느껴졌다. 파르르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다음 순간 그녀는 비수에 꽂혀지는 듯한 통증이 가슴 한 복판에 느껴졌고 눈앞이 캄캄해져 오는 걸 느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면서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남형준이 기분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윤청은 소리 내어 웃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빛나는 눈초리로 그를 보면서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화려하기 짝 없는, 그러나 모순 된 그림…….
그녀는 바람처럼 막 안으로 들어서는 김하일 비서를 스쳐 쏜살같이 현관을 향해 내달았다.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했고 그녀는 미칠 듯 자책하고 있었다. 여길 내가 뭘 하러 왔던가고. 윤청의 재빠른 지시대로 김하일 비서가 대문 밖으로 뛰쳐나갔을 때 그녀는 이미 차를 타고 떠난 뒤였다. 김하일은 난처한 얼굴을 한 채 골목 끝까지 뛰어 나갔고 그녀의 차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테일 라이트를 보았을 뿐이었다.
윤청은 급히 이예라의 핸드폰 번호를 뒤져 전화를 걸다 말고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김 비서가 설명한 대로 이예라의 태도는 오해에서 빚어진 것이 분명한 기미가 보이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이제 전화를 걸어 뭐라고 해야 하는가? 있을 수 없는 사실을 입에 담아 변명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면 차라리 침묵이 나았다.
윤청은 문득 모멸감을 느끼며 차분히 소파의 등받이로 깊숙이 눌러 앉았다. 이제야 말로 그녀를 아주 잃은 듯이 느껴졌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으로 함부로 오해를 하다니, 민망스럽기보다 그녀가 내린 속단의 의미 때문에도 결코 그녀를 용서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잠시만 기다려줬다면 털어놓고 설명을 해줄 수도 있었는데. 윤청은 괴로움을 느꼈다. 자신이 갑자기 초라하게 느껴진 때문이었다.

* * *

박희남 회장의 고충은 좀더 다른 데 있었다. 자신이 너무 오래 철옹성에 안주해 왔던 것도 문제였다. 거듭되어 온 불상사로 대명그룹이 크게 멍들고 있으리라고 예측했던 것부터가 오산이었다.
조직 구성원 중 그것을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아니, 어쩌면 한 명도 없을지 모른다. 파쇼라는 별호 그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무신경에 가깝도록 무지막지한 처세의 수법 덕분에 타협을 꿈꾸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복종이 있을 뿐. 그것이 이제 그가 외로움을 느끼는 근본 요소가 되고 있는 중이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듯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전에는 발 빠르게 움직이던 녀석들도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는 듯했다.
결국, 그것을 애사심이라고 명명하기에는 석연찮은, 무작정 복종하고 보자는 뭔가가 있는 듯했다. 그것이 바로 회사의 조직이 점차 약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밖에 없는 요인이 었다. 늘 책임회피를 위해 뒤로 몸을 빼는 임원들이 있는 한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도 선취득권의 원리만으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너무 서둘렀던 것도 잘못이었다.
정보 수집에 실패를 한 건 어디까지나 사촌인 박희주를 과신했던 때문이다. 대명그룹을 함부로 얕잡았던 것도 따지고 보면 녀석 때문이었다. 녀석은 속단이 심했다. 조울병 환자처럼, 높낮이가 고르지 않은 녀석의 들쭉날쭉 하는 처세를 알면서 그에게 큰 임무를 부여했던 것이 불찰이었다.
일생일대의 큰 실수로 구경(G)그룹의 역사에 아니, 인간 박희남의 역사에 기록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니, 박희남 킹덤이 맨 아래의 단 하나 작은 고임돌이 부실했던 이유 때문에 점치 붕괴조짐을 보이고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적대적으로 시도했던 M&A에 정작 넘어야 할 산을 단 한 개도 넘지 못한 채 대명그룹이 의외의 방어전으로 팽팽한 대립양상을 띄우기 시작하고부터 그는 알아차린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파국을 초래했던 것이 아닌지 의심이 갔다. 동조세력과 함께 대명그룹 지분의 21%를 확보한 뒤 공개매수를 선언했고 대명그룹 지분 전체의 19%를 매집한 CGA를 지원세력으로 확보 하고서도 자신의 아성은 이제 한없이 휘청대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치밀하게 2대주주들의 지분까지 인수하고 소액주주를 우호세력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을 맹렬히 추진했는데도!
그런 와중에서 객관적으로 보아 무덤을 파도 너무 깊이 팠다는 생각을 그가 하기에는 아직 이른 듯했다. 그는 음모와 술수로 빚어진 인간이었다. 그는 남은 술수를 모두 동원할 생각을 이제 더 이상 하고 있지는 않았다. 남아 있는 술수라는 것이 있을 리 없었고 모두 바닥이 나고 있었다. 그럴 바엔 어디엔가 자일을 걸쳐 놓아야만 하는 것이다.
