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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평화가 얻어진 곳에 막대기를 꽂아라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거세다. 자기만 양심적이고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은 모두 비양심적이냐는, 나름대로 논리적인 항의도 있다. 군대보다 힘들고 긴 시간 동안 대체복무를 시키면 될 것이라는, 약간의 보복성 의견도 설득력 있다.
그러나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이 양심적인가 아닌가의 문제, 대체복무를 시켜야 하는가 아닌가의 문제는 2차적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군대문제로 야기되는 이 땅 남자들의 적개심이다. 몇 년 전 군복무 가산점 문제로 홍역을 치른 한 페미니스트는 이야기한다. “ 한국남자들과 군대문제에 관해서는 어떠한 합리적 토론도 불가능하다”고.
사실 그렇다. 군대생활을 정상적으로(?) 마친 사람들은 나이가 마흔이 되어도 군대이야기만 시작되면 2박 3일이다. 그런데 하는 이야기는 하나 같이 천편일률적이다. 고참에게 맞은 이야기 아니면 ‘쫄따구’ 괴롭힌 이야기.
가끔 사는 게 힘들면 군대 꿈도 꾼다. 우연히 데모 앞줄에 섰다가 강제 징집되어 군생활 내내 최전방에서 뺑이(?)쳤던 나 또한 제대한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군대에 끌려가는 꿈을 꾼다.
이런 한국남자들에게 군대문제는 이 땅의 평등을 확인하는 마지막 마지노선이다. 따라서 군대문제는 아무도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라 할 수 있다.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연거푸 낙선한 이회창 후보의 결정적인 문제는 바로 이 성역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왜 한국남자들은 군대문제에 관한 한 어떠한 합리적 논의도 거부하는 것일까?
세상을 설명하는 가장 간단한 설명방식인 마르크스의 계급이론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이 땅의 문제가 ‘군대계급론’으로는 아주 쉽게 설명되기도 하는 이유는 도대체 왜일까?
그것은 군대경험이 단순한 추억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되짚어 이야기해 봐도, 술 마실 때마다 돌이켜 추억해 봐도 자신의 군대경험이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남자는 군대 갔다 와야 사람이 돼” 혹은 “병역은 신성한 국가의 의무” 때문이라는 이야기 정도다. 그러나 군복무 30개월은 그 정도로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아무리 합리적으로 이해하려 해도 이해되지 않는 경험들, 지우려 해도 자꾸 떠오르는 지독한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의 기억들.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야기되는 심리적 상태를 정신병리학에서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부른다.
이러한 심리적 장애는 베트남 전쟁에 참가했던 퇴역군인들의 부적응 현상을 연구하며 확인되었다. 전쟁뿐 아니라 자연재해, 가까운 이의 느닷없는 죽음, 교통사고 등의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후 이 증상은 나 타난다. 한국남자들이 집단적으로 보이는 군대문제에 관한 과도한 반응들은 증상은 약하나 이의 전형적인 증상들과 일치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증상은 적개심이다. 한국남자들의 집단적 적개심은 군대문제가 사회적 쟁점이 될 때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군복무를 피할 수 있었던 ‘신의 아들’들에 대한 분노, 군복무와 관계없는 여자들의 군복무 폄하발언에 대한 욕설 등등.
뿐만 아니다. 시국사건과 관련된 집회에 빠지지 않고 자신들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해병대, 혹은 베레모 복장의 중년들 모습에서 뿌리 깊은 적개심의 흔적을 발견한다. 이 모두가 그들의 영혼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상처들이 왜곡되어 드러난 모습이다.
적개심이 위험한 이유는 세상을 적과 아군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방식에 있다. 우리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 되는 사회는 매우 위험하다. 회색지대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의 갈등은 항상 극으로 치닫게 되어 있다. 내 편도 다른 편도 아닌 사람들은 내 편이 아니라는 이유로 적이 되어 버린다.
한국사회가 갈수록 위험해지는 까닭도 이러한 편 가르기와 다른 편에 대한 적개심이 판치는 사회가 되어 가기 때문이다. 이 모든 문제가 군대경험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허나 우리사회 깊숙이 뿌리박힌 군사문화, 즉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이 정한 사회의 운영원리가 흑백논리에 따른 적개심을 확산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기업 또한 이러한 흑백논리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군대를 경험한 남자들이 대부분인 기업의 운영원리는 군대조직을 닮아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합리적 의사소통을 강조해도 “ 까라면 까”야 하는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원리는 여전히 가장 잘 기능하며, 상사들이 가장 쉽게 선택하는 조직운영 방식이 된다.
