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쩍 중얼거리는 일이 늘었다면
쉰다는 게 도대체 뭔가? 그냥 하던 일을 멈추면 쉬는 것인가? 아무 일도 안 하고 그저 몸이 편
하기만 하면 쉬는 것인가? 아니다. 나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갖는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인식의 주체이며 객체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
자면 정신분열이다. 내가 내 자신을 안다는 일의 정신분열적 아이러니는 다음의 한 마디로 아주
분명해진다.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는 뜻이다. 아주 또렷한 자기반성의 행
위다. 그러나 이 문장이 거짓말인가, 참인가를 논리적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아주 골치 아파진다.
위의 문장이 만약 참이라면,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가 된다. 내가 거짓말
을 한다면서 어떻게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이야기를 잘 이해하지 못 한다면 당신
은 인생을 아주 편하게 사는 사람일 것이다. 자기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데, 그 말 자체가
동시에 참말이 되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거짓말과 참말을 동시에 하는 모순적인 상황, 이런 상황이 자기반성이다. 그런데도 철학자들은
고대 희랍부터 지금까지 ‘너 자신을 알라’며 멱살을 잡아당긴다.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거울을 보면 된다. 내가 주체와 객체의 이중적인 역할을 모두 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 거울에 비
친 나를 바라보면 내가 동시에 두 사람이 돼야 하는 자기분열적인 상황을 피할 수 있다. 휴식을
통해 얻어지는 자기반성이란 논리적 모순이 아니라 대화의 능력이란 뜻이다. 거울을 바라보는 대화
는 시적 메타포로 자주 나타난다. 한국인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 가운데 하나인 서정주의 ‘국화 옆
에서’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팔뚝에 ‘차카게 살자’를 그리는 깍두기 머리도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로 시작하는 이
시는 아주 반가워하며 아는 체 한다. 정신없는 젊은 시절을 보내고 고향의 거울 앞에선 누님의 모
습은 누구에게나 포근한 고향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다 보면 문득 고향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나는 이유는 고향에 가면 누님
이 대하던 그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볼 수 있기 때문이다. 휴식은 이렇게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 거
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순례의 길이다. 그 거울에는 ‘내 안의 또 다른 나’가 있기 때문에 가
능하다.
고향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과 대화하는 능력은 마음이 편할 때는 별로 필요 없다. 그러나 복잡한
문제가 생기면 내 안의 나가 동원된다. 이는 아주 간단한 실험으로도 분명해진다. 23 x 6을 계산해
보자. 자기도 모르게 바로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23 + 6의 경우는 사
뭇 다르다. 이 계산을 하며 중얼거리는 사람은 별로 없다. 곧바로 계산되는 아주 간단한 산수
이기 때문이다.
허나 앞의 곱셈은 그리 만만치 않다. 어릴 때 주산을 배운 사람이 아니라면 계속 중얼거려야 한
다. 셈이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중얼거리는 소리는 더욱 커진다. 계산하는 나와 기억하는 나
가 계속 대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잡한 산수를 할 때만 내 안의 나와 대화하는 것이 아니다. 힘들어 어쩔 수 없을 때, 정말
복잡한 문제가 닥치면 나와의 대화는 독특한 힘을 발휘한다.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중얼거리는 나
를 발견하곤 깜짝 놀라는 경우가 바로 그런 때다.
가끔 생각에 몰두하게 되면 옆에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고 혼자 중얼거리게 된다. 가끔 지하철서
뭔가 중얼거리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무척 심각한 문제로 고민하는 사
람들이다. 정말 어려운 일이 닥치면 우리는 이렇게 중얼거리게 된다. 마음이 아파 어쩔 줄 모를 때
도 마찬가지다.
