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출 사장이 인천을 들러 김포공항으로 함께 가기로 했던 것을 김경자는 굳이 저지했다.
“전 그냥 차를 가지고 가지 않고 다른 대중교통편으로 김포에 도착할 테니까 거기서
뵈요, 장 사장님.”
장 사장은 그녀가 순발력이 넘치는 여자란 걸 다시 한번 생각하며 못이긴 척 말했다.
“불편하지 않으시겠어요? 제가 회사에서 조금 일찍 떠나면 되는데요.”
그는 대충 알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지만 마음은 상당히 가벼워져 있었다. 대체로
그런 경우 상사가 데릴러 가겠다는데 어물거리며 수락하는 게 통례인데 그녀는 결코 불필요한
생색조차도 낼 생각을 하지 않는 듯했다.
시간이 돈이 아니라 금인 마당에 인천까지 돌아서 김포에 나가려면 보통 일은 아니다. 그녀가
괜찮은 여자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한 단호한 태도 역시 마음에
들었다. 그만하면 앞으로 일에 관한 호흡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한 것도 안심이 되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이층 커피숍으로 갔을 때 그녀는 먼저 와 있었다. 두 사람은 빈 자리에 마주
앉았고 커피 두 잔이 눈앞 테이블에 놓아지고 나서야 장학출은 문득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실 때 불편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녀는 생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요즘 많이 바쁘시죠?”
“그렇죠, 뭐.”
너무나 스스럼없이 말했기 때문에 장학출 사장은 빙긋했고 커피를 반쯤 마실 때까지 둘은 서로
말이 없었다. 업무적인 얘기라면 할 말이 많았지만 둘 다 서툴지 않았다. 짤막한 시간 동안
나눌 수 있는 얘기의 한계를 알고 있는 셈이었다. 김경자 실장이 원래 만만치 않은 여성인
걸 알고는 있었지만 장학출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언뜻 강렬해
보이는 눈빛을 제외하면 그녀는 평범한 회사의 임원 그대로였다. 확성기에서 울려나오는
맨트를 귀에 담기 전까지는.
“비행기가 도착했나보군요.”
장학출은 말하며 얼핏 몸을 움직이다가 문득 그녀를 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장학출은 그녀가 여직 입을 다문 채 빤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응?’
눈빛이 강했다. 그는 순간, 그녀의 눈 속에 담겨 빛살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에 대해 의식
했다. 그리고 그녀가 아름다운,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것도.
엘레나 콘드라티바는 자그마한 여성이었다. 귀밑에서 잘라 단발머리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머리칼은 부드러운 갈색이었고 자상해 보이는 눈빛을 한 아담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다가가자 그녀는 곧 얼굴 가득히 웃음을 실어보내며 바삐 손을 내밀었다.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장학출이라고 합니다.”
장학출이 먼저 그녀와 악수를 했고 김경자가 뒤를 이었다. 그녀는 유창한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오, 킴! 얘긴 들었어요. 정말 보고싶었는데 반갑습니다.”
엘레나 콘드라티바 교수는 두 사람에 대한, 그리고 대명그룹에 대한 첫 인상에 만족한 듯한
얼굴로 웃었다. 그녀는 윤청 부회장에 대해서도 빠뜨리지 않고 인사말을 던졌다.
“그 분은 모스코바 대학에서도 유명인사인 걸요? 얼마나 만나고 싶은 여성이었는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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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에 도착해서 윤청의 영접을 받는 엘레나 콘드라티바 교수는 사려 깊고 조용한 얼굴에 윤
청에 대해서는 물론 한국 재벌의 격조 높은 생활 양상에 계속해서 놀라고 있는 듯한 얼굴이
었다. 그러잖아도 좋은 평판에 매료되어 있던 그녀는 윤청의 모습에 첫눈에 반한 듯한 표정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윤청 대명그룹 부회장에 대한 감정을 수다스럽게 표현하진 않았지만 서구인 특유의
솔직성을 지닌 채 세계에서 제일 우아하고 매혹적인 여성을 만난 듯하다는 말을 했다. 이제
껏 자신은 ‘윤’과 같은 여성을 본 적이 없노라고.
레빈스키가 얼마나 큰일을 했는지, 장학출과 남형준은 이미 그녀를 만나는 순간 알아차렸다. 그
리고 현재도 점차 놀라움이 커져가고 있는 중이었다. 미생물 전진기지는 스톡하우스에서부터 시작
될 조짐이 보였고 콘드라티바 교수는 스톡하우스의 연구진에 필요불가결한 존재인 것도 드러나고
있었다.
레빈스키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라 행동하는 편이었다. 늘 민첩하게 행동했다. 최초로 그를
연희동에 초청한 것은 엘레나 콘드라티바가 내한한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엘레나 콘드라티바는
한국사회에 늘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며 집안을 돌아볼 수 있게 해줄 수 있는가 물었다. 윤청은
흔쾌히, 그러나 내실은 콘드라티바 교수 이외의 손님에게는 공개할 수 없노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다 김경자 실장을 바라보았고 얼른 정정을 하듯 말했다.
“우리 김 실장은 가족과 같으니까 상관없겠지만요.”
두 사람과 함께 집안을 돌아보던 콘드라티바 교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우, 윤? 여기 한국 궁전이 아닌가요? 하긴, 대명 왕국의 궁전이겠군요!”
엘레나 콘드라티바는 아래층 거실보다 이층 거실이 더 마음에 드는 듯했다. 그녀는 침실까지를
구경할 수 있는 모처럼의 특권을 누리며 너무나 기뻐했고 연상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욕실을
들여다보며 자신은 러시아의 귀족이 아니어서 잘 모르지만 아마 러시아의 귀족도 이만큼 격조
높은 욕실을 갖고 있진 못할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오한수 회장의 영정 앞에서 한동안 고즈넉이
서 있더니 낮게 한숨을 쉬며 윤청에게 돌아섰다.
그녀는 슬며시 윤청의 손을 끌어쥐며 말했다.
“윤. 당신 외롭지요? 눈 속에 아무도 모르게 슬픔이 가득 차 있어요. 처음 당신을 보는 순간
대뜸 알아챘어요.”
윤청은 놀라 뒷걸음을 치면서 흘깃 김경자 실장을 보았다. 그리고 이내 조금 웃어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고. 그러나 뜻하지 않게 왈칵 솟구쳐 오르는 눈물을 그녀는 겨우 감출 수 있었다. 전에
없이, 전혀 뜻하지 않게 솟구친 슬픔을.
단발머리의 엘레나 콘드라티바는 말을 뚝 그쳤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윤청의 억눌러온 감정에
대해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는 윤청을 개인적으로 친구 삼기 위해 한국에 온 것이 아니라
매우 소중한 그녀의, 파트너와의 연대에 자신도 성장하기 위해 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
더라도 층계 짬의, 눈에 잘 뜨이지 않는 한 장의 사진으로 인해 그녀와 윤청은 누가 말릴 사
이도 없이 절친한 친구가 되고 말았다. 누구도 끼어들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그 한 장의 사진은 윤청이 승마를 하고 있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오, 윤! 당신 승마를 했댔어요?”
콘드라티바 교수가 놀라며 물었다.
“네. 대학교 때부터 15년 정도 했나 봐요.”
“저런! 내가 처음 한국에 왔던 게 언제였는지 알아요? 88서울 올림픽 때 승마부문 심판자격으
로 왔었다구요!”
“네?”
“정말이라구요. 지금부터 딱 10년 전이니까 당신 그 때도 승마를 할 때가 아니었나요?”
“그랬어요…….”
“오, 마이 갓! 우린 그때부터 인연이 될 뻔했군요!”
그랬다. 어디선가 전혀 본 적은 없지만 낯설지 않은 그녀가 더 낯익어 보이는 것은 취향마저
같았기 때문인 듯했다. 김경자 실장은 뭔지 모르게 점점 더 침잠해 드는 표정으로 잠자코 서 있
었다. 여자들이 아래층 거실로 돌아왔을 때 윤청과 콘드라티바 교수는 이제 백년지기나 된 듯했
다. 그리고 김경자 실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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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이응렬 변호사로부터 걸려왔던 전화에는 노 변호사의 눈물어린 감사의 말보다 몇 배나
더 엄청난 의미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한수 회장님의 넋이 우리 부회장님을 지키고 계시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
다. 이 늙은이가 대명그룹에서 뭐길래 부회장님을 시켜 제 딸애의 목숨을 지켜주시게 했는가
말입니다.”
그는 회사의 몇 안 되는 핵심인물로 남형준을 거론했고 딸애의 죽음이 그에게 남길 상처를 돌
아간 오한수 회장이 미연에 방지하느라 아내를 시켜 딸애를 그곳에서 잠시 이끌어내도록 했다
고 생각하는 듯했다. 노인의 가상하기 그지없는 말이긴 했지만 윤청은 그때 섬뜩한 뭔가를 느끼
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그의 말에는 대명그룹을 위해서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잠시 후 장학출 사장이 도착하도록 되어 있었다. 한 걸음 앞서 스톡 하우스에서 남형준이 올
라와 있었다. 초읽기에 들어간 차승조의 다리 봉합수술에 관한 간략한 보고를 끝으로 잠시 침
묵이 흘렀다. 윤청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윤청은 문득 변수가 많은 것이 기업경영이라고 언젠가 오한수 회장이 말하던 것을 기억해냈다.
