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5.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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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죽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은 사람 마냥 왜 그리 비실 대냐”는 말이 있다. 피는 논에서 자라는 잡초다. 쌀이 떨어져 피의 씨앗을 대신 끓여 먹어야 했던 시절 죽은 빈곤의 상 징이었다. 아침은 밥, 점심은 거르고 저녁은 죽으로 때우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던 가난 이 이제 추억 속의 이야기가 되었고 식생활 패턴도 변했다. 야간활동이 길어지면서 저녁 이 풍성해졌고 각종 모임과 술자리가 밤늦도록 이어지게 됐다. 그러다 보니 아침은 밥맛 도 없고 출근과 등교시간에 쫓겨 거르기 일쑤다. 생활은 풍요로워졌지만 피곤하다, 바쁘 다, 입맛 없다며 주린 배를 움켜쥐고 허둥지둥 대문을 나서게 된다.
약 올리는 건지 걱정하는 건지 아리송한 “지하철은 잡으셨지만 아침은 놓치셨군 요?”라는 식품회사의 광고카피가 정곡을 찌르는 게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죽은 곡물음식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다. ‘몸이 아플 때 먹는 음식’이나 환자식으로 또 는 가난한 살림의 음식대용이던 죽이 최근에 건강식이나 다이어트용으로 부각되면서 인기 를 끌고 있다. 미리 만들어놓지 않고 반 조리 상태의 것을 주문 즉시 끓여냄으로써 방금 쑨 듯한 맛을 그대로 살려내는 것도 특징이다. 건강과 미용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격과 거리를 불문하고 맛있는 죽을 찾아 나서고 있다.


도곡동 대림아크로텔 지하에 위치한 한죽은 보양, 다이어트 그리고 속 풀이까지 할 수 있는 다양한 죽을 선보인다. 직접 조리까지 하는 최현찬?권현미 부부는 맛의 비결을 ‘재 료와 정성’이라 말한다. 재료는 국산만을 고집한다. 딱히 외국산이 나빠서라기 보다 우리 입맛에는 우리 땅에서 난 재료가 어울린다는 생각에서다. 새벽 일찍 가락동 시장을 누비며 재료를 고른다. 신선함과 맛을 따지다 보니 어느새 최 사장은 야채박사가 되었다고. 한약재 는 경동시장에서 구입한다. 쌀은 찹쌀과 멥쌀을 섞어 쓴다. 멥쌀로만 쑨 죽을 계속 먹으면 위 기능이 저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찹쌀과 다양한 재료를 넣는 것이 방지책이다.
한죽에서 가장 잘 나가는 메뉴는 야채죽이다. 가격이 저렴한데다 최근의 웰빙 바람 때문 이다. 그렇지만 요즘의 비싼 야채 값을 생각하면 오히려 더 받아야 될 듯 싶은 게 야채죽이 다. 다음으로 곷게살죽과 버섯굴죽, 황기인삼닭죽을 즐겨 찾는다. 그밖에 전통죽인 전복 죽, 잣죽, 흑임자죽, 단호박죽, 동지팥죽 등과 새우죽, 소고기버섯죽, 참치야채죽, 황태죽, 해물죽 등의 영양맛죽, 그리고 계절에 맞춰 나오는 특선죽 등 다양한 메뉴를 갖추고 있다.

‘바다의 우유’라는 굴이 들어가는 버섯굴죽은 매니아가 있을 정도. 어패류에 간 해독요 소가 들어 있어 해장으로도 그만이다. 신선도와 맛을 유지하기 위해 5월부터 추워지는 늦가 을까지 냉동굴을 사용한다. 생굴은 따듯해지면 쉽게 상하기도 하지만 산란기에 들어가기에 아리아리한 맛이 난다. 맛도 떨어지고 자칫 탈이 날수 있다. 냉동된 것이 저렴할 듯 싶지만 보관비용 때문에 더 비싸다. 그럼에도 한결같은 맛을 내기 위해 아끼지 않는 것을 보면 이들 부부의 죽에 대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흔히 죽 먹어 양이 되겠냐며 죽은 별식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한죽에서 나오는 죽은 사발 부터 듬직하다. 실제로도 배부른 양이다. 더욱이 소화가 잘되니 배불리 먹고도 활동하기에 불편함이 없다. 저칼로리 음식이니 다이어트에도 좋다. 즉석에서 조리해내는 정성과 속 편 함이 단골을 불러모았다. 고객의 취향까지 기억해 내는 권 주방장의 세심함이 꾸준한 인기의 비결이다.
죽이 위에 부담 없으면서 영양식으로 소문나 임산부들도 즐겨 찾는다. 실제로 권 주방장은 입덧으로 고생하다가 죽을 먹고 나은 적은 있다. 그때 다양하게 죽을 만들어 보면서 죽 요리 집에 대한 구상이 창업으로 이어졌다.
전에는 술 먹은 다음날 죽 집을 찾는 이가 별로 없었다. 그러던 것이 하나둘 먹어보고 쓰린 속에 부담 없고 좋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아침 손님이 늘었다. 특별히 술꾼들을 위해 황태를 잘게 썰어 넣은 황태죽도 별미다.

아침죽을 꾸준히 시켜먹고는 속이 좋아진 고객도 있다. 가격도 저렴한데다 배달 서비스도 한다(4,000원) 권현미 주방장은 “아침은 장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다. 자극이 적은 죽은 위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며 “죽은 점심보다는 아침, 저녁에 먹는 것이 좋다. 그래야 장도 쉴 수 있고 몸이 덜 피곤해진다”고 말한다.
반찬으로 내오는 것에는 김치와 짠지, 젓갈, 물김치 등이 나오나 간이 맞아 그냥 먹는 고객 도 많다. 이곳 메뉴에는 곱빼기가 없다. 대신 많은 양을 찾는 고객에게는 듬뿍 준다. 재료 를 아껴서는 만족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문한 죽을 싸 가는 경우, 대부분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데 그래서는 제 맛이 나지 않는 다. 귀찮더라도 냄비에 담아 다시 끓여 먹는 게 좋다고 귀뜸을 한다.
죽을 맛있게 만든다고 소문난 집에는 부부가 꼭 찾아간다. 워낙 죽 공부를 많이 하다보니 맛만 보고도 대강의 재료와 조리법을 알 수 있을 정도다. 소문난 집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죽은 정갈한 맛과 정성, 그리고 신선한 재료에 대한 고집이 중요하다는 게 부부의 지론이다.
한죽을 찾으면 단순히 ‘죽 한 그릇’이 아니라 ‘한끼 식사’로 든든한 죽 한 상을 맛볼 수 있다.

강성철 기자 | wakaru@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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