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커버스토리


성장 패러다임이 변했다

우리나라 경제의 성장동력인 수출이 연일 신기록을 갈아 치우며 증가일로에 있지만 경기회복은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과거의 성장 사이클대로라면 경기가 살아날 때가 됐지만 현재의 경기지표들은 이런 통념을 무색케 하고 있다.
가계부채에 발목이 잡혀 소비가 위축된 것이 원인이라고 해도 수출ㆍ생산 호조가 투자, 고용으로 이어지지 않는 현상은 우리 경제의 성장 패러다임에 커다란 변화가 이뤄지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
외환위기 이후 금융기관은 성자아성 대신 리스크 관리에 집중하는 추세다. 젊은 기업 경영자들은 현금흐름을 중시하면서 단기실적과 주가관리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자연히 대단위 투자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제조업체들은 효율성을 최우선시하면서 부품ㆍ소재이 글로벌 아웃소싱에 치중하고 중소업체들의 해외이전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노동집약적 경고업 대신 기술집약적인 정보통신 산업의 비중이 커지고 부품ㆍ소재의 해외조달이 늘면서 수출호황에도 불구, 고용증대 효과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성장 패러다임이 변화한 상황에서는 과거 성장 패턴에 의존한 경제전망과 정책대응이 위력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내수침체, 장기불황의 서막인가
수출ㆍ투자ㆍ내수로 이어지는 선순화 구조 붕괴, 경제시스템의 조로화 현상 우려

장기화딘 경기침체로 극도의 내수 부진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서울 회현지하상가의한 내의상점이 할인 가격표를 붙여 놓은 채 고객의 관심을 끌기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한국 경제의 기본 틀이 변하고 있다.
수출이 사상최대 호황을 구가하며 성장의 기관차 노릇을 하고 있지만 또 다른 성장의 축인 내수는 부진의 늪에 빠져 있다. 수출의 열기가 곧 내수로 옮아갈 것이란 낙관론은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 올 초부터 2.4분기 회복을 자신해온 정부와 금융당국은 급기야 "좀처럼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이헌재 부총리, 6월18일 경제장관간담회)"고 실토하기에 이르렀다.
경제가 수출과 내수의 양극화라는 덫에 갇힌 형국이다. 수출호황 속에 경기부진이 계속되면서 과거 경기순환 주기의 각종 데이터들이 생명력을 잃고 있다.
선진국들이 소득 2만 달러 진입 후 경험했던 현상이 벌써부터 한국경제에 노출되기 시작, 조로화 (早老化)현상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이 때문에 우리 경제 패러다임이 새로운 형태로 바뀌고 있으며 그에 따른 분석틀과 정책대응도 새롭게 변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외화내빈(外華內貧)..활력 잃은 내수
수출이 늘어도 좀처럼 고용과 소비로 연결되지 않는 양극화 현상은 통계청이 발표한 5월중 산업활동 동향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수출호조에 기댄 산업생산은 작년대비 13.3%의 증가율로 4개월째 두 자릿수 증가세를 이어갔다. 마치 경제가 초호황인 듯한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그러나 내수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소비의 척도인 도소매판매는 작년보다 2.2% 감소했다. 지난 1월(-2.5%) 이후 4개월 만에 감소세로 돌아선 것이다. 설비투자는 두 달 연속 감소세에서 탈피하기는 했지만 증가폭이 1.3%로 미미한 수준이다. 건설수주도 작년대비 24% 급감하는 등 그나마 내수를 버텨온 건설경기마저 벼랑 끝에 내몰린 형국이다.
두 지표간 괴리는 성장기여율에서도 확연히 나타나다. 한국은행 분석에 따르면 올 1.4분기 수출의 성장기여율은 104.9%에 달하고 있는 반면 내수는 -4.9%로 극심한 편차를 보였다. 또 수출과 소비의 상관계수는 지난 90년대 0.92에서 2002년 1.4분기∼2004년 1.4분기에 마이너스 0.57로 낮아졌다.
각종 지표는 더욱 암울한 내수 전망을 쏟아내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2.4분기 소비자동향조사 결과 6개월 전과 비교한 생활형편 소비자동향지수(CSI)가 3년6개월 만에 최저치로 뚝 떨어졌고 통계청의 5월 소비자전망 조사에서도 6개월 후의 소비자 기대심리를 나타내는 소비자 기대지수는 급락했다.