“쉽지 않은 게 기업을 경영하는 일이야. 자본주의 개념만으로 신나게 앞장서 가다가 돌멩이만한
장애물에도 바닥에 구멍이 뚫릴 수 있어. 우리나라처럼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다는 데서
기업을 이끌어나가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구.”
경영의 귀재다운 말이었다. 그는 길게 말하지 않았지만 멀리 앞을 내다보는 눈을 가진 것만큼이나
사리에 밝은 인물이었다. 그런 안목으로 장학출 사장을 받아들였고 남형준 박사를 이끌어 들
였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 두 사람이 분명히 대들보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서 억지로
연관을 지어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예라가 변을 당했다면 남형준에게는 충격 이상일 것이 당
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오한수 회장이 생존해 있었다면 남형준과 이예라의 결혼은 마땅히 성
사를 시키고도 남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어제 전화로 이응렬 변호사가 넌지시 청
원을 했던 것이다.
“부회장님. 어려운 부탁 말씀인 줄 알지만 제 딸애와 남 박사의 혼담을 좀 추진시켜 주실 수
없을까요? 늙은이가 이런 주책 맞은 부탁 말씀을 올리게 돼서 면목이 없습니다만, 이번에 하
마터면 딸애가 변을 당할 뻔했다는 생각을 하면 저는…….”
윤청은 당황했지만 노 변호사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무엇보다 이예라는 그의 고명딸이 아닌가?
“네, 알겠습니다. 변호사님. 제가 어떻게 주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만 제가 워낙 그런 데는
주변이 모자라서 어떨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남 박사님께 단호하게 의향을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로 난감하던 차였다. 윤청은 슬쩍 시계를 보고는 남형준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지극히 사소한 얘기인지 모르지만 사생활 문제인 만큼 매우 조심스러운 느낌을 지닌
채 윤청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남 부사장님.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에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어요.”
남형준은 문득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예라 씨 말예요…….”
남형준의 얼굴이 곧 굳어지는 것을 보며 윤청은 얼른 말을 이었다.
“나무랄 데 없는 여성이란 건 부사장님도 알고계실 텐데요.”
“네…….”
“두 분이 잘 어울리는 분이기 전에 이응렬 변호사님을 뵙더라도 저윽이 걱정이 돼서요. 변호
사님께서 부사장님을 사위삼고 싶어하시는 마음이 크시다는 것 아시잖아요.”
더 이상 정곡을 찔러 말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것 같아 빙 둘러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윤청은
말을 이었다.
“지난 번에 이예라 씨가 급히 출국해버린 적이 있었지요? 그 때 왜 그랬는지 혹시 아세요?”
윤청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단호하게 마음을 다져 먹으며 계
속해서 말했다.
“여길 왔댔어요. 부사장님이 며칠동안 나가시지 못하고 스톡하우스에 계실 때 부사장님
과 제가 정원에서 얘기 나누고 있는 걸 본 거예요.”
“아…….”
순간,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다운 태도였다.
“부회장님께 누를 끼쳤군요.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문득 그의 슬픈 사랑이 느껴졌다. 윤청은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그대로 있었다. 그의 감정에
대해서 그동안 충분히, 그리고 낱낱이 알고 있었다. 때문에도 윤청은 의연히 고개를 들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남 부사장님. 예라 씨와 결혼해 주세요. 대명그룹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시는 그 마음
으로 그 역시 대명그룹을 위한 일환으로 여겨 주시고 말예요. 그래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남형준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표정도 없었다. 그러나 윤청은 물러서지 않겠다고 단단
히 벼르면서 말을 이었다.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요? 제 말에 오해가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부사장님이 너그러
운 분이시라는 걸 알기 때문에 이젠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요. 제가 그룹을 위해서, 그리고
어울리지도 않는 대기업의 오너인 거나 마찬가지인 제 입장을 생각해서라도 부사장님께서…….”
윤청은 문득 회의가 일었다.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느낌조차 일
었다. 그러나 내친걸음이었다.
“부사장님에게까지 함부로 노파심이나 발휘하고 있어야만 하는 저에 대해 연민을 느끼신다
면 제발 생각해 주셨으면 싶어요.”
남형준은 당황한 얼굴로 얼른 손을 흔들었다. 그는 잔기침을 하면서 물끄러미 테이블 위를
응시했다. 머리끝만치의 하자가 있을 리 없는 그녀의 말은 자신을 깨우치기에 충분했다. 그녀와
함께 영원한 평행선이나마 유지하고 가려던 그의 희망을 단숨에 무산시키려는 조짐마저 보
였다. 하지만 전적으로 그녀가 옳았다.
그는 엄연한 불가피성을 깊이 의식하며 신음처럼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생각해 보겠습니다.”
문 앞에서 장학출은 이미 들은 것 같았다. 그는 안으로 들어서는 길로 조용히, 아주 조용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야릇하게도 남형준이 느껴야 할 아픔을 가슴에 통절하게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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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두 회장은 끌끌 혀를 차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동석해 있는 서윤복 전무를 향해 말했다.
“지금으로선 전망이 불투명해. 기세 좋게 밀고 나갈 땐 언제고 공격을 하던 쪽에서 비틀거리
다니 말이야.”
“하지만 공격을 늦출 생각은 전혀 하는 것 같지 않잖습니까?”
“그래……. 하지만 누가 보아도 서로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걸 알 수 있잖나 말이야.”
“애초부터 임자 없는 떡으로 너무 대명그룹을 얕잡아 봤던 게 잘못이었어요. 저 쪽이 워낙 멍
들었을 것으로 알고 잘못 덤빈 게 아닐까요?”
이병두 회장은 잠시 입을 다물고 유리창 너머의 가로수 잎사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
앞으로 반쯤 얼굴을 가린 윤청이 떠올랐다. 절세가인이라는 건 오한수 회장의 결혼식에서 만났
던 사람들이 입을 모았던 얘기지만 절반 밖에 드러나지 않는 모습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그 윤청이라는 여자 말야. 이제 겨우 30대 후반인데, 이제는 외로울 때도 됐잖아?”
서 전무의 얼굴에 소리 없는 홍소가 떠올랐다. 그는 이 회장을 이해했다. 돈 가지고 안 되는 여
자가 그에게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못해 신명날 지경이었다. 서 전무는 씩 웃고 나서 말했다.
“옹골지게 마음을 다져먹고 있는 여자가 웬만해서 외로움 따위를 느끼겠습니까?”
“하긴 그렇지. 독기 빼면 아무 것도 없겠지. 남편 원수 갚고, 그룹 정비하고, 참모들 군기 바로
잡고, 나름대로 경황이 없겠지. 하지만 언젠가는…….”
서 전무는 얼른 머리를 흔들었다.
“뭐야, 왜 머리를 흔들지?”
“그게 아니라……. 그 여잔 아마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듣자니까 오한수 회장 2세가 성장할
때까지라는 얘기를 했다는데 그 말의 의미가 좀 큰가요?”
“자네가 그 여자 열성 팬이로구만?”
“회장님은 아니십니까? 남자라면 아마…….”
“쳇!”
이병두 회장은 어이없는 얼굴로 웃고 나서 혼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기분은 나쁘
지 않았다. 여자로서 자신에게 만만찮은 대상이 지구상에 있다는 건 흥겨운 얘기였다.
“어쨌든 이번에 좀더 크게 밀어붙일 필요는 있어.”
서 전무는 얼른 고개를 주억거렸다.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따지기 전에 이병두 회장은 수년
동안 구경(G)그룹의 박 회장에게 적지 않은 호의를 받아 왔다. 그 보답으로는 적지 않은 고위
층 인맥을 연결시켜 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최고위층은 아니지만 박 회장의 사업에 꽤 도움이
될 만한 인사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박 회장은 자신이 연결시켜준 인맥의
한계를 훌쩍 뛰어 넘어 지난번에는 오히려 이쪽에서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도무지 그토록 배경이 든든하게 된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최고위층과 논스톱 교류가 어떻게
그토록 수월하게 이루어지게 됐는지. 그는 흘깃 이병두 회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알고 있을까?
“하여간 이번 싸움은 옆에서 보기에 아주 재미가 있는데 말이야. 막상막하 각축전으로 바뀌
고 있다면 50대 50이 아닌가 말야. 서 전무 생각엔 어느 쪽에 승산이 있을 것 같아?”
“그거야 물론 구경이지요. 회장님이 계시잖아요.”
이병두 회장은 피식 웃었다.
“당장이야 그렇지.”