이런 행동은 내 안의 나와 대화하는 과정이 밖으로 새어 나온 현상이다. 너무 바빠 내 자신과의 대
화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안의 나는 괴롭다. 그래서 때와 장소를 안 가리고 자기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요즘 부쩍 혼자 중얼거리는 일이 늘었다면 내 안의 나를 배려해야 할 때라는 이야기다. 쉬라는 이
야기다. 쉬면서 자신을 돌아보라는 이야기다. 내 안의 나가 자꾸 이야기하자는 신호인 ‘혼자 중얼
거리는 일’이 자꾸 늘어나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계속 정신없이 산다면 내 안의 나는 반란을 일으
킨다. 강제로라도 쉬게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렇게 쉬게 되는 경우는 마음 포근한 고향의 거울
앞이 아니다. 대부분이 병원 응급실 침대다.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은 단순히 휴식의 의미만이 아니다. 이는 21세기 성공적
인 리더의 필수 덕목이 되기도 한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욕구, 좌절, 분노를 읽어낼
수 있고,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과 진심으로 대화할 수 있고, 타인
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까지 리더십의 핵심은 카리스마였다. 카리스마란 타인이 복종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도
록 솔선수범하여 앞장서는 덕목을 의미한다. 카리스마적 리더십에서는 리더가 구태여 타인의 마음
에 관심을 갖고 배려하며 일일이 챙겨야 할 이유가 없다. 리더를 따르고 안 따르고의 문제는 리더
의 행동의 얼마나 타인들의 귀감이 되는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불굴의 투지, 비전을 향한 집요한 추진력, 타인들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 돌파력 등등이 20세기
형 리더의 핵심적 특징으로 열거되곤 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불굴의 투지와 돌파력은 리더의 핵
심 덕목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부족해도 많이 부족하다. 사람들의 근본적인 의식
자체가 변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불굴의 투지만 보고 더 이상 감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감동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다.
남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우선 내 안의 나와 대화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내 마음을 돌아볼 줄
모르면서 어찌 남의 마음을 잡을 수 있겠는가? 철학에서는 타인과 대화가 가능하려면 상호주관성
이 전제돼야 한다고 얘기한다.
예를 들어 내가 리더십을 이야기할 때, 내가 이야기하는 리더십과 듣는 사람이 이해하는 리더십이
같은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 복잡한 단어는 설명함으로써 서로 이해
하는 바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단어를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
다. 서로 확인하지 않아도 내가 이해하는 단어의 뜻과 남이 이해하는 단어의 뜻이 같다고 전제
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서로의 생각이 공유된다는 뜻이다.
이를 상호 주관성이 담보됐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만의 관심이나 의지만 관철하려
고 하다 보면 상호 주관성의 전제를 생략하기 일쑤다. 특히 리더가 범하는 가장 큰 실수는 타인의
생각이 나와 얼마나 공유되고 있는가를 확인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만을 관철하려는 것이다.
남의 마음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이런 방식의 독선적 리더십은 지난 세기의 전설일 뿐이다. 상호 주
관성의 리더십은 남의 마음과 내 마음이 만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남의 마음을 이끌어내
고 자발적인 호응을 얻어낼 수 있는 리더십의 기초는 내 마음을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내 안
의 나와 화해하는 능력과 타인과 대화하는 능력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일년에 한 번쯤은 조용한 곳, 아주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래야 내
가 보인다. 일상과는 아주 다른 경험을 통해 이 경험의 주인이 누군가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아
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의 나는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나와 전혀 다를 수 있다. 가끔은 외로운
곳에서 나를 만나야 한다. 이 만남을 두려워하다간 정말 처절한 상태에서 나를 만나게 된다.
나 또한 처절한 외로움의 막바지에서 나를 만났던 경험이 있다. 독일에 유학을 간지 얼마 안 돼서
다. 아무도 아는 이 없는 베를린의 삶에서 나는 좌절했다. 학교 식당에서도 아무도 나를 아는 체
하는 이가 없었다. 강의실에서 용감하게 질문을 하고 발표도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형식적인
‘굿텐 탁’ 인사가 전부였다.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나는 모든 모임의 주인이 되고자 했다. 주
체가 되지 않으면 못 견뎠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좋아했다. 그러나 베를린에서는 아무리 내가 주
인이 되고 싶어도 되지 않았다. 일단 나는 언어장애자였다. 내 유창한 한국어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었다. 남자로서의 자존심도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호수 같은 파란 눈의 유럽여인들은 아무도 날
남자로 보지 않았다.