`수출→투자→소비' 선순환 붕괴..성장패턴 바뀌어
물론 전반적인 경기가 상승국면에 들어섰다는데 전문가들은 이의를 달지 않는다.
폭발적인 수출증가세에 힘입은 국내 GDP 성장률은 작년 2.4분기 2.2%로 바닥을 찍은 이후 작년 3.4분기 2.4%, 작년 4.4분기 3.9%, 올 1.4분기 5.3%로 4분기 연속 상승세를 이어가 경기순환곡선상 확장국면에 진입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수출과 내수의 양극화가 갈수록 구조화되면서 경제성장의 패러다임 자체가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는 점이다. 수출이 늘면 고용과 투자가 증가하고 이는 다시 소비를 부추기는 등식의 선순환 구조가 붕괴되고 오로지 수출에만 의존하는 성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교과서적인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성장패턴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런 성장패턴의 변화는 경기순환 흐름을 왜곡시켜 경기상승기가 짧아지고 침체기는 길어지는 악순환의 덫에 빠져들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신용상 금융연구원 박사는 "내수침체 속에서 수출에만 의존하는 성장은 구조적 인 덫에 빠져있기 때문에 경기상승 국면이 오래 지속될 수 없다"며 "이는 침체기가 짧아지고 상승기가 길어지는 다른 나라와는 정반대의 움직임"이라고 지적했다.
신 박사는 "경기순환곡선상 우리 경제는 2001년 하반기부터 작년 상반기까지 무려 2년간의 침체기를 거쳐 상승국면에 진입했지만 수출증가율의 변화에 따라 머지않아 다시 하강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성장패턴의 변화를 산업구조에서 찾고 있다. 수입의존도는 높으면서 고용유발효과는 낮은 특정 정보기술(IT) 산업 위주로 재편되면서 수출이 늘어도 내수에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는 비단 수출-내수간 괴리 뿐 아니라 대기업-중소기업, IT기업-비IT기업간의 양극화로 경제주체간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있다.
독일ㆍ일본 등 제조업 기반 선진국들의 경우 제조업의 비중이 한때 40%를 넘었고30% 이상을 유지한 것이 수십 년에 달하지만 한국은 제조업 비중이 30% 안팎을 유지한 기간이 고작 지난 20년 정도에 불과하고 그나마 88년 32%를 정점으로 하락하는 등 '조로화'현상이 심각한 실정이다.
내수불황의 원인은 선순환 구조의 붕괴 이외에도 무려 450조원으로 사상 최대치에 이른 가계부채와 그에 따른 개인신용위험이 결정적인 몫을 하고 있다.
또 값싼 임금을 쫓는 기업의 해외이전 선호경향, 투자보다는 빚 갚는데 치중하는 기업의 보수적 경영행태, 고임금과 경직된 노사관계, 주5일 근무제에 따른 생산성 저하 등도 내수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다.

장기불황으로 이어지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장기화되는 내수불황으로 경제 전체가 활력을 잃어가면서 우리나라도 90년대 일본과 같은 불황에 직면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 섞인 전망들이 나오고 있다.
특히 소비침체와 더불어 IMF사태 이후 지속돼온 설비투자 부진이 장기불황의 서곡이 되고 있다는 지적들이다.
금융연구원 박종규 박사는 "일본 장기불황은 부동산 버블 붕괴가 결정적 원인이었지만 단초는 설비투자 부진이었다"고 규정하고 "우리 경제도 수년째 설비투자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점을 주의깊게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다.
홍순영 삼성경제연구소 상무는 "한국경제의 최대 문제는 소비 부진보다도 설비투자 위축"이라며 "외국인 주식투자자들의 영향력 강화와 출자총액제한 등의 각종규제로 기업들이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있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홍 상무는 이어 "부동산 버블붕괴에서 시작된 일본식 불황과는 양상이 다르겠지만 투자부진 문제가 해소되지 못하면 장기불황이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지금처럼 경제성장이 일부 대기업의 IT품목 수출에만 의존하고 고용과 소비확산이 뒷받침되지 않는 절름발이 성장구조가 고착화되면 성장기반 자체가 크게 약화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잇다.
금융연구원 신용상 박사는 "투자가 전반적으로 부진한 상황에서 소수 수출관련 대기업 위주로 성장이 진행되는 현상이 구조화되고 있다"며 "이는 성장잠재력을 갉아먹어 장기적인 성장기반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노효동 경제부 기자 | rhd@yna.co.kr