서 전무는 그와 눈길을 마주치며 곧 이해했다. 변수가 작용하는 거야 비일비재하기가 마찬가
지겠지만 이병두 회장의 우호지분은 여러 모로 쓸모가 있었다.
“하지만 대명그룹도 녹록치는 않아. 대소 간에 아주 똘똘 뭉쳐 있는 것 같단 말야"
“사실은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요즘은 듣자니까 하루걸러 임원회의가 열리는데 전에
오한수 회장 생존했을 때처럼 연희동에서 열리곤 한답니다. 경영의 기본방침을 새로 세우기
위해 계열사 사장들도 자율적으로 참석하도록 돼있고요. 부회장이 직접 관장한다고 들었습니다.”
“음…….”
이병두 회장은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였다. 윤청이라는 여자에 대해 더 이상 알아볼 것
도 없었다. 그러나 연줄도 없이 그룹 총수에게 직접 발탁되어 현재는 거의 그룹을 장악하다시
피 하고 있는 장학출이란 자에 대해 흥미가 느껴졌다. 미국에 이민 나가 살던 양아치가 실력배
양 위주의 오한수 회장에게 발탁됐다면 알 만했다. 애초부터도 그는 장학출이 이끌고 있는 희
래산업에 군침을 삼키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요즘은 장학출 사장이란 자가 명콤비는 어쩌고 혼자 뛰고 있지? 그 남 부사장이
란 친구는 어딜 가고?”
서 전무는 문득 등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를 쳐다봤다. 자기말고 정보통이 따로 있
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소식통이 정확한 건 그로서는 재미없는 일이었다. 그는 미
래를 점쳐 틀리지 않았던 편이고 회장은 지금도 그래서 자신을 불러들였을 터였다.
“어떻든 싸움에 이겨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손에 때(피)를 묻히고 싶진 않아. 그건 서 전무도
명심하라고.”
이병두 회장이 낮은, 생각이 깊은 음성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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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남 회장은 방문을 꼭 닫은 채 서성거렸다. 어쩐지 조짐이 심상치 않은 느낌이었다. 요
며칠 이병두 회장의 태도에서 몇 가지를 빼면 석연치 않은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최
고위층 인맥에 대해 이병두 회장이 의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했지만 어쨌든 지
난 번 자신이 한번 과시해 보였던 허가권 때문에 이병두 회장은 그것으로 빚을 진 셈이었다. 그것으로
이번 대명그룹의 우호지분 확보에 총알이 든든해진 것은 일거양득의 성과일 수 있지만 반면 자신
이 분담해야 하는 대가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인터콤으로 박희주를 불러놓고 박희주가 나타날 때까지 또 생각에 잠겼다. 비로소 윤곽
이 잡혔다. 이병두 회장이 의심하고 있는 최고위층에 대해 울타리를 얼마나 높게 쳐놓았는지
확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고 박희주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유심히 사촌 아우 박희주를 바라다
보았다. 눈으로 저울질을 하듯. 입 밖에 내어 물을 필요는 없었다. 늘 먼저 눈에 띄었다. 그는
Q총재 특보와의 교류에 대해 타진하려던 생각을 중단한 채 물끄러미 박희주를 보았다.
박희주의 얼굴은 초췌했고 게다가 놈이 흘금거리듯 눈길을 보내오고 있다는 것은 또 어떤 시행
착오를 놈이 확인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게다가 또다시 어처구니없는 하자가 발생하고 있는 것
이 틀림없었다. 박희남 회장은 가슴이 철렁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그의 음성은 낮았다. 어차피 고함을 지른대도 방음이 충분한 방안에서 그가 음성을 낮춰 말한다
는 건 불벼락이 곧 떨어질 거라는 암시나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야?”
박희주는 번쩍 눈을 뜨고는 심호흡을 하듯 말했다.
“장호덕이란 자가 우릴 위협하려고 합니다. 지난 번 일로 양심선언을 하겠다고…….”
“뭐, 장호덕? 대명그룹 기획실장 녀석말이야?”
박희남 회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어떻게 그런 얘기가 나왔어?”
“신기훈에게 준 돈이, 그리고 자기가 받았던 돈에도 표시가 돼있는 걸 발견하고 여직 지하실에
감춰 둔 채 쓰지도 못하고 있다면서 이번에 그걸 터뜨리겠답니다.”
“뭣이?”
박희남 회장은 아연해서 뒤로 물러나 앉았다. 이건……. 그는 콱 숨이 막히는 듯한 얼굴로 멀뚱
거리며 박희주를 보았다.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리듯 노려보았다. 전혀 생뚱한 곳에서 일이 터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니! 그는 겨우 숨을 내뿜고는 깊이 신음하면서 여전히 멍한 눈길로 박희주를
바라보았다.
회장실을 나온 박희주는 곧 위경련이라도 일으킬 것처럼 명치 끝이 무거웠다. 인터콤이 울렸
을 때 이미 각오는 했지만 오히려 지금 당장 육신이 멀쩡해서 회장실을 물러나온 것이 더 불
길하게 느껴졌다. 날벼락이 떨어져도 메가톤급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어
디까지나 더 엄청난 것이 도사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힘겨운 인생은 이쯤에서 종을 치게 될지 몰랐다. 자신이 성한 발로 걸어 나온 것은, 회장이
이제 사촌동생 바라보기를 인간 말종에 쓰다 남은 몽당연필로 마지막 쓰레기통에 던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의미였다. 어제부터 사실은 그랬잖은가?
형은 어제 물었었다.
“Q총재 특보하고 사와리는 어떠냐? 가끔 만나는 거야?”
사촌형이 일본어를 섞어 말할 때는 자신을 더욱 시답잖게 여길 때였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기
분이 그닥 맑지 않다는 뜻이었다. 요즘 연거푸 그러고 있지만 어쨌든 질문을 던졌다는 건 아
직 대화의 여지가 있음을 의미했다. 이럴 땐 과장이 필요했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
었다. 자료라는 것이 없었다. 그 자신 경황이 없었다는 걸 박 회장이 모를 리 없는데 그는
묻고 있는 것이다.
“요, 요즘은 통…….”
“뭐, 통? 그동안 연락 같은 거 않고 지냈단 말이야?”
“아시다시피 요즘 제가…….”
“정신이 없었다 그거지? 쥐새끼 한 마리를 놓치고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행방조차 모르면
서 그래도 바빴다?”
“지금 확인중입니다. 그 어미나 동생이 있는 데만 찾으면 되니까 말입니다. 세 식구가 아
주 영영 잠적해버릴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불원간…….”
“불원간 언제? 하여간 차승조라는 녀석이 한 마디만 나불거리게 그냥 놓아 뒀단 봐라. 우
린 둘 다 죽어!”
박희주는 얼굴이 하얗게 돼서 고개를 끄덕였다.
“거, 걱정 마십시오. 녀석은 곧 제 발로 걸어오게 돼있습니다. 형님이 말씀하셨던 방법도
있잖습니까?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대로 놈은 절대로 입을 나불거릴 놈이 아닙니다. 그것
만은 제가 장담…….”
“집어 쳐! 넌 왜 그리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거냐? 녀석이 월급을 반납 했을 때 알아
차렸을 거 아냐! 놈이 뒷구멍으로 밀고하지 않을 놈이란 거야 그걸 봐도 알 수 있지만 월급
을 반납했던 건 법정진술마저 우리를 위해 거부하지는 않겠다는 의미였던 걸 몰라?”
“그, 그렇죠. 녀석은 원래 그런 놈이라 제가 심복으로…….”
“미친 놈! 심복? 반죽음 만들어서 아주 싹 잘라버리지, 그냥 놔주고 심복이래?”
“그래서 제가…….”
“나가봐.”
도무지 말이 연결되지 않았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터맥 작업뿐이라면 또
모른다. 그런데 차승조가 바로 새벽 네 시에 Q총재의 지하 차고로 귀에 구멍 뚫린 세종대왕
6만 명(60억 원)을 직접 실어 날랐던 장본인인 것이다. 그런 차승조가 적이 되어 돌아서
있다는 건 뼈가 녹을 듯 긴장되는 일이 당연했다.
박희주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숨이 답답했다. 한숨을 연거
푸 뽑아내며 그는 주차장 경비가 절을 하는 것도 못 본 척 그냥 거리로 나섰다. 지역적
인 관계상 거리는 좀 한산한 편이었다. 횡단보도가 가로지른 곳까지 와서 그는 하늘을 올
려다 보았다. 입맛이 썼다. 형이 괘씸한 생각도 들었다. 저도 사람일 텐데 부려먹을 만큼
부려먹고 나더니 점점 눈 밖으로 내몰고 있다.
그는 아드득 이를 갈면서 시그널 라이트가 깜빡거리기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횡단보도에
들어섰다. 그러나 반쯤 가다 돌아선 박희주는 한숨을 쉬며 다시 구경빌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심한 인생이라니, 마땅히 갈 만한 데도 생각나지 않았다.
