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때? 잘 돼 가나?”
“네! 아주 잘 되고 있습니다. 형님이 보시면 놀랄 일이 있어요.”
“그동안에 뭔가 또 있는 거야?”
“그럼요! 이리로 와 보세요.”
그는 연구실의 측면 유리창을 가리켰다. 엄밀히 말해서 옆방과의 사이에 세워진 유리창이었다.
“응, 저건?”
“차승조의 절단했던 다리입니다.”
“야아!”
장학출은 거의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얼굴에 떠올리고는 입을 딱 벌렸다. 글자 그대로 불가사의였다. 반으로
절개된 원통은 유리로 된 작은 욕조를 연상시키는 기구였다. 안에 담겨 있는 액체는 알코올이 분명해
보였고 대퇴부에서 절단되어 있는 다리는 파르스름한 색채를 띄운 채 누워 있는 자세로 기다랗게 담겨
있었다.
“언제부터 저기에 와 있었던 거지? 차 군은 윗집에 있는데 다리만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남형준은 껄껄 웃고 나서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머잖아 근육, 뼈, 혈관, 신경줄 등 부품 모두를 교체할 거예요.”
“교체?”
“현재까지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한 것들로. 수술에 성공하면 앞으로 저건 우리들 다리에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성능을 지니게 될 거예요. 초능력이랄까, 어쨌든 저 다리가 완성되서 다시 차승조
의 절단된 허벅지에 연결만 돼 보세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워요.”
“그러니까, 어쨌든 연결이 가능하다 그거지? 일백 퍼센트?”
“거의. 세포 거부가 일어나지 않도록 지금 계속해서 실험중이예요. 환부를 다 도려내고 새로운 신
경계를 그대로 재생시키는 작업만 남았어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거예요. 본인의 신경세포를 채취해
연결시키는 수술을 병행하니까. 그밖에 돼지에서 추출해낸 것도 섞게 될 겁니다, 아마.”
“언제 완성이 가능하단 말야?”
“며칠 안에 수술이 시작될 거예요. 그런데 제가 먼저 필라델피아를 다녀와야 해요. 김성진 박사님이
신들린 분 같다고 며칠 전 형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옳은 말씀이었어요. 지금 아주 흥분상태에
계시죠. 덕분에 전 또 새로운 분야의 논문거리가 생겼고 말예요.”
“허어! 자네에게도 대박이 터졌군!”
남형준은 마침내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사업가는 다르시군요. 첫째도 돈, 둘째도 돈. 대박…….”
“말할 필요조차 없지! 와아! 우리의 사업에도 대박이라…….”
남형준은 머리를 절레절레하며 웃고 나서 잠시 후 조금은 차분해진 어조로 말했다.
“아직 샴페인을 터뜨리는 건 일러요. 차승조가 저 다리를 부착하고 검도를 다시 시작할 때까지는
안심할 수 없으니까요. 저 다리를 완전히 자신의 다리로 명령에 복종하도록 하는 건 차승조의 의
지와 엄청난 노력이 아니면 안될 거예요.”
“음…….”
장학출 사장은 눈앞에 차승조의 차분하고 묵직한 표정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해낼
것이다. 차승조라면 얼마든지. 그는 믿었다. 뿐만 아니라 차승조를 이미 존경하기 시작한 자신에
대해 저윽이 놀라운 느낌이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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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에서 박용찬 회장의 대명그룹 총수 취임식을 계기로 또다시 시작된 언론의 추적은 예상했던 대
로였다. 조간신문에 크게 보도된 기사는 하루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윤청의 모습이 반쯤 가려진 상태로 화면에 비춰졌다. 연희동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던 날 찍힌 사진이었다. 수차례 방영됐기 때문에 시청자들도 눈에 익었다. 딱 한번 돌아서서
기자들 앞에 얼굴을 내비쳤다가 남형준과 장학출이 들어올린 팔에 의해 절반 이상 가려진 채 천천히
돌아서는 모습이 몇 번이고 슬로모션으로 재현되고 있었다.
기자들은 짓궂게 정곡을 찌르며 질문을 던졌다.
“박 회장님의 결재권은 어디까지입니까? 언제나 윤청 부회장님의 재가를 얻도록 돼있습니까? 뭔가
회장님의 의사가 거부됐을 때 불쾌감 없이 일을 추진해 나가실 수 있겠습니까?”