=================================================================================================

고용효과 없는 생산수출 호황
부품ㆍ소재 국산화율 계속 내리막, IT산업 편중 심호, 수입유발 악순환

정기 바겐세일 기간인데도 경기불황으로 썰렁한 모습을 보이고있는 백화점
국산화율 100%는 한때 제조업에서 대단한 미덕이었다. 기술과 부품의 해외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국산화율을 끌어올리는 것이 국부유출을 막는 애국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았던 때가 있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다. 투자개방의 가속화와 효율성을 강조하는 경영풍토 속에 부품ㆍ소재의 해외조달이 보편화되는 추세다. 아웃소싱이라는 말이 경영효율화의 화두로 자리 잡고 있다.
그 결과 수출이 신기록을 양산하며 급증세를 계속하고 있지만 생산현장에 일자리는 늘지 않고 있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현상이다. 수출호조에 따라 일자리도 늘고 소비도 증가하는 선순환의 고리가 깨진 것이다.
고용유발 없는 수출ㆍ생산 호조가 계속되는 것은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에서 기술ㆍ자본집약적인 정보통신 산업으로 수출의 무게중심이 옮아가고 있는데다, 부품ㆍ소재의 글로벌 아웃소싱이 가속화됨으로써 고용 없는 수출호황 현상을 낳고 있다.


고용 없는 수출ㆍ생산 호조
올 들어 1-5월중 수출증가율이 38.6%에 달하고 제조업 평균가동률도 5개월 연속 80%를 웃돌지만 일자리는 늘지 않고 있다.
수출과 생산이 이 정도면 당연히 투자가 뒤따라야 하지만 설비투자는 지난해 2.4분기 이래 4분기 연속 마이너스 행진이다. 투자가 뒤따르지 않으니 당연히 일자리도 늘지 않는다. 계절적 요인을 제거한 5월중 실업률은 3.5%로 오히려 더 높아졌다. 고용이 늘지 않는 상황에서 내수도 얼어붙었다. 수출이 잘되면서 고용과 내수도 살아나는 선순환 구조가 아니라 수출만 잘되는 특이한 현상이다.
문제는 우리 수출산업 구조가 크게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섬유와 완구, 가발 등으로 대표되던 노동집약형 산업이 정보통신 중심의 기술ㆍ자본집약형으로 탈바꿈한데다 기초소재와 중간부품을 공급하는 중소하청업체들이 대거 해외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지난해 우리 기업의 대(對)중국 투자는 총 1천700여건. 하루 평균 4.7건 꼴로 투자계약이 성사됐다. 수출입은행에 따르면 올 들어 중소기업의 해외 직접투자는 4월말까지 620건, 6억800만달러에 달하면서 금액 기준으로 56% 급증하는 등 해외이탈은 가속화되고 있다.
중소기업의 해외투자 가운데 상당수는 현지에 진출한 국내 대기업 생산라인에 부품ㆍ소재를 공급하는 경우와 국내에 부품ㆍ소재를 공급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국내에서 고용유발 효과는 거의 없는 셈이다.