단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매끄러운 흰색 알약뿐. 박희남 회장의 안주머니에 스페어
심장처럼 소중히 간직되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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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영이라는 그 사람, 왜 거짓말을 했지? 윤청은 틈만 나면 중얼거렸다. 게다가 왜 그토록 서둘고 있
었던지. 누군가를 피해 달아나는 사람 같지도 않았었다. 분명히 말해서 그는 뭔가를 보았거나 실제로
엄청난 사실을 발견했던 거라고 가정한다면, 뭔가를 보았던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지금도 거짓을 말하고 있잖은가? 5층을 거의 다 올라서 붕괴의 조짐을 알아차렸을까?! 혼자서
만 그것을 간직한 채 그가 아내를 봤을까? 아무것도 모른 채 커피숍에 앉아 있던 자신의 아내를? 그렇다
면, 자신만이 알아차린 일촉즉발의 위험 속을 혼자서만 민첩하게 죽음의 현장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는 얘기가 아닌가?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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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라는 우두커니 남형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전혀 예상치 않았던 말을 꺼냈다는 것에
놀란 건 잠시였다. 번개처럼 머리 속에 스며드는 생각이 그녀의 마음속에도 스며들었다.
N호텔의 로비라운지에 잇대어진 식당에는 오늘 따라 손님이 없었다. 이예라가 자주 오는
곳이고 트리오로 구성된 뮤지션이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안쪽의 널찍한 자리에 앉은 그들은
보이지 않지만 피아노 연주에 섞여 기타와 베이스 첼로가 은은히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
에까지 흘러들었다. 로맨틱한 분위기였다.
“그러니까, 형준 씨 마음이 우리가 결혼을 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얘기지요?”
두 사람은 눈길을 마주 했다. 그녀의 질문이 바로 음악적이라기보다는 추상 학에 가깝다. 아니, 화학적
인 것도 아니고 계산 학에 가까운지도 몰랐다. 지나치게 과학에 근거를 두고 있는 표정조차
가 그랬다. 감정은 과학과는 거리가 멀고도 남을 것을.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너무 오래 생각이 많았던 탓일까? 아니면 너무 많은
우여곡절 때문에?
남형준은 상당히 오래 생각한 듯했다. 마침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덧붙여 말하기까
지 했다. 그래요, 하고. 하지만 그 역시 감정에서보다 이성이 앞서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기다렸어요, 전. 그 말을 오래도록 기다렸다구요.”
이예라가 말했다. 그러나 강조어가 뒤 따르는 말이었다. 그녀는 단순히 대답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요, 우리 결혼해요, 라고.
이예라는 자조적인 웃음을 웃고 나서 아주 느리게, 천천히 생각해 보며 말했다.
“형준 씨의 그 제안 말인데요. 본인의 단안에 의해서인가요, 아니면 어떤 타의에 의해서
내려진 결정인가요?”
남형준은 잠자코 있었다. 그는 거짓말을 거의 할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선의의, 상대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기 위한 것이면 어쩔 수 없는 때도 더러 있지만 그것은 분명 색채와 저의가 다
른 거짓말이었다.
생각 끝에 이윽고 그가 말했다.
“사실은 지난 번 예라 씨가 나를 오해하는 걸 보시고…….”
이예라가 남형준의 말을 가로챘다.
“오해 받기 싫으니 어서 결혼해라, 그러셨다는 거지요?”
남형준은 문득 이예라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신경이 무딘 여성이 아니란 것은 알만큼 알고 있
는 바였다. 그러나 뾰족하게 반응한다는 자체가 윤청 부회장에게 연관이 있는 이상 가벼운 얘
기는 아닌 듯이 느껴졌다.
“그렇게 말씀 하신 건 아닙니다. 예라 씨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계
셨을 겁니다.”
“그건 형준 씨의 추측이겠지요? 제게는 마찬가지긴 하지만요.”
“예라 씨. 그동안 상처가 많았다면 제가 사과하지요. 허지만 곡해를 하는 건 옳은 얘기가
아닙니다.”
“제가 곡해를 한다구요…….”
한참동안, 그녀는 마치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생각에 잠겨 있었
다. 더 중요하고,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진 느낌이었다.
그녀는 대명그룹이라는 거대 조직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본부인 거나 다름없는 연희동 오한수
회장의 저택, 아니다. 지금은 분명 윤청 부회장의 저택이 아닌가? 저택. 이름 하여 저택인
연희동 본부에 남형준이 소속되어 있는 것을 그녀는 생각했다. 결국, 한 치도 윤청 부회장의
영향권 밖으로는 나설 수 없다는 것도. 그렇다면 뭐지? 결혼을 하고, 그가 대명그룹의 조직
구성원으로 그룹 총수나 다름없는 그녀의 지휘를 받으며…….
그녀는 현명한 여자였다. 아니, 지나치게 예리한 데가 있는 지도 몰랐다.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변호사를 아버지로 무풍지대를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혼은 그런 것이 아니
라는 생각, 작은 불씨나마 눈앞에 뚜렷이 지켜보면서 되는 대로 하는 그런 것은 결혼이 아니
었다. 사랑한다는 것과는 엄연히 별개였다. 엄연히.
그녀는 활대를 들고 음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지휘하기 위해 바이얼린을 전공
했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이 리드를 하고 자신이 지휘하는 것을 결혼 생활로 삼고 있었다. 더구나
나이가 들었다. 물불을 가리지 못하는 그런 시절은 지난 것이다.
그녀는 넌지시 바라보며 남형준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 나서 말했다.
“제가 많이 괴로웠던 건 사실이에요. 전 분명히 형준 씨를 사랑하고 있고 남편으로는 더 할
나위 없이 존경할만한 분이죠. 잠 못 이루는 밤을 수없이 지낸 것도 사실이구요. 번민, 애증, 그런
것들이 저를 화나게 했어요. 번연히 알면서도.”
남형준은 얼굴을 붉힌 채 유심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자신도
또한 생각에 빠져들면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제가 뭘 번연히 안다고 하는지 듣고 싶으신 거지요? 그래요. 전 알고 있었어요. 형준
씨가 결코 불순한 의도에서 그 분을 연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를 만난 이전에 이미
마음이 잡힌바 되었기 때문에 좀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에요. 먼저 저를 만났어
야만 했어요. 그랬으면 우린 상당히 빠르게 불꽃이 피어올랐을 지도 모르죠. 우린 서로
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만큼 닮은 데가 있으니까. 아니, 닮았다기 보다 대뜸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요소가 그만큼 많다는 얘기죠.”
남형준은 한숨을 내어 쉬었다. 조금 탈진한 느낌이다. 혼란과 번민을 마감하려고 너무 서
둘렀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물이 흘러가는 대로 가만히 둘 것을. 하지만
지금도 거스를 생각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결론이 나지 않는 채 둘은 저녁 식사만을 끝내고 헤어졌다. 그리고 이예라는 밤 내 잠을 이루지
못했고 새벽녘에 그녀는 울었다. 운명이 너무 짓궂은 듯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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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설계 송기영이란 남자에 대해서는 대명건설의 이종한 사장에게 물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윤청
은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범죄 사실에 대해 자신이 신고해야할 필요조차도 그녀는
느끼지 않았다.
오로지 경황이 없고 바쁘기 때문만은 아니고 의무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책임소재가 아닌 이상
조용히 지켜보는 것만으로 족했다. 부과된 골칫덩어리들만으로도 늘 머리 속은 포화상태인 셈이었다.
그가 설령 붕괴현장을 혼자서만 빠져 나왔다손 치더라도 그랬다. 또는 그가 붕괴되고 있는 건물을
눈으로 학인하면서 미필적 살인행위로 일부러 아내를 방치하고 완전범죄의 은닉을 도모하고 있
다손 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본업을 지닌 누군가가 밝혀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문
제가 있었다. 나타나고 또 나타나고, 유독 오륜설계 송기영이라는 남자가 단골메뉴처럼 텔레비
전 화면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본인도 지겨울 것이 틀림없다. 아니, 어쩌면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가 분명 붕괴의
조짐을 알면서 혼자서만 살아남기 위해 거꾸로 에스컬레이터를 횡단했다면 목격자가 있을 지
도 모른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따져보면 그것을 기억해 내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윤청은 실소를 머금으며 그렇다면 어쩔 텐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어째서 거짓말을
하는지에 대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신경을 긁어대고 있는 종류에 대해, 그냥은 묵과할 수 없다
는 한 여인의 참사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주 머리 속에 떠오르는 데 그녀의 괴로
움이 있었다. 그건 또 다른 의미의 고통이었다. 그리고…….
멀게 그리고 가깝게 연관이 있었다. 꿈이다. 마치 예고편처럼 그토록 선명하게 눈앞에 펼쳐져 보
일 수가 있는지, 윤청은 생각할수록 소름이 끼쳤다. 또 하나의 불가사의는 그가 내려올 때 자신
이 앞에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를 막았어야만 했을까?