박용찬 회장은 원래 적극적인 성품의 사람이었다. 그는 기자들의 다소 무례하게 들리는 질문에 일일
이 대답해줬고 얼굴에 불쾌감 따위를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다만 그는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한
마디를 끝으로 일체의 인터뷰는 사양하겠다는 말을 했다.
“앞으로 언론에서 윤청 부회장님과 나 사이를 이간질만 하지 않는다면 내가 불쾌할 일이야
없지요. 아니, 이 나라의 정치까지 도맡고 있는 언론계의 여러분들이 우리들 사이를 재미로 이간질
한다 해도 우린 불편할 일이 없을 거예요. 이젠 알겠어요?”
박용찬 회장의 취임식 이후 두 번째 임원회의는 본사에서 있었다. 여러 안건이 올라와 있었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이어진 이후이긴 했지만 회의실에 모인 임원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회의 도중 급보를 접한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구경그룹으로부터
정식으로 제2차 도전장이 날아든 것이다.
“뭐야? 아직도 해보자 그건가?”
얼마간, 그러니까 인수합병전이 잠시 동안 소강상태를 보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엇으로 보나
전열을 가다듬어 진격해 오기에는 구경그룹의 열세가 점쳐지고 있는 마당이었다. 오늘, 내일 하
면서도 소강상태가 이어지던 것은 따지고 보면 구경그룹의 계산착오적인 발상이 빚어낸 결과에 대
해 대부분 인식을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CGA가 뒤를 받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분명히 그렇습니다. CGA 이병두 회장이 제3주주
로서의 명분을 표면에 내걸고 나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김한중의 말에 박용찬 회장의 얼굴이 벌개졌다. 다혈질인 성품 때문이 아니라 상대의 치졸한 수
법을 간파한 탓이었다.
“이 사람들 정신 나갔구먼! 바쁜 세상에 또 심심풀이 신경전을 시작하겠다 그건가?”
그는 잠시 생각해보고 나서 곧 말했다.
“알 만해. 금융가에서도 구경그룹의 이번 M&A 실패에 대해 충분히 인정하기 시작했다고
들었어. 거래회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한 최후 수단을 강구하는 거라고 봐야 해.”
그는 장학출 사장을 바라보았다.
“장 사장님이 지금 곧 윤 부회장님을 좀 봬야겠는데요?”
“아, 네…….”
장학출은 손목시계를 보며 박용찬 회장을 향해 말했다.
“전화로 보고 드려도 될 것 같은데요. 그보다 회장님께서 좀전에 하신 말씀에 대해 확인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 근사치의 예측은 충분히 가능하거든요. 저도 어제 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그는 김효제 사장을 바라보았다. 김효제 사장이 얼른 말했다.
“제가 함께 있었는데, 구경의 주거래 은행인 C은행에서 인사이동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선 이
사와 강 이사가 사표를 낸 모양입니다.”
“엣?”
“사실은 장 사장님과 말씀을 나누긴 했는데 좀더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고 나서 보고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구경그룹에 대한 금융불안설을 선 이사와 강 이사가 그대로 인정한 게 경질의 원인이었다
고 들었습니다만 확인이 아직 안 되고 있습니다. 모두 입을 다물고 있으니까요.”
“구경그룹의 금융불안설을 그대로 인정했다면 마땅히 해고를 당할 수밖에 도리가 없겠지요. 은행
의 입장에서는 특히 일정 기간까지는 부정을 하고 들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런 형편에 아직 인수합병을 거론하고 있다니 일이 잘못돼도 한참을 잘못된 거나 다름없었다. 계열사
사장들이 한 마디씩 하는 가운데 박용찬 회장이 장학출 사장을 향해 말했다.
“갈 때까지 간 거라고 봐야하는데, 자구책이나 강구할 노릇이지 저런 망발을 왜 계속 부리는 거지?”
“일거에 그게 아니란 걸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거겠지요. 궁여지책으로 허세라도 부리려는 수
작으로.”
박용찬 회장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제는 분명한 결판을 내야만 할 것 같아요. 아까 내가 말했던 대로 회의가 끝나거든 윤 부회
장님께 일단 보고를 드리세요. 아무래도 모레는 연희동에서 월례회의가 열리기로 돼있으니까 일차 보고를 드리고 대책을 세우도록 하지요. 아니면 월례회의를 일요일이긴 하지만 내일로 앞당기든지.”