한국은행 회의실에서 열린 '경제동향 간담회'에서 박승 한국은행 총재가 참가자들과 현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뒷걸음질치는 부품국산화율, 수입의존도 확대
대내외 투자 개방이 가속화되고 제조업에서 효율성이 더 강조되는 새로운 조류에 따라 단돈 1원만 싸다면 과감하게 아웃소싱하는 것이 보편화됐다.
이 때문에 부품ㆍ소재 국산화율은 오히려 뒷걸음질치고 외화가득효과도 악화되고 있다. 한국전자통 신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휴대폰 등 무선통신기기 분야 국산화율은 56%, 유선통신기기분야 60%, PC 등 정보기기분야 55%, 방송기기분야 57%, 부품소자분야는 63%에 그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정보통신ㆍ반도체 등 전기ㆍ전자부문의 평균 국산화율은 2000년 기준 55.4%로 95년의 64.9%에 비해 크게 떨어졌다. 일본의 94.8%에 비하면 매우 낮은 수준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의 배상근 박사는 "부품ㆍ소재산업에 재벌의 참여가 사실상 제한되고 중소기업들의 영역으로 간주돼 오면서 이 부문에 대한 투자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며, 글로벌 아웃소싱이 확산되면서 부품ㆍ소재의 대외의존은 더 심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2000년 현재 수출의 외화가득률은 63.3%에 그쳐 20년 전인 1980년 수준으로 회귀했다. 외화가득률 63.3%는 상품 1천원어치를 수출할 경우 633원은 국내 부가가치로 들어오고, 367원은 해외로 유출됐음을 의미한다.
주력 수출산업인 반도체의 외화가득률은 49.7%, 통신ㆍ방송기기는 51.1%에 그친다. 이들 품목이 포함된 전기ㆍ전자업종은 54.1%로 전체 평균에 크게 못 미쳤다. 특히 전기ㆍ전자업종의 외화가득률은 지난 95년의 65.3%에 비해 5년새 11.2% 포인트나 떨어져 부품의 국산화율이 갈수록 낮아지는 추세다.
이렇다보니 반도체는 최근 3년 동안 수출보다 수입이 더 많은 대표적 무역역조 품목으로 자리 잡았다.

IT산업 편중 지속..새로운 성장동력산업 필요
그러나 반도체와 통신기기 등 정보통신산업이 국내총생산(GDP)과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정보통신산업의 GDP비중은 지난 2002년 9.9%에서 2003년 10.7%로 높아진데 이어 올해 1.4분기에는 12.4%로 더욱 상승했다. 전체 수출에서 정보통신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2년 33.5%에서 지난해 37.1%로 커진데 이어 올 1.4분기에는 38.4%로 확대, 40%선에 육박하고 있다.
정보통신산업의 수출신장률도 지난해 28.2%을 기록, 우리나라 전체 수출증가율 15.7%를 크게 웃돌았다. 그러나 정보통신부문의 설비투자는 2002년 5.2% 증가했으나 지난해는 오히려 6.2%나 감소했으며 올해 1.4분기에는 증가율이 0.3%에 그쳤다. 고용효과를 크게 기대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의 허찬국 박사는 "신기술과 부품ㆍ소재의 대외의존도가 높은 정보통신 부문이 수출주도 산업으로써 그 비중이 계속 커질 수밖에 없어 고용 없는 수출 호조현상이 고착화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한계에 봉착한 중소업체들이 해외로 빠져나가더라도 다른 성장동력산업이 생겨나면서 빈자리를 채워줘야 하지만 현재로서는 큰 기대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LG경제연구원의 송태정 연구위원은 "수출중심의 국내산업에 커다란 구조변화가 생겨남으로써 과거의 성장 사이클 데이터들이 생명력을 잃고 있다"면서 "IT산업에 치중한 수출산업을 무기로 성장동력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만큼 전혀 차원이 다른 새로운 전략과 정책으로 변화한 환경에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상현 경제부 기자 | shpark@yna.co.kr

=================================================================================================