이러한 조직의 부작용은 군대식 정서, 즉 절대적 복종과 적개심이라는 두 가지 정서로 요약된다. 그러나 군대식 운영원리는 21세기 창의적 조직이 피해야 할 가장 큰 요소다. 아군과 적군의 이분법이 명확해야만 운영되는 군대의 컨텍스트와 끊임없이 적과 동지가 변하는 21세기 기업의 컨텍스트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군인은 적에 대한 적개심에 가득 찰수록 훌륭한 군인이 된다. 그러나 기업은 다르다. 목표가 같다면 어제의 적이 언제든 오늘의 아군이 될 수 있는 곳이 21세기 기업이다. 또한 명령이라면 죽음을 무릅쓰고 고지를 기어올라야 하는 군대와 사고의 유연성, 창의성으로 무장해야 하는 21세기 기업은 그 본질에서부터 엄청난 차이가 있다.
결국 직원들의 정신력 강화를 위해 해병대 입소가 추진되고, 군대휴양소와 별 다름없는 기업연수원을 운영하는 기업은 21세기적 조직 운영방식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다. 적개심은 한국남자들이 모인 조직문화에는 항상 뿌리 깊게 박혀 있다. 뿐만 아니다. 적개심은 한국남자 개개인의 웰빙을 방해하는 가장 위험한 요소다. 한국남자들이 웰빙, 즉 행복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뿌리 깊은 적개심에 있다.
우리는 매일 같이 거리에서 이 적개심을 만난다. 운전을 하다 보면 나 보다 앞서가는 사람을 절대 용서 못한다. 내 앞에 아무도 끼어들지 못하도록 절대 틈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이를 뚫고 받을 테면 받으라는 식으로 끼어드는 사람이 있다. 정말 배 째라는 식이다. 경적을 울리며 온갖 욕을 퍼붓지만 한번 뒤틀린 심사는 여간해선 바뀌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는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끝낸다. 각 개인의 적개심은 개인의 불행으로 끝난다. 하지만 리더의 적개심은 조직원 전체를 불행하게 만든다.
적개심은 단순히 화가 나는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다. 적개심이 위험한 이유는 거의 습관이나 성격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적개심은 타인에 대한 부정적 신념과 태도로 굳어진다. 적개심에 익숙한 사람은 타인들을 냉소적으로 본다. 뿐만 아니라 웬만해선 믿지 못하고 자신의 의심이 확인될 때는 모욕을 서슴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호의 또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유 없는 친절이나 호의에는 음모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리더는 조직원들에게 자신의 적개심을 전염시킨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까지도 단축시킨다.
적개심과 관련한 재미있는 듀크대학의 연구보고서가 있다. 적개심을 습관적으로 보이는 의대생 집단과 적개심을 적게 드러내는 의대생 집단의 졸업 후 25년까지의 사망률을 비교한 연구다. 이 두 집단의 사망률은 졸업 직후부터 바로 차이가 나기 시작하여 졸업 후 10년이 되면서 적개심이 높은 집단의 사망률은 거의 3배에 이르렀다. 졸업 후 25년에 이르러서는 거의 5배가 되었다. 그 만큼 적개심은 죽음에 이르는 위험한 병이다. 적개심은 분노에서 시작된다. 분노가 습관이 되어 성격적으로 굳어진 결과가 적개심이다. 적개심 이외에도 조직의 리더가 피해야 할 부정적 정서 두 가지 더 있다. 우울과 불안이다. 이는 물론 모든 사람이 피해야 할 정서적 특징이기도 하다.
우울과 불안은 적개심만큼이나 사람의 생명을 앞당겨 파괴한다. 2만5천 명을 40년 동안 추적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우울한 사람들이 심장질환에 걸릴 확률이 우울하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2-4배나 높다고 한다. 특히 건강한 사람이 우울해질 경우 심장병에 걸릴 확률은 4배나 된다.
멀쩡한 사람이 은퇴 후 갑자기 죽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일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다가 은퇴 후 갑자기 허전해지는 것을 참기 어려워질 때 우울증세가 찾아온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건강해도 이 우울증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된다. 결국 우울은 심장질환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불안은 우울보다 더 심각하다. 4만 명을 대상으로 장기간에 걸쳐 불안과 심장질환의 관계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불안을 습관적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2~7배 정도의 높은 심장질환 발병률을 보였다.