팔을 활짝 펴서 그를 저지했다면 그는 역행할 생각을 포기하고 5층으로 다시 뛰어 올랐을까? 그랬
다면 그는 아내의 손을 잡고 그곳을 빠져 나왔을까? 아니면 고함을 쳐서 백화점이 곧 붕괴될지도
모른다고 모두에게 알리려 들지는 않았을까? 윤청은 오싹 했다. 그녀는 머리를 젓고 사물에 대해
더 이상 과민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생각하지도 말고, 그리고 아무 것도 더 따
져보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허사였다. 모든 걸 깡그리 기억 속에서 털어내기 위해 애를 쓰면 쓸수록 좀 더 생생하게
눈앞에 떠올랐다. 허둥지둥 밀치며 지나가던 한 남자의 프로필이 뇌리 한 가운데로 커다랗게 부
각되어 올랐다. 이제는 지울 수 없는 환영이 되어 버렸다.
윤청은 마침내 그 남자에 대해 좀 더 알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물끄러미 허공을 응시했다. 오륜설
계 송기영 사장이라고 했지.
‘그래, 언제 기회 봐서 찾아가 보자.’
방송국 리포터가 그 남자의 사무실 위치를 알고 있을 것이다.
장학출은 뒷마당으로 해서 지하실 계단으로 다가갔다. 그는 가슴이 설레고 있었다. 결국, 디데
이를 맞은 셈이었다. 기적이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고 성공의 확률은 겨우 50%였지만 누구도 초조
감을 들어내 보이지는 않았다.
윤청은 벌써 스톡하우스의 회의실에 내려와 있었다. 이미 예전의 모습이 사라진 스톡하우스의
면모는 회의실은 며칠전보다 더 온갖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안방은 벽장을 헐어 목욕실을 겸한 세
면실을 만들었고 아직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엘레나 콘드라티바를 위해서였다. 남성들 전용의 휴식
공간은 따로 있었다. 돈은 편리한 물건이었다. 모든 것이 급행으로 진행이 됐지만 스톡하우스는
이제 모두들 환호성을 떠올렸을 정도로 훌륭한 과학기지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회의실에 흰 가운을 입은 박사들로 빼꼭히 들어차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릴 웨이스는 감기 때문에
올 수가 없었고 자신의 믿을만한 심복을 시켜 완성된 기계만을 보내왔다.
여섯 명의 박사들이 실험 가동 중인 차승조의 다리를 사이에 두고 막 점검을 끝마치고 나온 길이었
다. 새로운 기적이 일어날 것에 대비할 필요는 없었다. 창조적 현실 그 자체가 기적이었다. 부착
되지 않은 채 저절로 움직이는 다리는 차승조를 기다리며 조용히 숨쉬고 있는 듯했다. 다리라기
에는 기계인 것이고 기계 이전에 이미 다리의 형태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은 것이 특색이랄까,
어쨌건 훌륭하게 완성된 작품이었다. 거의 무한대라고 할 수 있는 자금 투입의 결과였다.
수술실이라기엔 우주 전략 실에 버금하는 곳에서 김성진 박사의 믿을 만한 제작팀이 완성해낸 걸
작품이긴 했지만 아직 낙관하기에는 일렀다. 피땀의 노고는 돈으로 한산할 수 있는 것이 아미었
다. 그렇기는 했지만 김성진 박사는 심적 부담을 안은 채였고, 윤청 역시 김성진 박사의 노고를
금원으로 한산할 수 없는 것에 그지없는 심적 부담을 지닌 채였다. 그렇게 누구 한 사람 마음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 웬만큼 피가 마르고 손에 땀이 쥐어지는 결과는 시간
이 흐를수록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일단 윤 부회장께선 가서 한 잠 주무시고 나오세요.”
김성진 박사가 말했다.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여유로운 농담으로 그럴싸한 말이었고 윤
청은 흔쾌히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더 지체하지 않고 얼른 돌아서 연구실을
나갔다. 안에서는 수술 준비가 끝나고 있었다.
지하실 층계를 올라 밖으로 나오다 말고 윤청은 멈칫했다. 바로 앞에 차승조가 나와 기다리
고 있었다. 그는 아침에 윤청이 지시했던 대로 김하일 비서로부터 오한수 회장이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휠체어에 앉은 채였다. 윤청은 차승조와 눈이 마주쳤고 그가 일부러 나와서 자신을 기다
리고 있었음을 알았다. 열려져 있는 창문 너머로 손 여인이 오락가락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때요?”
윤청은 가볍게 물었다. 자신조차 알 수 없는 질문이긴 했지만 차승조는 조용히 웃었다. 그는 손
을 들어 방금 윤청이 올라왔던 층계 짬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매우 주저하면서 말했다.
“머잖아 그 층계를 제가 뛰어서 올라오는 걸 부회장님께 보여드리겠습니다.”
“뛰어 올라올 필요는 없어요.”
윤청이 말했다.
“바쁘지 않은데 그냥 걸어 올라와요. 시간은 많으니까.”
차승조는 조용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함부로 웃음을 떠올려 보이기에도 소중한
분에게 그는 자신이 너무 가볍게 웃어 보인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직후였다.
“웃는 모습이 좋은데 왜 안 보이려고 그래요? 난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인줄 알았죠. 나를 닮았
나 했고요.”
차승조는 멈칫하고는 말했다.
“어떻게 제가 감히 부회장님을 닮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건 그녀에 대한 모독이라는 듯 그는 스스로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감히, 라는 말은 터무니없어요. 우리가 닮았다면……. 건 정말 좋은 일이에요. 남매처럼……, 난 차
승조 씨가 내 남동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아, 그러지 말고 오늘부터 우리 남
매가 되기로 하죠?”
차승조는 금방 얼굴이 빨개졌다.
“두 시간 후에 수술에 들어갈 겁니다.”
김성진 박사가 말했다. 인턴이 두 명 도착해 더 있었고 그들은 지금 준비를 끝낸 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심호흡을 하고 있는 것처럼. 간호사는 필요했지만 부르지 않았다.
극도의 보안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긴 했지만 현 상태로 인원은 충분했고 모든 것은
완비된 상태였다.
“족 관절 부분에 약간의 보완이 필요하시다고 했던 거 다 완비가 됐나요?”
윤청이 물었다. 여전히 긴장이 되고 있었고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확신에 찬 표
정이었고 다만 의례적인 질문을 하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얼굴에 떠올려 놓고 있었다. 하
지의 3대관절에서 고관절과 무릎관절(슬관절)은 양호한 편이지만 발목 관절에 약간의 보완이
필요하다는 말을 김성진 박사는 어제 했었다.
“네. 대퇴골에 삽입된 기계의 완전가동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슬관절(무릎관절)이
놀랄 만치 유연합니다. 대퇴와 하퇴가 상오 반응을 하도록 연결이 되어 있으니까 일 개월
에 한 번 꼴로 초음파를 이용해서 충전 작용만 실행하면 다리 기능은 전천후 가능성을 유
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어제 제가 우려했던 것은 경골과 비골 모두가 족근골과 중족골, 즉
족관절과 족지 사이의 연결이었습니다만 충분히 보완이 됐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염려하시지
않아도 되실 겁니다.”
“나. 걱정은 안 해요. 다만 정상인의 운동영역을 넘어선다는 것은 에너지 소모 또한 클
게 아닌가, 본인에게 심적 부담을 과중하게 안겨 주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거예요. 말을 타면
경마를 잡히고 싶어 한다잖아요.”
김성진 박사는 소리를 내어 웃고는 말했다.
“장학출 사장님은 내게 논문이 그대로 사업에 제출 하도록 부탁을 하던데, 윤 부회장께선 기업의
이윤은 뒷전이시군요?”
비로소 윤청은 웃었다. 남형준의 감격어린 표정은 당연했다. 그 웃음의 의미는 인간미를 포함한
기업가 정신의 혼합체인 것을 알아차린 탓이었다.
그녀는 조금 부끄러워하면서 말했다.
“기업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도 제 2의 차승조 씨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는 있으니
까 장학출 사장님이 아주 비인간적인 장사치는 아니신 거라고 봐요. 그 분은 황금 알을 낳는 오리
한 마리로는 만족할 분이 아니거든요.”
“그렇습니다. 저한테 그러시던데요!”
남형준이 웃으며 말했다.
“오리와 새라고. 차승조 씨는 황금 알을 낳는 새라던가요?”
“새와 오리, 괜찮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점에 대해서 윤청은 곧 흥미를 잃어가는 얼굴로 김성진 박사를
향해 물었다.
“피부를 연결하는 건 결코 문제가 없겠지요? 이제껏 동면을 하고 있던 다리가 새로운
세포를 이겨내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겠는가고요.”
“그 점이 염려되지 않는 건 아니죠. 그러나 신경 세포를 잇는 국제적 대가가 지금 대
기 중이니 걱정 마십쇼.”
“박사님을 포함해서 말이지요?”
“오, 그런가요?”