자금 리스크 관리 치중, 보수 경영
투자 외면, 넘치는 현금... 경영권 보호와 주가관리용
해외 투자에만 열중... 국내 투자 환경 조성 시급

제1회 자동차의 날을 맞아 서울 삼성동 그랜드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열린 자동차의 날 기념 사진전에서 관람객들이 역대 자동차 발전상이 담긴 사진들을 둘러보고 있다
수출의 지속적인 증가로 경제는 성장하고 있지만 기업들의 투자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고 있다.
과거의 경험에 비춰보면 수출이 호조를 보이면 기업이 설비투자를 늘려 고용을 창출하고 내수경기를 살려 경제성장의 동력을 제공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기업들은 수출을 통해 번 돈을 안으로 쌓아두고만 있다. IMF사태 이후 가속된 대외개방의 여파로 기업경영의 화두가 된 경영권 보호나 자사주 취득?소각 등에 어마어마한 현금을 쏟아 부으면서도 투자는 꺼린다. 경기가 불투명해 선뜻 투자에 나서지 않는 면도 있다.
그러나 효율성과 단기실적이 강조되는 쪽으로 기업전략의 흐름이 변화하면서 과거 선단식 재벌경영 시대에 볼 수 있던 수십 년 앞을 내다본 대단위 투자는 더 이상 기대하기도 어렵다. 기업의 투자패턴도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경제 성장 구조를 수출과 내수의 `쌍끌이형'에서 `외끌이형'로 변화시키고 있다.

`쌍끌이'돼야 균형ㆍ장기적 성장..해법은 설비투자
전문가들은 지금과 같은 수출의 `외끌이' 구조로는 균형적이고 장기적인 경제 성장이 불가능하다는데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필상 고려대 교수는 "수출만을 통한 성장은 수출과 내수, 대기업과 중소기업, 부유층과 서민 등 경제 전체의 양극화 현상을 초래하고 수출 자체도 환율, 미국 금리, 중국의 경제상황, 유가 등 대외여건에 취약하기 때문에 호조세가 오래 지속된다고 장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결국 "수출과 내수가 균형을 맞춰야 하고 내수를 살리기 위해서는 기업들의 설비투자가 유일한 돌파구"라고 진단했다.
조용수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도 "수출만으로 단기간의 성장을 이끌 수는 있지만 장기적이고 균형적인 성 장은 힘들다"며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수출과 내수라는 두개의 바퀴가 함께 굴러야 하고 내수진작을 위해서는 기업들의 설비투자가 동반돼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 현금 넘쳐도 투자는 외면
하지만 기업들은 수출 호황으로 금고에 현금이 넘쳐나도 좀처럼 설비투자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한국은행이 최근 1천69개 제조업체의 올 1.4분기 경영실적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매출액 경상이익율은 13.4%로 지난 2001년 이후 최고를 기록했으며 현금 보유액도 41조원으로 총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사상 최초로 10.0%에 달했다.
그러나 대표적인 투자지표인 유형자산 증가율은 1.3%에 그쳤고 여기에서 삼성전자가 반도체공장 증설에 투자한 3조4천억 원을 빼면 0.4% 늘어나는데 그쳤다. 거의 정체상태인 셈이다.
투자를 꺼리는 대신 넘쳐나는 현금은 부채 갚는데 사용되면서 3월말 현재 제조업체의 부채비율은 96.7%로 100%를 밑도는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IMF사태 당시 마치 기업 도덕성의 기준이나 되는 것처럼 회자되던 부채비율 200%에 비하면 격세지감이 들 정도다.
이처럼 기업들이 투자를 외면하는 것은 기업들이 외형성장을 우선시했던 과거와 달리 안정성과 건전성을 중시하는 보수적 경영성향 때문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기업 경영풍토에도 큰 변화
기업들은 주요 대기업의 외국인 지분율이 50%가 넘어가자 소버린과 SK의 분쟁처럼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적대적인 인수ㆍ합병(M&A)에서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현금을 투자 등에 사용하지 않고 언제라도 동원 가능한 단기예금 등으로 보유중이다.
또 주주 중시 경영관행이 정착돼 내실없는 외형성장보다는 재무구조의 건전성을 높이기 위해 부채를 갚거나 자사주의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자사주를 매입, 소각하는데 남는 돈을 사용하고 있다.
외환위기의 홍역을 겪었던 국내 대기업들은 현금흐름을 중시하는 자금 리스크 관리에 치중하는 것이 큰 흐름으로 자리 잡았으며 최고경영자(CEO)의 덕목도 주가관리와 단기 영업실적 향상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스톡옵션은 경영자들에게 실적향상에 매진하게 만든 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단기성과와 주가관리에만 매달리게 했다는 평가도 있다.
또 주주총회와 이사회에서 연임여부가 결정되는 전문 경영인들이 경영일선에 나서면서 성장가능 분야에 대한 전략적 투자 대신 1년 주기의 단기성과에 더 치중하는 풍토가 자리 잡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의 송태정 연구위원은 "효율성을 중시하는 경영풍토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최근의 변화는 너무 빠른 느낌"이라면서 "요즘의 대기업 CEO들은 과거 개발드라이브 시대 창업주역들의 투자성과를 곶감 빼먹듯이 스톡옵션으로 챙기면서 과감한 투자 프로젝트에는 관심을 멀리하는 듯 한 인상"이라고 지적했다.