지금으로선 제3주주로서 CGA의 이병두 회장이 가장 유력한 후원자가 될 소지가 충분하지 않은가? 더구나 그는 여색을 밝히는 인물이고 이미 윤청이라는 여자에 대해 몇 번인가 군침을 삼키는 얼굴을 그는 본 적이 있었다. 그 여자를 굴복시키는 것을 미끼로 한다면 아마 그는 좀 더 신명을 내게 될 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가 지닌 모종의 연계(러시아 마피아와의)는 얼마나 안성맞춤인가?
비서실에서 인터콤이 울렸을 때 그는 눈앞에 놓인 특수 키폰에 점멸 등이 깜박거리는 걸 보았다. 그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도청이 불가능한 통화 요건에 걸맞게 그는 은근한 어투로 말했다.
“좀 뵙시다, 이 회장. 이따가 거기서.”
그의 음성에서 상당히 치밀하게 짜여진 듯한 범죄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상대는 알아차린 듯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물러나 앉았다. 이병두 회장이 적극 나서기만 하면 아직 승산은 충분했다. 어쨌든, 끝까지 해보는 것이다.
둘이서만 만나곤 했던 단골 사롱에 이병두 회장은 이미 와 있었다. 그가 얼마나 돌연한 약속에 짬을 내기가 어려운 사람인지를 감안하면 시작부터 조짐이 나쁘지 않았다. 둘은 모서리를 끼고 대각선으로 위치한 자리에 가까이 다가앉았다. 두 사람은 호스티스는 물론 새끼마담까지 접근을 금지시킨 채 곧바로 밀담에 들어갔다.
이병두 회장의 자금 동원 능력에 대해서는 낙관할만했다. 문제는 그의 의지였다. 마음먹고 덤비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게다가 언제부턴가 슬며시 매집해 놓았던 대명그룹 주식이 수월치 않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래, 얼마나 더 풀면 될 것 같소?”
이병두 회장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그것을 그는 묻고 있는 것이다.
“오늘 기획관리과에서 자료가 올라왔는데 17만주만 더 계상을 하면 결론에 도달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17만주라……. 결국 100억 원 정도로군.”
“희래 개발의 플로텍스 산업 이외에 이 회장이 요망하는 사업이 또 하나 늘었기 때문에 그만한 가치는 충분하지 않겠소? 게다가…….”
그는 음침한 얼굴로 부축이듯 말했다.
“윤 부회장을 산하에 거느린 이병두 회장의 모습은 생각만으로도 내 어깨가 다 으쓱한데 말요.”
이병두 회장은 앞에 놓인 술잔을 끌어 당겨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는 생각에 잠긴 채 마른안주 접시에서 가늘게 찢어놓은 대구포 하나를 집어 잘근잘근 씹으며 물끄러미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가 바라는 건 또 있었다. 윤청의 서의개발을 통째로 집어 삼키는 것. 그것이 잘만 되면 자신의 인생에서는 이제 더 바랄 것이 없는 셈이었다.
그는 또 땅콩 하나를 집어 입 안에 던져 넣었다. 머릿속에 계산기의 작동이 끝날 때까지 그는 두 개째의 땅콩을 더 입안에 던져 넣고 우물거리며 박희남 회장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어느새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좋아요. 그렇게 하지. 하지만 말요…….”
그가 미심쩍어 하는 건 대명그룹에서 아직 다 꺼내놓지 않은 비장의 카드가 몇 장 더 있는 듯하다는 것이었다. 어제도 그는 말한 바가 있었다. 아무리 들여다보려고 해도 안이 너무 깊고 캄캄해서 보이질 않는 것 같다고. 그만큼 보안이 유지될 수 있는 자체부터가 부러운 일이 아닌가고.
여전히 그는 같은 문제에 대해 말을 꺼냈다.
“그렇게 당차게 구는 여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 안 해봤는데 말요, 아무튼 대단한 것 같아요. 총수 자리를 기어이 고사하고 있는 걸로 보면 세상만사가 다 귀찮고 허무하다고 생각하는 건 분명한데 말요.”
박희남 역시 생각은 같았다. 그렇다고 맞장구만 치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는 CGA 이병두 회장같은 사람을 요리하는 데는 이력이 나 있는 편이었다. 그는 딴딴하게 느껴지는 표정으로 대수롭잖은 일을 얘기하듯 말했다.
“그러니 더 매력적이질 않소? 지금처럼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어요? 그 여잘 소실로 거느릴 수만 있다면야 세상을 다 얻은 것보다 나을 텐데.”
“그렇게만 된다면야!”