여유 있게 웃으며, 그러나 김성진 박사는 곧 몸을 일으켰다. 그는 부드러운 눈길로 윤청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세계 최초의 시술이어서 좀 긴장은 됩니다만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갖출 건 완벽하게 다
갖춰진 상태니까요, 잘하면 이번에 윤 부회장께서 또 하나 히트를 날리게 되는 건데, 하여
간 전 대견하기만 합니다.”
“터무니없는 제안을 받아 주신 분이 누구신데요!”
윤청이 말했다. 남형준이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그 때 김기섭 원장이 안으로 들어 왔다.
“아, 그러잖아도 왜 오시질 않나 했지요.”
윤청은 말하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김하일 비서에게 그가 도착하는 대로 스톡하우스로 내려
와 달라는 말을 했었다.
“좀 늦었지요? 죄송합니다. 오다가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가 났지 뭡니까. 깅에 세워 놓고
그냥 와버리고 싶더군요.”
약속 시간이 정확하기로 그는 김성진 박사와 매우 비슷한 데가 있었다. 오늘은 차승조의
심리 상태에 대해 그와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었고 김성진 박사 역시 그와 대화를 갖기를 원했다.
윤청이 김 박사와 냠형준을 번갈아 보며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듯 말했다.
“전에 차승조 씨가 마인드 컨트롤 훈련을 했던 사람이래요.”
그녀는 곧 김기섭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차승조 씨의 적성에 대해, 그러니까 근래의 심리적 자세와 수술 후의 본인이 지니게 될 의
지에 대해 김 원장님께서 두루 말씀 좀 해드리세요.”
“네…….”
김 원장은 동시에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고 나서 말했다.
“좀 전에 잠시 만나보고 내려올까 하다가 곧바로 오긴 했지만 시간이 흘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제가 그제 왔었지요? 긴 얘긴 나누지 않았지만 모든 걸 물이 흐르듯 순리에 맡기
는 건 여전한 것 같았습니다.”
김성진 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 했다.
“젊은 사람이 전혀 말이 없이 조용한 게 대단한 것 같아요. 웬만하면 궁금증이 이는 얼굴
이라도 할 텐데, 그것도 아니고.”
“저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 것 같기도 하더군요. 어쩌다 지나는 길에 보
면 늘 독서를 하고 있었거든요.”
남형준의 말에 김기섭이 웃으며 말했다.
“검사(劍士) 책벌레가 별명이죠. 한문에도 조예가 깊은 편입니다. 당나라 태종의 정관정
요(貞觀政要)를 웬만큼은 읽을 수 있을 겁니다.”
남형준이 멍한 눈길로 김기섭 원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언뜻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큰일 났군요. 제가 지금 앓고 있는 분얀데.”
김기섭 원장은 근대 박사들의 취약점을 건드린 것에 당황하면서 웃음 띤 얼굴로 건너다보
는 김 박사를 향해 얼른 화재를 바꾸어 말했다.
“박사님께서도 아시다 시피 조용하고 반석과 같은 사람이니까 심리적인 초조감 같은 건
전혀 지니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다만 회복이 되면 연습을 좀 서두를 거라는 생각이 듭니
다. 나서서 할 일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요.”
윤청은 대충 짐작이 갔지만 입을 다문 채 김 박사를 바라보았다. 김 박사의 얼굴에 그 점
에 대해 그다지 문제될 것은 없다는 듯한 표정이 떠오르자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녀가 말했다.
“의지력이 강한 만치 스스로 조절하겠지요. 김 박사님께서는 회복 기간을 어느 정도로 보세요?”
김 박사는 얼른 헤아리는 눈길로 윤청을 보며 대답했다.
“빠르면 3주 쯤? 아마 그 전후가 되겠지요.”
“그렇군요!”
윤청은 반색을 하며 말하고는 대뜸 김기섭 원장을 향했다.
“김 원장님. 매일 오셔서 함께 연습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훈련 감독을 겸해서요.”
“네! 그렇게 해야죠.”
김기섭 원장은 기꺼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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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에 놈을 처치하겠습니다.”
박희주가 말했다. 박희남 회장이 급히 호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내드는 것을 보며 그는 모골이
송연해져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
구급약 한 알을 얼른 입안에 털어 넣고 물도 없이 삼킨 박 회장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
었다. 방금 전까지도 심장 발작이 초읽기에 들어간 얼굴이었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박희
주는 문득 형의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흰 알약이 바뀌어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했다. 다음
순간 그는 소스라쳤고 얼른 머리를 저었다.
구경(G)그룹 본사에서는 연일 대책회의가 이어지는 가운데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는 박희주에게
또 하나의 불벼락에 가까운 정보가 날아들었다. 아직도 심복 김준희는 가끔 뒷북을 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충분히 쓸모가 있는 녀석이었다. 특히 이번 경우에 한해서 박희주는 그것을 인정했다.
녀석은 재수가 없는 놈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건 최근 들어 가끔 있었긴 하지만 정
보 수집의 귀재인 것만은 결코 부인할 수는 없을 듯 했다. 헌데 녀석의 정보처리가 엉망이었다. 이미
회장에게 보고가 되어버린 것이다.
박희남 회장의 노발대발은 근래에 들어 더욱 심해지고 있었는데 이번 경우는 그냥 노여움으로
만 끝날 것 같지 않는 기미조차 보이고 있었다.
“이 미친놈아! 보니까 다 저질렀던 짓거리가 모두 우박이 되서 날아들고 있는 중이라구!”
“아, 형님…….”
창가에 놓인 동양란 하나가 박살이 난 직후였다. 비서가 나타날 리는 없었다. 방음이 충분한
회의실 안에 두 사람 뿐이었다.
박희남 회장은 거의 이성을 잃고 있는 듯했다.
“형님이고 나발이고 이 빌어먹을 놈아! 세종대왕 귀걸이로 몇 놈 꼼짝 못하게 만들겠다던
놈이 그래 엉뚱한 데서 발목을 잡히다니, 그리고 이제는 실험용 쥐새끼나 갖다 바쳐?”
“무, 무슨 말씀이신지요……?”
“몰라서 물어?”
“아!”
더 이상 물을 필요조차도 없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보다 박 회장이 어떻게 그 모든 걸 알
았는지 놀라웠다. 역시…….
“하, 하지만 형님. 녀석이 회복되려면, 아니 그 기적의 신 발매니 하는 것들이 임상실험을
끝내려면 앞으로 2년 아니, 5년은 더 걸릴 겁니다. 그전에 놈을 처치하겠습니다.”
박희주는 일어서 있었고 점차 뒷걸음질을 치면서 말했다. 그대로 앉아 있어 봐야 봉변만 당할
뿐이었다. 동양란 화분 하나가 더 날아오기 전에 50이 넘은 몰골에 걸맞지 않기는 하지만 얼
른 사촌 형의 사정거리 밖으로 빠져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거의 도아에 다다라 박 회장을 보며 말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형님은 이병두 회장님과 친분이나 잘 다독거리시고, 다
시 도, 도움을 요청 하세요. 전 후환을 없애겠습니다. 맹세코 하겠습니다.”
그가 도아를 끌어 닫는 것과 동시에 동양란 화분 하나가 더 날아와 도아에서 박살나는 것
을 충분히 알아차리고 있었다. 창가에 있던 동양란 화분은 모두 일곱 개였다. 그런데 오늘
세 개가 남았을 것이었다. 그는 이를 갈아붙일 힘도 없는 채 겨우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끈질겼지만 이번만은 거의 속수무책인 것을 느끼고 있었다. 김준희를 불렀다. 밉긴
했지만 물에 빠진 터에 짚오래기나마 붙잡아야만 했다. 어쩌면 지금 당장 녀석의 잔머리가 위로
를 안겨 줄지도 몰랐다. 문이 열리고 김준희가 안으로 들왔다.
박희주가 말했다.
“뭐든 하라구! 지금 당장에 말이야!”
녀석이 재롱둥이처럼 귀에 두 손을 붙이고 산토끼, 토끼야 를 부르더라도 그는 당장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결국, 얻어냈다. 녀석이 말했던 것이다.
“호랑이가 물어 가도 정신을 차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머잖아 놈은 분명히 복수를
하려고 올 겁니다. 그런데 기다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먼저 유인해 내야지요. 어쨌거나 몸을
제대로 추스르기 전에요.”
그의 말에는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방법이 문제였다. 연희동의 철옹성에 꼼짝
않고 있는 놈을 어떻게 유인해 낼 수 있느냐 말이다.
“말이야 뭘 못해? 거기가 어디냐 말이야! 놈은 지금 털끝 하나도 밖으로 내밀지 않고
있는데 무슨 수로 유인을 해 내?”
박희주는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그러나 기대를 버리지 않은 채였다. 김준희 녀석이 자신 있게 지
껄이고 있는 것에 뭔가 있으리라는 그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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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조의 다리 봉합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무엇보다 엘레나 콘드라티바 박사의 공로가 큰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는 사실이었다. 상처의
봉합 부분에 치유를 촉진할 수 있는 유전인자와 콘드라티바 교수가 추출하여 배합한 미생물의
활용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오, 결국 해냈구만! 드디어 600만 불의 사나이가 탄생한 거잖아!”