기업들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이 안된다"
기업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다. 모 그룹의 임원은 "우선 경영권이 불안한 상황에서 확실한 성공 보장이 없는 신규분야에 투자를 했다가 실패하면 외국인 주주들의 불만을 사게 돼 적대적 M&A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고 팽배한 반(反)기업 정서, 고임금, 불안한 노사관계, 불투명한 정부정책 등을 고려하면 국내에서는 투자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투자를 한다면 해외를 선택하겠다는 뜻으로 실제 지난해 국내기업의 해외투자액은 17억8천500만 달러에 달해 전년보다 15.0%가 늘어났다.
경제 전문가들은 이에 따라 기업들이 투자를 하도록 유도할 수 있는 여건 조성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홍순영 삼성경제연구소 상무는 "기업들이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도록 각종 규제를 풀어야 한다"며 "출자총액제한제도처럼 있었다가 없었다가 하는 규제가 있으면 장기적인 전망이 있어야 하는 투자를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정부도 기업들이 투자를 하게끔 규제 완화, 세금 감면, 반기업 정서 해소 등의 지원을 해줘야 하지만 기업 스스로도 사회적 책임을 갖고 고용창출을 위해 모범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고 기업들의 자발적인 투자를 강조했다.

이상원 경제부 기자 | leesang@yna.co.kr

=================================================================================================

넘치는 돈, 돌지 않는다
성장 자마재력 훼손 심각. 금융시장, 자원배분 기능 제대로 못해

KORTA가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등 중동 8개국 바이어 50개사를 초청해 국내기업을 대상으로 수출상담회를 열고 있다
과거 고속성장의 시대, 대기업 중소기업 가릴 것 없이 자금이 달려 아우성치던 때가 있었다. 극단적으로 말해 만성적인 자금부족이 지금까지 우리 기업의 자화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기업들의 내부현금은 넘쳐나고 투자처를 찾지 못하는 부동 (浮動)자금이 초저금리시대에 은행으로 몰려들고 있다.
고유가와 미국의 금리인상 및 중국의 경제긴축 가능성, 국내 경기 양극화 등으로 인해 우리경제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아짐에 따라 투자수요가 줄어 시중자금이 갈 곳을 못 찾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시중 여유자금이 설비투자 등 중장기 투자로 흘러들어가지 않고 단기성예금에만 몰리고 있다.
환란 이후 금융기관들은 성장성보다는 리스크 관리에 치중하면서 건전성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따라서 기업신용 위험 부담을 이유로 장기설비 투자에 대한 돈줄을 점점 죄면서 제조업 등에 대한 지원을 꺼리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이는 바로 투자부진의 원인 가운데 하나며 궁극적으로 성장잠재력을 훼손하게 될 것이라는 지적을 낳고 있다.