마침내 이병두 회장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그는 불끈, 새 힘이 솟는 듯한 얼굴로 술잔을 집어 박희남 회장의 면전에 들어 보였다. 두 사람은 곧 술잔을 맞부딪쳤다. 박희남 회장의 얼굴에도 회심의 미소가 넘실거렸고 둘 다 기분이 느긋했다.
“우선 풀어 놓고 볼 테니까. 박 회장은 마무리나 잘 해요.”
“그거야 물론 순서가 잡혀 있지요. 단지 오한수 회장이 살아 있을 때부터 똘똘 뭉쳐있는 정예부대 처리가 좀 난관이 되길 할 테지만 협상 수위만 잘 조정하면 되질 않겠어요?”
“장학출 사장과 남형준 부사장이란 자가 그 여자 심복인 것 같던데 말이오. 아니, 심복 정도가 아니라 그 여자 하나 보좌하는 걸로 목숨을 바치고 있을 정도라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던데 말이오.”
“나도 듣긴 했어요. 두 놈 다 결혼도 하지 않고 대명그룹을 위해서만 온갖 고생을 다하고 있다는 얘기를 말에요. 하지만 그러면 뭘 하겠어요? 그 여자가 난공불락일 텐데. 죽은 남편을 봐서라도 오 회장 부하들하고 행여 가까워질 생각이나 하겠어요?”
“하긴, 그 여자라면 있을 수도 없는 얘기지. 하지만 중국 사극에 거 왜 있잖소? 태평공주인가, 두 심복이 평생을 따라 다니며 죽을 때까지 죽자고 모시는 거. 그거 멋있는 얘기 아닌가 말요.”
“멋이야 있죠. 하지만 사내자식으로 태어나서 그게 어디 할 짓이오? 사랑하는 여잘 한 번 품어도 못보고 바라보기만 하다니, 이 회장 같으면 성질나서 할 수 있겠소? 나 역시 백 번 죽어도 그 짓은 못할 것 같은데 말이오.”
두 사람은 껄껄 웃으며 술잔을 맞부딪쳤다. 이병두 회장의 얼굴에 어느 때보다 짙은 호색적인 웃음이 번졌다. 그러나 번득이는 눈초리가 술잔 너머에서 조용히 건네져 오고 있다는 걸 박희남 회장은 미처 모른 채였다.
이병두 회장이 함부로 드러내 놓고 경계할 수 없는 뭔가가 박희남 회장에게 있는 건 사실이었다. 크게 신세를 진일도 있었다. 난관 하나가 그의 입김 한번으로 거뜬히 처리됐던 것이다.
어떻게 그가 그 일을 처리할 수 있었는지 박 회장은 구체적인 언급은 전혀 없었다. 어떻게 그가 대권주자였던 젊은 바우 총제의 보좌관을 마음대로 휘저을 수 있는지, 사실 그 부분에 한해서만은 이병두 회장으로서도 미스테리의 수수께끼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결정적인 순간에 바우 총제의 위상에까지 위태로운 모험이 될 수도 있는 그 일을 그는 거뜬히 해치운 것이다. 이후부터 박희남 회장에게 늘 한 수 뒤지고 있는 느낌일 수가 있었던 것도 어차피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했었다.
이병두 회장과의 면담은 다음날 다시 한번 갖기로 하고 헤어진 박희남은 귀가하는 차안에서 가늘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가 넌지시 말했던 것이다.
“만약, 만약에 말요. 이번 M&A가 실패했을 경우 손실을 매꿀 방도라는 건 준비 되 있는 거요?”
거기에, 신경전에도 엄연히 관람객이 존재하는 것이 문제였다. 업계의 동향이 요즘 손에 잡힐 듯 보이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기업문화라는 것을 내걸고, 무엇보다 구경그룹의 부도덕 운운하면서 대명그룹을 두둔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음…….’
그는 어금니를 사려 문채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어차피 시위를 떠난 화살이고, 이제 와서 뒷걸음을 친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연일 주가가 들쭉날쭉 하는 가운데 만약이라는 전제가 눈앞을 날아다니고 있는 것은 불편하기 짝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박희주 산하에서 대형사고가 터지고 있다는 것은 아직 박희남 회장은 알아차리지 못한 채였다.

* * *

이병두 회장의 표정은 전날과는 달랐다. 24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가 확인한 것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은 채, 단지 외적인 정보에 대해 말했다.
“이번 매집은 쉬울 것 같지 않아요. 지난 번 박 회장이 20만주를 사들인 이후 주가가 엄청 올라있단 말에요. 거래는 동결이 되고 있는 듯한데 말이지. 그런데 또 하나 걱정이 된다구.”
박희남 회장은 이 회장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뭐가 말이오?”