저녁에 장학출 사장은 전화통이 깨져라 큰 소리로 외쳤다. 예상외의 결과였고 연희동은 축제의
기분에 휩싸였다. 남형준은 물론 윤청의 기쁨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관계자 모두는 미지의
세계가 도래하고 있는 듯이 느꼈고 환희는 절정에 다다랐다.
장학출은 회사 일로 바쁜 와중에서도 하루 진종일 손에 땀을 쥔 채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터에 더할 수 없는 감흥에 젖었다. 그는 일어서서 사무실 안을 정신없이 맴돌면서 거듭 소리쳤다.
“됐어! 이젠 됐다구!”
그는 무엇이 이토록 즐거운 것인지 잠시 동안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차승조인가, 아니면 대명그
룹의 미래인가? 생각해 보니 둘 다였다.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다. 거기에 잔뜩 호감을 느
끼기 시작한 젊은 차승조가 온전한 육신을 되찾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대명그룹은 황금 알을 낳
는 새 한 마리를 더 부화시켜 탄생케 했다는 것! 오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얼른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는 득달같이 이응렬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변호사님! 이제야 말씀드리게 된 걸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따님께도 전화를 좀 거시고 지금부
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
이응렬 변호사의 어리둥절한 음성을 들으며 그는 무당처럼 읊어대기 시작했다.
“남 박사가 지금은 외국 출장 중이 아닙니다. 며칠 전 다녀오긴 했지만요. 연희동에 대명그룹의
미래를 짊어질 전진기지가 하나 서고 있었거든요. 김성진 박사를 모시고 뒷집을 하나 구입해서
연구실과 수술실, 그리고 회복실을 만들었던 겁니다. 김성진 박사를 도와 남 박사가 크게 일조를
했던 거고 말입니다!”
그는 마지막 목이 메는 바람에 더 길게 설명을 하지 못했다. 그는 수화기를 놓으며 벅차게 끓어
오르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크리넥스 통을 끌어당기고 휴
지 한 장을 뽑아 들었다.
눈앞으로 길게 과거의 편린들이 영상이 되어 흘러가는 듯했다.
장학출 사장의 시대가 막을 열고 있다는 것은 대명 그룹의 조직 구성원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가 거쳐 온 과정은 경이감을 느끼기에 족했다. 이제 와 그에게 진군의 나팔은
필요 없었다. 그러나 어항 속을 달리는 물고기처럼 민첩하면서도 조용했던 어느 날, 오한수 회장이
떠나가 버렸던 것은 그에게 엄청난 실의와 통한의 시간들을 남겼던 것이 사실이다. 그에게, 진정으
로 존경하며 사모한다는 그 말 한 마디를 건넬 수 없었던 통한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 비중은
엄청난 것이었다.
때문에도 더 분발했던지 모른다. 하루 열여덟 시간을 회사에서 보냈다. 대명그룹이라는 거대 함선
이 기우뚱거림을 느낄 때마다 물에 뜨는 옷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보완 작업에 무섭도록 몰두했었
다. 어쨌든 자신이 업고 들어온 프로젝트는 노하우를 정립해 감에 따라 전망이 결코 나쁘지 않다는
것을 모두들은 알게 되었다. 그룹 내에서 그가 의견을 제시하고 반대에 부딪히거나 거부 반응이 초
래되는 일은 전혀 없었다. 모가 나지 않게 그런대로 무난히 넘겼다. 거대한 조직력을 등에 짊어진
덕분이었다. 윤청 부회장의 끊임없는 배려 덕분이기도 했다.
그는 가슴에 문득 미세한 분말처럼 알알이 접어드는 원소의, 그것이 한 여인에 대해 느껴지는 감정
에 대한 자각임을 느끼며 이제 스스로를 억제하기에도 이력이 난 자신을 돌아보았다. 이제는 신앙으
로 바꾸어버린 그 아픔에 대해서도 골똘히, 그리고 상당히 유연해지기 시작한 자신에 대해 차분하고 냉정
하게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이제껏 하느라 했었다. 그녀에 대한 감정은 조절해야만 하는 특성을 체념하
기에 이르러 있었고, 자신의 말이나 주장을 번복하지 않는 것처럼, 내뱉은 말을 철회하지 않았던 것
처럼, 자신의 결심이 결코 약화되지 않을 것을 확신했다.
그에게 과거란 엄연한 미래인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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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이 지나면서부터 차승조의 수술 결과는 좀더 뚜렷해졌다. 매 시간마다 점검이 끊이질
않았고 다시 한번 샴펜을 터뜨리기에도 충분했다. 무엇보다 차승조의 심적인 안정이 더
큰 성공을 부채질하고 있는 듯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기쁨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바람
에 더욱 호전이 되고 있는 것 같았다. 맥박, 호흡, 충만한 기쁨으로 들떠오를 듯한 기쁨 등이
원인인 모양이었다.
시간이 감에 따라 피부의 봉합 부분에서도, 인공지능 전자부품기계조작에서도, 특별히 거
부를 들어내지 않은 채 움직임에도 원활한 것이 들어나고 있었다. 매순간 놀랄 만치 호전되고
있었다. 환자가 언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나 싶을 정도였다.
차승조의 다리 봉합 수술결과가 완벽한 성공으로 판정이 난 다음날 오후, 연희동 회의실은 이
제 입추의 여지도 없이 대명그룹 권속들로 들어찼다. 서의개발 김 실장은 오늘 연한 갈매기색
수츠 차림이었다. 누구의 눈에도 뜨일 만큼 매력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늘 특별히 김한중 이사가 사회를 맡기로 하고 있었다.
“자, 모두들 앉아 주십시오. 이응렬 변호사님께서는 어제 처음 보고를 접하시긴 했지만 장학출
사장님께서 아까 자세히 설명을 하신 바가 있으실 겁니다. 자, 변호사님? 한 말씀 해주실까요?”
이응렬 변호사가 만면에 웃음을 가득 실은 얼굴로 일어섰다.
“무엇보다 전도유망한 젊은이의 신체를 온전히 재생을 시켰다는 점에서 정말 기쁘게 생각합
니다. 그리고 윤 부회장님. 또 김성진 박사님과 남형준 박사님, 그 밖의 네 분 박사님들께 참,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아마 열흘은 그 표현을 찾아 말씀드려도 모자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감회가 이는 듯 잠시 말을 멈추고 여럿을 차례차례 돌아보고 나서 약간은 젖은, 낮아진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런 날 오 회장님이 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여간 기쁩니다. 그
리고 우리 박사님들, 정말 훌륭하십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더니, 정말 그런 듯싶
습니다. 그동안 큰 불행을 겪으면서도 우리 대명그룹 권속들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심기일전
노력했던 보람이 오늘 더 빛을 보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나이 내일모래면
76세인데 이런 날을 보기 위해 좀 더 오래 살아 왔나 생각이 들 정돕니다. 무엇보다 우리 윤청
부회장님 그 노고를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가 수그려지고…… 하여간 기쁩니다. 정말로 기쁘기
한량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한중은 이응렬 변호사를 향해 고개를 한번 숙여보이고는 이내 윤청을 향해 얼굴을 돌
렸다. 그가 말했다.
“이제부터 부회장님께 오늘을 맞게 되신 소감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부회장님. 한 말씀 부탁
올립니다.”
어쨌든 오늘은 대단한 날이었다. 윤청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먼저 이응렬 변호사
와 박용찬 회장을 향해 목례를 보내고는 말했다.
“모두 여러분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때에 대외적인 어떤 압력에도 끄떡없이 버텨주신
여러분들의 덕택으로 어쨌든 이번에 김성진 박사님을 모시고 새로운 창조를 이룩할 수 있었다는
데에 더 의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그럼,
무엇보다 오늘의 이 자리가 있도록 혼신의 힘을 기울여 주신 김성진 박사님께 감사를 드리며 잠시
박사님께 소감을 한 말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성진 박사가 얼른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윤청이 가장 겸연쩍어 하는 박수는 터져 나오지 않
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김성진 박사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인 채 여럿을 향해 인사했다.
“여러분들도 기쁘시겠지만 저의 기쁨은 아마,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수십 배가 더 클 겁니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더한층 감개가 이는 듯 그윽한 눈길로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인류의 발달과 더불어 우리 의학은 꾸준한 발전을 거듭해 오긴 했지만 아직 다 정복하지 못한
부분이 많습니다. 근래에는 대체의학으로 전인의학을 비롯해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손상되어 절단했던 하지의 이미 썩어버린 부위를 도려내고 많은 시간이
경과한 후에 다시 봉합하는 재조립의 기술은 아직 개발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행히
도 세계 최초로 우리가 해내게 되었습니다. 오로지 대명그룹 산하에서 윤 부회장의 점화로 이루
어내게 된 것입니다.”