“네, 알겠습니다. 일차 보고를 드리죠.”
이것으로 박용찬 회장이 이름만의 총수직이라는 사실은 확인되고 있는 거나 다름 없었다. 모두들
눈을 내려 깔고 딴청을 부렸다. 가슴이 서늘하도록 윤청의 존재에 대한 비중은 모두의 가슴에
들어차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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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청의, 앞으로는 전혀 나서지 않으면서 난공불락의 왕좌에 서슬 퍼렇게 정좌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도 그랬다. 엄청난 위력이 느껴지고 있는 것은 물론, 고의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박용찬 회장을 앞
세운 전략 자체가 참으로 절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게다가 구경그룹에서 발표한 조간신문
기사에서 <…거품경쟁은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다>란 대목은 대명그룹 임원진의 정신을 더 한층
바짝 차리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거품경쟁이 뭐지?”
회의실 안에는 긴급소집된 사장단 전원이 모여 있다시피 했고 잠시 동안 웅성임이 있었지만 모두는
이미 짐작을 했다. 구경그룹의 안가님이었다. 시판을 눈앞에 두고 있는 서의개발의 ‘엔엘엔시’를
원천적으로 매도하고 보자는 작전인 것이 틀림없었다.
“골고루 하는군. 그래 봤잔데.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그대로 발표해 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요?”
그러나 매우 까다로운 문제가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다들 여유롭게 웃는 얼굴이긴
했지만 조금은 불안해하는 기색이 감돌았다. 설립 후 경영부재로 도산하는 회사를 원래 ‘포말회사’
라고 부르는 것이고 서의개발을 겨냥한 것이라면 윤청 부회장에 대한 모독을 의미했다. 어쨌거나 저
들은 이미 윤청의 조심스러운 대응에도 엄청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본사에서의 회의에 앞서 윤청 부회장에게 보고가 있었다. 김한중 이사가 연희동을 다녀왔고 윤청
부회장의 변함없는 의견을 전한 바 있었다. 구경(G)그룹에 관한 반격은 물론 모든 발표를 유보하라는.
“기업도 과학인 걸, 저들은 아직 세상 변한 것을 모르나 봅니다.”
김한중 이사는 씩 웃고 나서 손에 들고 있던 기안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어제보다 오
늘 윤청을 만나고 온 이후 한결 자신감이 엿보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차근차근 서서히 하자는 부회장님 말씀이 저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모든 결말이 목전에 다
다르고 있고 말입니다. 어제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구경그룹 계열사 중 현재 부도 위기에 놓인 곳
이 두 군데라고 합니다. 한 군데는 며칠 전 CGA에서 막아줬는데 그것으로 CGA에서는 상당한 지분확보
가 있었던 듯합니다.”
“원래 CGA에 부채가 있었던가?”
박용찬 회장이 물었다.
“네, 회장님. 하지만 굉장히 친한 사이라 구경과 CGA의 채무관계는 모종의 베일에 가려져 있는 건
이미 알려진 비밀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얼핏 듣기에는 구경 박희남 회장이 오래 전에 이미 CGA의
이병두 회장에게 백지수표를 맡겼다는 말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백지수표? 허어! 일 낼 친구들이로군!”
그거야 말로 기업윤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 사실이 뜬소문이 아니라면 업계에 흘리기만 해도 박희남 회장의 불신임은 엄청나게 커
질 겁니다. 이사회에서도 큰일을 치러야 할 건 말할 필요조차 없지요.”
“하지만 둘 다 잡아떼면 그만이지. 그리고 박희남 회장은 원래 이사회고 뭐고 독불장군이
아닌가?”
“그렇긴 하지만 이것저것 비리까지 드러나게 되면 궁지에 몰릴 건 뻔하죠. 구경(G)그룹의
이미지는 땅에 떨어질 거고 말입니다. 게다가 선수금을 돌려달라는 거래처가 줄을 이을지
모른다는 위기감까지 팽배해지고 있는 듯합니다.”
“흥, 어이가 없군.”
박용찬 회장은 말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말을 아꼈다. 그는 윤청 부회장의 결
정을 존중했다. 작은 비리라던가 몇몇 뜬소문에 방심을 하고 단 한 걸음도 옮겨 놓지 말자는
그녀의 의견은 탄복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게다가 어깨마저 으쓱해지는 기분이었다. 세상 일이 뜻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토록 조용히 핵무기를 제조하여 상대와의 일전에서 초전박살을 시도하
는 사람이 다름 아닌 여성이라니, 그는 모골이 송연할 정도의 기분을 느꼈다.