박희남 회장이 물었다. 이병두 회장의 변심을 점치기는 일렀다. 일구이언을 하지 않는 사람인 데다 이병두 회장은 이재에 밝은 사람이었다. 이번 대명그룹 인수에 열을 올릴만한 요건은 충분했다. 대명상사를 자신의 산하에 두는 것은 맨 처음 협상으로 끝나 있다. 그런데 또 하나 걱정이 있다니?
“대명석유 유응규 부회장 말요. 집에도 못 들어가고 모처에 은신해 있는 모양인데 말이지. 언제까지나 저러고 있을 수는 없질 않겠어요? 우유부단한 성격에 마음이 약한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된 것만은 사실인데 바로 그게 걱정이 된단 말씀이야.”
유응규 부회장에 대해 이병두 회장이 비중을 두어 우려할 만큼 그가 대접을 받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부인 덕분이었다. 지난 번 오한수 회장 생존시 능력 위주의 인사이동 때 찬밥 신세가 됐던 때를 기해 그 부인이 친정 오라버니의 도움을 받아가며 자사주를 대량 매집해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남편을 최대주주가 되도록 친척들마저 동원해서 주식 매집에 박차를 가한 바도 있었다. 소액 주주들 중 상당수가 유응규 부인과 친척 그리고 고등학교 동창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고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을 알아낸 사람이 바로 유응규 부회장을 국민학교 동창 명부에서 찾아낸 이병두 회장이었다.
맨 처음 그러한 사실 등을 말했을 때 박희남 회장은 깜짝 놀라며 환호성을 떠올리다시피 했던 것이다.
“아하, 거 정말 기막힌 정보를 알아냈구려!”
거기서부터 이병두 회장과 박희남 회장 사이의 결속은 더 한층 굳어진 셈이었다.
“해외로 잠깐 나가 있으라고 하면 안 될까?”
박 회장이 물었다.
“내가 제의해 봤는데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다고 하드군. 만나면 입장이 좀 거북할 거고 마음이 약해서 그 사람들 말을 안 듣고는 배기지 못할 게 걱정이지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는 거야.” 박희남은 유심히 이병두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길이 얽혔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빙그레 웃었다.
박희남 회장이 말했다.
“누구든 죄 없는 자 이 여인을 돌로 쳐라. 참, 죄 없는 사람도 있다니…….”
마침내 둘은 껄껄 웃었다.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나 부지? 한 마디면 경을 칠 텐데. 그러고 보면 신기훈 그자가 보통 인물은 아니라구. 아직도 주변 인물들에 대해서는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니 말요.”
“하지만 오 회장을 살해하는 데 공모를 했던 사람은 아니니까 유응규 같은 사람 끌어들여 봐야 자신에게 득 될 게 뭐 있느냐고 생각하는 거젰지.
이병두 회장은 잠시 박희남의 얼굴을 보다가 다시 말했다.
“하여간 그 부인에게 단단히 일러 놨으니까 당분간은 걱정 안 해도 될지 모르지. 그런데 문제는 이번에 새로 우리가 돈을 대주고 매집했던 지분에 대해 도덕적인 문제를 놓고 고심이 많은 것 같아 걱정이라구. 그 사람 마음이 하도 약하니 말요.”
“하지만 그 부인 말이야 안 듣겠어요? 남편 처세를 이번에 단단히 관리하겠다고 약속을 했으니까 믿어 봐야지.”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요.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사실도 그에게 상당히 탄력을 심어주고 있으니 별 일 없겠지.”
“물론이오.”
바로 동상이몽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병두 회장은 흘깃 박희남 회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만하면 자신의 물밑 작업은 최상의 것이 아니냐는 얼굴로. 게다가 그는 이번 적대적 M&A작전에 사채까지 동원된 구경그룹의 무리수에 대해 그의 머리 속에 적신호가 울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동안 주 일회정도 서로의 현안을 주고받았지만 인수합병 계획을 망칠 수 있는 문제들이 구경그룹에 쌓이고 있다는 점도 충분히 간파된 바가 있다. 박희남 회장은 어차피 상처입은 짐승처럼 신음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설프게 선의로 위장된 채 들떠 오른 21세기 초입에, 잔인무도한 인수합병 전략을 추진하는 마당에 평판에 금가는 일이 발발하고 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무모할 정도로 비약적인 짓거리였다. 그러나 절대로 내색은 금물이었다. 인수합병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로서는 자신이 제3주주의 역할을 담당하면 그뿐이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뇌리 깊숙이에 있는 작은 파일에 담긴 내용이었다. 하지만 더 큰 규모의 파일 내용과 일관성을 지닌 채였고 언젠가는 구경그룹이 제3주주의 역할로 바뀔 때까지에 한했다.
그는 조심하면서 박 회장의 심란해 하는 얼굴에 대고 힘을 실어주는 웃음을 씩, 웃었다.

-계속-

글 김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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