북구의 겨울에는 오후 3시면 해가 졌다. 깜깜해진 길을 자전거로 달려 기숙사에 도착하면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 프라이팬에 하루는 카레밥, 하루는 짜장밥을 만들어 먹었다. 옥수수 통조
림, 완두콩 통조림을 카레나 짜장 소스에 털어 넣으면 되는 아주 간단한 식사였다. 설거지할 것은
프라이팬뿐이었다. 그 것도 뜨거운 물에 흔들어 씻어내면 그만이었다. 독일어 원서를 하루에 100
페이지씩 읽어 치웠지만 무슨 내용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좌절했다. 뭔가 특별한 것이 먹고 싶었다. 그러다 생각해낸 것이 된장찌개였다. 호박을 하나
사왔다. 자르려고 보니 가운데 큰 씨가 있었다. 유럽의 호박씨는 정말 크다고 생각하며 찌개에 넣
었다. 독일사람들은 ‘호박씨를 제대로 까겠구나’ 킬킬거리며 냄비를 열어보니 기름만 떠 있고 호
박은 전혀 익지 않았다. 옆에서 보던 중국유학생이 그것은 끓여 먹는 게 아니라 생으로 먹는 것이라
고 알려줬다. 그러면서 비싼 과일을 끓였다고 피식거렸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것은 호박이 아니라
그 때 내가 처음 본 열대과일 아보카도였다는 것을. 나는 다시 좌절했다.
먹는 것에 좀더 투자해야 할 것 같아 큰 압력솥을 샀다. 그리곤 정육점에서 소뼈를 샀다. 곰국을
끓일 심산이었다. 토요일 아침부터 소뼈를 삶았다. 하루 종일 삶고 열어보니 전혀 뽀얀 색이 아니었
다. 누런 기름만 둥둥 떠있을 뿐이었다. 내 어머니가 끓여 주시던 곰국은 뽀얀 색이었는데. 끓인
시간의 차이라고만 생각해 이튿날도 하루 종일 삶았다. 그러나 여전히 멀건 국물에 기름만 떠있을
뿐이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소뼈가 아니었다. 영수증에 써있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 확인해 보니 돼지다리
였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물러질 대로 물러진 돼지편육을 씹던 나는 정말 바닥까지 좌절했다.
먹는 것 하나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던 나의 베를린 생활은 점차 피폐해 갔다. 위장병은 갈수록 심
해졌다. 위장약이라면 닥치는 대로 먹었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요구르트만 겨우 소화시킬 수 있게
됐다. 신경안정제가 섞여 있는 위장약을 먹고 누우면 3평이 채 못 되는 기숙사 방의 천장이 천천히
내려왔다. 벽도 나를 밀고 들어왔다. 아 내가 드디어 미쳐가는구나. 이 생각이 드는 순간 정신없이
기숙사를 뛰어나와 한국행 비행기표를 샀다.
서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처절하게 무너진 나를 발견했다.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없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됐다. 무엇 때문에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내 안의 나와의
진지한 대화는 그 때 비로소 시작됐다. 사춘기에나 겪었어야 할 내 아이덴티티에 질문을 20대 후반
의 무서운 외로움 뒤에 만났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어렵게 발견한 내 안의 나는 그 후 11년 동
안의 내 독일생활을 지탱하는 아주 큰 힘이 됐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내 삶을 움직이는 에너
지가 되고 있다.
요즘도 난 혼자가 두렵다. 하지만 더 무서운 상황에서 나를 만나지 않으려고 자주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그렇지 않으면 군대보다 더 무서운 외로움을 겪게 되는 탓이다.
높은 지위에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혼자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출장도 혼자서는 절대 못 간다. 모든
것을 다 챙겨주는 부하직원이 따라 붙어야 마음이 편하다. 심지어는 식당에도 혼자서는 가지 못
한다. 남들의 눈이 두렵기 때문이다. 혼자 극장을 가거나 혼자 여행가는 일은 정말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두려워하는 사람일수록 정말 처절한 상황에서 내 안의 나를 만나게 된
다. 정말이다. 특히 요즘 부쩍 혼자 중얼거림이 늘어난 당신, 떠나라. 압력솥의 돼지다리처럼 혼
자 떠나라.
김 정 운
명지대학교 기록과학대학원
여가정보학과 주임교수
명지대학교 여가문화연구센터 소장
저 서
[문화의 심리], [휴테크 성공학]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