김한중 이사가 말했다.
“부회장님 의견은, 두 가지의 대책을 말씀하시고 계시던데 말입니다. 하나는 잠시 동안 구
경그룹과 CGA를 묵살해 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사업에 대해 곧 발표하는 거고요. 구경
그룹과 CGA를 치지도외하는 방법으로는 저들의 제안이나 동태를 모른 척 넘어가는 게 이번 작전의
가장 중요한 전략이 될 거라고 하시면서요. 미래를 위한 대명그룹의 중후한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하시더군요. 업계의 동향으로 보면 우리 쪽에서 완전 묵살하는 것으
로 상당한 충격파가 작용해서 오히려 구경그룹 쪽에 엄청난 부작용이 초래되리라는 결론을 내리신
거지요.”
“아아,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박용찬 회장이 감동 어린 어조로 말했다.
“하여간 우리 부회장님은 대단한 분이라니까!”
김한중은 환한 얼굴로 웃고 나서 말했다.
“네. 그리고 이번에 대명그룹에서 새로 시작하는 사업으로 미생물에 관한 미스터 레빈스키의
제안을 그대로 발표하라는 말씀도 계셨습니다.”
“아아, 그러죠, 그래!”
박용찬 회장이 흔쾌히 말했다. 그는 얼른 장학출 사장을 보았다. 어차피 장학출은 모두의 눈에
보이지 않는 윤청 부회장의 분신이었다. 윤청 부회장의 진두지휘가 그대로 드러나는 시그널 라이
트. 그러나 여전히 박용찬 회장은 결코 불만스러운 얼굴이 아닌 채 말했다.
“미생물 전진기지를 대명그룹에서 만든다는 건 꿈같은 얘기로만 생각했는데!”
장학출 사장은 눈을 빛내면서도 입을 다문 채 조용했다. 그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고 있었고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을 억제하느라 자못 근엄한 표정을 얼굴에 떠올려 놓고 있었다. 김효제
사장과 서영호 사장, 그리고 장호덕이 장학출 사장의 얼굴에 떠오른 심상치 않은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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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드립니다, 부회장님! 오늘 장 사장님과의 미팅은 예정대로 잘 치렀습니다. 콘드라티바
교수님을 마중나가는 건 남형준 박사님도 동행하실 거라고 하시더군요.”
그녀의 음성은 밝았다. 그러나 윤청으로서는 기대하지 않았던 의외의 전화였다. 장학출 사장에
게서도 그 점에 대해 전화가 걸려올 리는 없었다. 미리 그렇게 조처해 놓았으니까. 어디까지나
업무와 연관된 일이고 자신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윤청은 애써 가볍게 들리도록 조심하면서 대
수롭지 않게 말했다.
“보고는 무슨? 그런데 콘드라티바 교수를 남형준 박사도 함께 마중나가긴 어려울 걸요?”
“왜요, 부회장님? 장 사장님과 단 둘이서만 나가라구요?”
묘하게 들리는 음성으로, 그러나 활달한 어조로 김경자 실장이 물었다.
“그게 아니라 남 박사님은 아마 곧 출장을 떠나셔야 하기 때문에 바쁘실 것 같아 하는 얘기예요.”
사실은 그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윤청은 남 박사에게도 미리 말해 두었다. 어차피 콘드라티바 교
수는 매일 만나게 될 사람이니까 장 사장 혼자서 마중을 나가도록 하라고.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셈이었다. 장학출 사장과 김경자 실장이 자주 만나는 것이 현재
로선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적어도 윤청에게는 그랬다. 더 이상 어떤 무엇에도 머리를 쓰고
싶지 않았고 자책을 하기에도 지쳤다. 요 며칠 얼마나 밤잠을 설쳐야 했던가? 윤청은 전화를 끊고
나서도 계속해서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왜요, 부회장님? 우리 단 둘이서만 가라구요? 마치 어째서
냐고 특별히 묻고 있는 듯한 어조였다.