실내에 잠시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김성진 박사는 지난 날이 생각난 듯 빙그레 웃으며 말
했다.
“한밤중에 자다 말고 제가 난데없이 전화연락을 받았을 때부터 그 불가사의의 막은 올랐었지요
. 경부고속도로 한 복판에서 서로 만나 엠브런스에 환자를 옮겨 실을 때쯤 환자는 거의 회생 불가
능에 가까운 상태였습니다. 저는 자다 깨어 전화를 받았긴 하지만 윤 부회장의 음성만으로도 응급
환자의 상태는 짐작이 갔습니다. 만약 그때 서울로 오고 있으면서도 도중에서 엠브런스로 교체하기
까지 그 순발력이 아니었으면 차승조 씨는 지금 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 그리고 과거에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나 보셨 듯 600만 불의 사나이도 만나보실 수 있는 기회가 영영 사라지고 말았을 겁니다.”
그가 잠시 입을 다물자 드디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윤청을 향한 박수가 떠올랐다. 김성진
박사는 웃었고 윤청은 민망스러워 하는 얼굴로 손을 휘저으며 웃는 얼굴로 김성진 박사를 바라보았다.
김성진 박사가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의 그 박수, 당연합니다. 그렇습니다. 윤 부회장의 결단력, 그리고 충분한 재원의 뒷
받침으로 한국의 새 600만 불의 사나이 아, 계산해 보니 천육백만 불 정도의 사나이가 드디어
탄생을 한 거군요. 어쨌든 완성이 됐습니다. 차승조 씨의 하지에서 도려낸 조직을 대신해서 그
부위 안에 배터리를 장착한 기계가 채워지긴 했지만 그 배터리는 반영구적인 것이어서 재수술
없이 1년에 한 번 정도 초음파 충전으로 고통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께서는 이번
성공이 우리의 복지사회에 어떤 혜택을 가져다 줄 것인가 성급한 궁금증을 지닌 분도 계시리라
봅니다. 물론 엄청난 재정적 지원이 뒷받침 되어야만 하는 시술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고루
혜택이 가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연구하고 보완하다 보면 언젠가 일반인에게도 혜
택이 되는 길이 열리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젠 됐습니다. 이것으로 경과보고도 끝난 듯
합니다. 장황한 의학적 용어를 나열해서 말씀드리지 않기 위해 이것으로 보고 말씀을 끝내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얹으며 옆으로 돌아보고는 말했다.
“사실은 오늘 이 자리에 가장 소중하고 존경받는, 러시아에서 오신 모스코 대학의 엘레나
콘드리티바를 꼭 모셔야만 하는데 하필이면 오늘이 E대에서 부탁받은 미생물학 강의가 약속된
날이라 이 자리에 불참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 팀에도 소중한 분이지만 앞으로
대명그룹의 미생물 전진기지의 중요 부분을 차지하실 분이기 때문에 자주 뵐 기회가 있으실 겁
니다. 끝으로 이번을 기회로, 그리고 시작으로 저흰 더욱 더 심도 있게 연구하고, 인체를 종합
적이고 전인적인 방법으로 고찰하여 현대의료의 쓸모 있는 의학의 한 분야로 발전시켜 나가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합니다. 다시 한번 윤 부회장께 감사를 드립니다.”
넘치는 박수 소리와 함께 김성진 박사는 자리에 앉았다. 박수소리가 잦아들기 바쁘게 그를 향해
궁금증을 견디지 못한 임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연구를 통해서 학문
적 토대를 쌓아나가는 의학의 한 범주로 의학의 또 다른 한 축을 담당해 나가리라는 것을 전
제로 대답했다. 질문의 요지가 대명그룹의 사업성으로 발전해 가려는 순간 윤청이 얼른 임원들
을 저지했다.
“우선 완벽한 성공의 마침표는 최초의 실험에 도움을 준 차승조 씨의 완쾌일 거예요. 수술을
받은 당사자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도 당연하고요. 다음 주부터는 새로
운 치료법이 병행될 것이라고 박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걸 들었어요. 물리치료까지를 끝내면 주
인공이 머잖아 산 증거를 제시하게 될 것이고 그 때 우린 새로운 것을 모색할 수가 있을 거라고 봅
니다. 지금은 성급하게 사업성부터 따지면 김 박사님께서 자칫 기분이 언짢아 지실 지도 모르고,
더구나 차승조 씨를 위해 잠시만 더 보안을 유지해 주셨으면 하니까 이대로 아쉬운 걸 좀 남겨 두
셨으면 합니다. 단계적인 발표가 있기 전에 기자들이 몰리기라도 하면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닐 테
니까요.”
박수로서 윤청 대명그룹 부회장의 말에 찬동을 표명한 모두들은 그런대로 벅찬 얼굴이었다. 유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좌중의 분위기는 곧 화기애애한 것으로 바뀌었다.
서로를 향한 환담이 이어지는 동안 윤청은 회의실 입구에 서 있는 김 비서를 향해 눈짓을 했다.
그와 동시에 김하일 비서가 얼른 한걸음 나서며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주방에서 지금 한참 식사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서빙을 하는 웨이터 두 사람을 마포에 있는 M호
텔에 부탁을 했는데 곧 도착할 겁니다. 잠시 후 곧 식당으로 모시겠습니다.”
식당에 차려진 모든 것이 완벽했다. 천창이 있는 가족 식당이 아닌 귀빈 식당은 넓었고 참석
인원 30명이 넘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잘게 부순 얼음 안에 포도주가 담긴 은기
가 놓여 있었고 각종 글라스들이 샨데리아의 불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모두들 각자의
위치를 찾아 자리에 앉았다.
김경자 실장은 문득 윤청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꾸며졌던 것일까? 공교롭게도 자신이 앉아 있
는 곳은 장학출 사장의 바로 옆 자리였다. 윤청의 언뜻 차가워 보이는 옆모습이 자신의 눈에
비치자 마음속에 시린, 알알이 그녀에 대한 연민이 끓어올랐다. 그녀의 노력, 그녀의 마음가짐
이 너무나 선명하게 가슴 한복판을 꽤뚫듯 전달되어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장학출은 상당히 가까운 위치에서 전혀 의식함이 없이 모두들과 함께 대화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녀가 옆에 앉아 있다는 것은 애초부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김경
자는 불쾌해지려고 했지만 그러나 잠시, 그뿐이었다.
그녀는 어느새 온갖 것을 떨쳐버린 산뜻한 얼굴로 포도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고 식욕을 느
끼며 차분히 수저를 집어 들었다. 곰곰 생각에 잠기며, 어쨌든 앞으로는 자신이 들어 윤청 부회
장의 마음을 쓰라리게 만들지 않겠다고 그녀는 결심했다.
게다가, 자신을 의식하는 남자는 이미 지구 바깥에 있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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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종의 정보에 의해 구경그룹이 벌컥 뒤집히고 있는 사이 김준희가 말했다.
“차승조가 온전한 신체를 되찾았다 해서 너무 염려하실 건 없습니다. 녀석의 동생이 다니는 고
등학교를 알아냈습니다. 회장님 지시가 있으셨거든요. 어느새 서울로 전학을 했더군요.”
녀석의 의기양양해 하는 꼴을 보며 배알이 뒤틀렸던 박희주는 깜짝 놀랐다. 역시……. 김준희의
월군이 아니라 형이 역할분담을 새로이 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차승조 형제가 우애가 깊다는 건 시골에서도 소문 나 있더군요. 회장님 말씀대로 동생 녀석을
데려다놓고 은밀히 연락을 취하면 두 말 없이 나타날 겁니다. 너무 염려 마십쇼.”
“그래! 맞다!”
전 같으면 김준희가 자신을 추월하고 있는 것에 오장육부가 뒤집혀 피가 솟구치는 얼굴을 했겠지
만 당장에 박희주의 표정이 환해졌다. 발발이 같은 녀석! 드디어 회장과 함께 손을 맞잡고 자신을
따돌렸지만 김준희의 운명도 그다지 길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렴, 좋다 마다! 그는
무릎을 치다시피 들떠 올랐고 재검토의 필요에 대해서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은 채였다.
“그렇지! 그거야, 그거라구…….”
그는 너털거리고 웃으며 김준희를 바라보았다. 곱상한 얼굴에 날렵해 보이는 녀석의
얼굴에 만족의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보며 그는 김준희가 미구에는 자신을 대신해서 가주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네 놈이 무덤을 파고 있는데 말이지…….
‘그래. 파라, 파! 아주 크고 깊게 파서 둘다 묻히라구…….’
지금쯤 김준희에게 모든 걸 물려도 아깝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그 마저도 대타가 필요
했던 것이고 녀석은 안성마춤이었다. 그의 눈앞으로 형이 위급할 때마다 정신없이 꺼내드는 흰
알약이 눈앞에 수북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거야 말로 배덕자에게는 알맞은 보약일 것이 틀림없었다.
-계속-
글 김나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