적개심, 우울, 불안은 만병의 근원이 된다. 뿐만 아니라 갖가지 다양한 문화적 외피를 입고 우리 주위를 서성거린다. 이 세 가지 부정적 정서가 내 삶과 내가 속한 가족, 회사, 공동체에 기생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휴(休)경영의 핵심이다.
심리학적으로 살펴보면 이 세 가지 부정적 정서에는 초기 증상이 있다. 우울은 슬픔으로부터, 불안은 걱정으로부터, 적개심은 분노로부터 시작된다. 슬픔, 걱정, 분노는 아주 자연스러운 인간적 정서다.
이 정서가 주는 신호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눈물을 억지로 참는다고 슬픔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억눌린 슬픔은 무력감, 상실감으로 가슴 깊이 스며든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살충동으로 폭발한다.
두려움 또한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정서다. 막연한 두려움은 없다. 그 두려움의 실체가 확인되는 것을 회피하기 때문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두려움의 원인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이다.
억눌린 막연한 두려움은 만성적인 불안으로 이어진다. 적개심의 출발점이 되는 분노는 자신의 자존심이 위협받을 때 나타난다. 이 위협으로부터 자존심을 지켜내지 못할 때 좌절하게 되고, 좌절이 왜곡된 형태로 굳어진 것이 적개심이다.
인간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죽음에 이르는 병인 우울, 불안, 적개심, 이 세 가지 부정적 정서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은 각각의 시작이 되는 슬픔, 걱정, 분노와 친해지는 것이다. 슬픔, 걱정, 분노와 친해진다는 것은 내 안의 나와 익숙해진다는 뜻이다.
이 세 가지 정서로 신호를 보내는 나를 발견하는 것을 ‘메타코그니션(meta-cognition)’이라고 한다. 메타코그니션, ‘나에 대한 또 다른 나의 생각’은 은행 비밀번호를 만드는 방법에서 아주 쉽게 확인된다.
은행 비밀번호를 만들 때 대부분 자기 생일이나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한다. 아주 쉽게 생각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두 명의 자아가 확인된다. 생일로 된 비밀번호를 기억해내는 ‘1번 자아’ 와 생일번호로 비밀번호를 만들면 ‘1번 자아’가 잘 기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자아, 즉 ‘2번 자아’가 그것이다.
이 1번 자아와 2번 자아의 대화가 곧 휴식(休息)이다. 휴(休)는 사람(人)이 나무(木)에 기대 앉아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식(息)은 자신(自)의 마음(心)을 돌아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무에 기대 앉아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것이 휴식이다. 나무에 기대어 내가 나하고 대화한다는 뜻이다.
내 안의 또 다른 나, 즉 슬퍼서 어쩔 줄 모르고, 걱정으로 잠들지 못하고, 화가 나서 펄떡거리는 나를 인정하고 대화하는 것이 휴(休)경영이다. 휴(休)경영을 통해 슬픔, 걱정, 분노가 우울, 불안, 적개심과 같은 파괴적 정서로 전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따라서 휴(休)경영에 익숙한 사람이 훌륭한 리더다. 이런 사람만이 내 삶의 건강을 회복할 뿐 아니라 조직의 성공을 담보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에스키모는 자기 내부의 슬픔, 걱정, 분노가 밀려올 때면 무작정 걷는다고 한다. 슬픔이 가라앉고 걱정과 분노가 풀릴 때까지 하염없이 걷다가, 마음이 평안이 찾아오면 그 때 되돌아 선다고 한다. 되돌아 설 때, 돌아서는 바로 그 지점에 막대기를 꽂아 둔다. 살다가 또 화가 나 어쩔 줄 모르고 걷기 시작했을 때, 이전에 꽂아 둔 막대기를 발견한다면 요즘 살기가 이전에 비해 더 어려워졌다는 뜻이고, 그 막대기를 볼 수 없다면 그래도 견딜 만하다는 뜻이 된다.
휴식은 내 삶의 막대기를 꽂는 일이다. 내 안의 나와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평화로움이 찾아올 때까지 가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 막대기를 꽂고 돌아오는 일이다. 슬픔과 분노로 어쩔 줄 모를 때마다 막대기를 꽂는 사람은 행복하다. 위로하며 마음의 평화를 얻게 도와주는 또 다른 내가 항상 있기 때문이다.

김 정 운
명지대학교 기록과학대학원
여가정보학과 주임교수
명지대학교 여가문화연구센터 소장

저 서
[문화의 심리], [휴테크 성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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