시중자금 浮動ㆍ不動化..구조적 금융불안 야기
최근에는 주식시장과 부동산 시장으로도 더 이상 돈이 들어가지 않고 있다. 주식시장은 외국인 투자자들이 이탈하면서 활력을 잃은 상태고 부동산 시장은 정부의 강력한 안정대책에 의해 실수요자들의 거래까지 뚝 끊겼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6개월 미만의 단기예금에만 돈이 몰리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금융권의 단기예금이 지난 3월말 현재 387조6천억 원으로 총 수신의 절반 수준인 49%를 차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은행권의 대표적인 단기(만기 6개월 미만) 상품인 양도성예금증서(CD), 환매조건부채권(RP) 등의 증가액은 지난 5월 4조8천억 원으로 지난 3월(1조4천868억원), 4월(1조7천890억원)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었다.
자금의 단기부동화 현상은 투자부진으로 이어져 성장 잠재력을 크게 위축시킬 뿐만 아니라 단기 금융거래 급증에 따른 부동산ㆍ주식 가격과 환율?금리의 급격한 등락을 가져올 수 있다. 이는 구조적인 금융불안을 야기할 우려마저 낳고 있다.
금융연구원 최공필 선임연구위원은 "정부의 부동산가격 안정대책이 세제 중심으로만 이뤄져 거래를 지나치게 차단하고 있어 부동산 자금의 단기 부동화(不動化)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 때문에 자금이 산업자금이나 가계로 흘러들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은행 건전성 기준에만 목매..자원배분 기능 실종
은행들이 외환위기 이후 강화된 건전성 기준에만 목을 매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 혹독한 시련을 겪은 은행들에겐 투자활성화를 통한 경제 성장력 제고라는 공적 기능은 관심 밖이다. 이 때문에 기술력이 있어도 담보가 없는 기업들은 돈을 빌리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은행들이 기업의 성장 가능성을 평가해 지원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하고 있지만 여전히 담보에만 매달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특히 최근에는 여신심사 기능을 본점 중심으로 강화한 은행들이 늘어남에 따라 현장 실사보다 서류심사가 대출의 기준이 되고 있다고 중소기업 경영인들은 지적했다.
실제로 중소기업들의 경우 자금난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중소기업들의 운전자금 부족액이 지난 1.4분기에 15조7천억 원으로 2000년 1.4분기의 16조2천 억 원 이후 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은행들이 주택, 상가 등 비교적 안정적인 담보를 제공하는 가계와 서비스업에 대한 대출은 크게 늘인 반면 기술력과 성장 가능성을 근거로 돈을 빌리려는 제조업체에 대한 대출은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기관 기업평가능력 제고시급..투자활성화 선결과제
이와 함께 우리나라 경제는 수출호조가 고용창출과 내수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붕괴하면서 수출기업과 내수기업,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양극화 현상이 점점 고착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최근 한국은행이 발표한 3월말 현재 제조업체들의 총자산은 작년 말보다 4.2% 증가했으나 시설투자동향을 보여주는 유형자산은 1.3% 증가에 그쳤다. 1.4분기 삼성전자가 반도체 시설투자에 4조3천억 원을 투자한 것을 제외하면 유형자산 증가율이 0.4%에 불과한 실정이고 특히 음식료품과 섬유제품 등 내수중심의 업종은 각각 0.4%의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는 일부 수출기업을 제외하고는 시설투자가 꽁꽁 얼어붙은 상태임을 의미한다.
삼성경제연구소 최희갑 상무는 "금융기관들이 건전성 기준에만 지나치게 의존, 담보대출에만 매달리고 있는 상황을 개선해야 투자부진이 해소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국내 금융기관들이 외국 금융기관처럼 신용평가에 의해 신용대출의 비중을 높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최 상무는 또 "외환위기 원인이 기업부분의 과도한 설비투자라는 인식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도 기업들이 투자를 꺼리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하고 "투자부진이 지속되면 성장잠재력이 사라져 경제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재홍 경제부 기자 | jaehong@yna.co.kr




  기사제보 | 구독신청 | 광고문의 | 회사소개

(110-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85-1
TEL 02-398-3762~8, FAX 02-398~37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