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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로요가 이끄는 필리핀 앞날

'권력 찬탈자' 평가 속 과제 산적





필리핀 농부들이 마닐라에서 아로요 대통령 허수아비를 불태우며 항의집회를 열고 있다. 이들은 아로요 대통령이 농업자금을 지난 대선에서 자신의 집권을 연장하는 데 사용했다고 비난하는 한편 토지개혁법의 완전개정을 촉구했다

대통령의 딸,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대학 동창, '피플 파워'로 대통령에 오른 여성 등 갖가지 수식어가 따라붙는 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 그녀는 지난 6월 어렵게 재선 고지를 넘었지만 앞에는 여러 가지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영국 BBC방송은 아로요 대통령이 앞으로 6년 임기동안 더 깨끗한 물과 보다 값싼 전기, 더 많은 학교, 매년 100만 개의 일자리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에 관심이 모아진다고 보도했다.
리스크 컨설팅 업체 퍼시픽 스트래티지스 앤드 어세스먼츠의 스콧 해리슨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아로요 대통령이 국가부채가 늘어나고 부패가 만연한 상황에서 세금 징수조차 저조해 가용할 수 있는 자금이 거의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해리슨은 “아로요는 어려운 시련을 겪게 될 것이며 기득권과 독점에 반대하는 일부 경제정책의 경우 심한 저항에 부닥칠 것”이라고 말했다.
아로요 대통령이 내세운 경제정책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되는 정책의 하나는 담배와 술에 대한 세금을 인상해 교육과 보건, 복지분야 등의 예산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가 풀어야 할 숙제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부유층과 기업들로 하여금 사회를 위해 그들의 몫을 일정 부분 내놓도록 하는 일이다.
특히 대다수 필리핀 국민들은 수개월 동안 계속된 대통령 선거운동과 선거 후 지루하게 진행된 개표과정에서 드러난 정치인들의 행동에 환멸을 느끼고 있어 이들을 개혁작업에 동참하도록 만드는 일이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필리핀 일간 인콰이어러는 사설에서 “대통령 선거운동과 선거 자체가 순수하지 않았었다”면서 “ 정치체제는 모두가 결점 투성이다. 우리가 발전하려면 이것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로요는 2001년 1월 ‘제2의 피플 파워’로 조셉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쫓겨난 후 당시 부통령에서 쉽게 대통령직을 승계했었다. 그리고 이번에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재선됨으로써 그동안 부족했던 국민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됐다.
하지만 대선에서 영화배우 출신의 페르난도 포 2세 후보를 지지했던 수백만 명의 서민들은 여전히 아로요를 권력 찬탈자로 생각하고 있다. 더욱이 이번 선거가 부정선거라는 야당의 주장은 국민들에게 쿠데타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던져주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지난 18년 동안 두 차례 ‘피플 파워’ 민중봉기와 아홉 차례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
아로요는 페르난도 포 2세에 비해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필리핀은 여전히 정책보다는 지도자의 카리스마에 영향을 받는 국가이기 때문에 아로요가 앞으로 카리스마를 키우는 일이 숙제의 하나다.
1947년 태어난 아로요는 1960년대 필리핀 대통령을 지낸 고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의 딸이다. 그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귀국한 뒤 대학교수를 지내다 지난 1980년대 말 무역산업부 차관보로 공직에 발을 들여놨다. 이후 1992년 상원의원에 당선된 뒤 1998년에는 부통령직에 취임했다.
특히 그는 미국 조지타운대학 동창인 빌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과의 친분을 십분 활용하는 한편 조지 부시 대통령 정부가 표방한 ‘테러와의 전쟁’에 중요한 해외 파트너의 하나로 기민하게 동참, 한동안 소원했던 대미관계를 정상화하고 정치?군사?경제적인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국제 투자자들은 아로요가 이번 선거에서 정치 문외한인 페르난도 포 2세 후보에 승리한 데 대해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지만 많은 애널리스트들은 지난 3년간 아로요 대통령의 치적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그만큼 필리핀 경제가 쉽게 호전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도 마닐라 금융가와 외교단지의 번쩍이는 고층건물과 화려한 상점들을 지나다 보면 필리핀이 아시아 지역에서 최악의 빈곤과 실업에 시달리는 국가라는 점을 잠시 잊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다. 10분도 채 못가 낡아빠진 오두막들이 즐비한 슬럼가가 나온다. 필리핀에서는 이러한 빈민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전체 인구 8천400만 명 가운데 3분의 1정도가 하루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은 과감한 규제철폐와 민영화 덕분에 1990년대 말 아시아 경제위기 당시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타격을 입지 않았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인구성장률과 비슷한 평균 3%에 머물고 있다. 이는 이웃 아시아 국가들의 성장률에 못 미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농업에 기반을 뒀던 필리핀 경제는 현재 급속히 전자산업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다.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고학력자들이 새로운 기술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자산이 됐던 것이다.
그러나 필리핀의 전자산업도 주요 수출시장인 미국과 일본의 경제상황에 큰 영향을 받는 취약점이 있다. 또한 필리핀에는 상위 부유층 10%가 하위 빈곤층 10% 소득의 20배 이상을 벌고 있을 정도로 빈부격차가 극심하다.
아울러 매년 5% 이상의 재정적자도 큰 문제다. 이는 정부가 너무 많은 예산을 사용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충분한 세금수입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필리핀 정부는 올 1/4분기 실적을 토대로 올 한해 5.8%의 성장률을 예상하고 있지만 경제 분석가들은 이것이 가능할지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또 거의 모든 에너지원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국제적인 고유가의 영향으로 올해 물가상승률이 5%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아로요 대통령은 물론 이 같은 문제들을 잘 알고 있다. 필리핀에서 경제를 살리고 노동력의 국외유출을 막기 위해서는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고 일자리를 창출하며 영어구사 인력을 교육시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이 지적이다. 아로요 대통령은 이밖에 급증하는 인구문제와 각 지방 무장세력의 위협에도 잘 대처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정치선거개혁연구소의 정치분석가 얼 파레노는 아로요 대통령이 이제 더 이상 재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대중적인 인기는 얻을 수 없지만 정말 필요한 개혁조치들을 과감하게 취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고 말했다.

최재석 국제뉴스국 기자 | bond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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