분명 김경자 실장의 말 속에는 쉽사리 해독하기 어려운 듯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윤청은 그것을
간파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사실, 김경자 실장은 머릿속이 복잡해져 있는 중이었다. 아니,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생각에 그
녀는 오후 내내 갈등을 겪었다. 넌지시 열망해 왔던 상대이긴 하지만 이미 들떠 있던 기분도 어제
임정아의 한 마디로 상당히 가라앉아 버린 상태였다. 대학시절부터 윤청 부회장의 열렬한 추종자였
다는 남자를, 현재도 해바라기 하고 있는 그를 더 이상 마음에 둬서 뭘 하겠는가?
하지만 그가 선명한 모습으로 홀연히 등장한 이후 자신의 마음속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감정이야
그렇다 치고 분명 윤청 부회장의 저의가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윤청 부회장이 독심술을 지니
고 있다는 말은 언뜻 들은 것 같았다. 그녀는 틀림없이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리고 대뜸 행동을
취했을 것이다.
‘아니야……. 이건 아니라구…….’
가슴이 시려왔다. 분명 알 수 있었다. 마음의 창문을 꼭꼭 닫아걸고 무덤과 같은 삶 속에서 단 한
발짝도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내디딜 생각을 하지 않는 윤청 부회장, 그녀는 결코 하고 있지 않은 것
이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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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형준은 공항에서 곧장 연희동으로 향했다. 필라델피아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이런 강행군은
없을 것이다. 나흘 동안의 장거리 여행에 그는 시차마저 잊은 채였다.
일요일이라 연구실 팀이 모두 연희동에 나와 있을 것이고 어쨌든 그는 도착 즉시 장학출 사장
과 연희동에서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필라델피아를 떠나기 직전 두 사람이 국제전화로 나
눈 대화는 레빈스키가 말했던 러시아의 미생물학 교수에 대해서였다. 그가 곧 서울에 온다는 것
이고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연희동에 도착하자 장학출이 와 있는 바람에 함께 스톡하우스로 향했다. 스톡하우스의
거실에 들어서기 바쁘게 곧바로 김성진 박사를 위시해서 네 명의 의학박사들과 함께 모두는 회의
에 들어갔다. 모두들 생기가 넘치고 있었지만 시간이 촉박한 것이 문제였고 시간이라는 것을 꿔오
거나 늘려 쓸 수만 있다면 이런 때 몽땅 사용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촌각을 다투다시피 서두르는 이
유는 물론 차승조의 절단된 다리 때문이고. 네 명의 박사들이 철야근무를 하면서 몰두하는 분야마다
기존의 의학방식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치료를 병행해야 하는 것도 시간에 쫓기는 이유의 하나였다.
“박사님께서 좋은 친구분을 두신 게 정말 다행이었어요. 릴 웨이스 사장님처럼 좋은 분은 미
국에서도 몇 안 될 거예요.”
남형준은 브리프케이스를 열고는 크게 확대된 사진들을 꺼내놓았다. 릴 웨이스는 이번에 그가 다
녀온 필라델피아의 웨이스 보장구 회사 사장이었다.
“어느새 상당히 진전이 됐더군요. 박사님께서 드디어 노벨상에 도전을 시작하셨나 보다고 하시
던데, 열성이 대단해 보였어요.”
김 박사는 사진을 손에 들고 들여다보며 빙그레 웃고는 말했다.
“미국에 있을 때 나하고 단짝일 정도로 친했으니까 그 사람 나라면 무조건 믿고 보는 거지.”
사진에 담긴 그림은 하지의 내부에 상세한 명단을 붙여 작성된 보장구 모형이었다. 일반 보장구
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내부의 조직 자체가 스펀지 모양의 섬유질에 가까운 기계가 분명하다는 것이
었다. 마치 그물과도 비슷했다.
“음, 우리가 전에 함께 연구하고 있었던 게 이거로군요. 센서가 부착돼 있는 인공지능 전자 고
관절고. 칩이 들어가 있지요?”
말한 사람은 인천에 있는 C병원의 해부병리과에 근무하는 정길호 박사였다. 그는 주말과 야간을
이용한 연구진의 대열에 합류한 후 한달 넘게 집이 아닌 연희동에서 인천으로 출퇴근하고 있었다.
“그래. 인공지능 전자의수는 과일을 깎을 수도 있지. 그의 아버지가 2차 대전 때 전쟁터에서 다
리를 잃었어. 아버지와 아들이 평생을 노력했지. 부자가 밤낮으로 나한테 와서 신체 각 세포의
구성과 신경계의 역할에 대해 묻고 갔었지. 그러다 하필이면 교통사고로 릴 웨이스가 다리를 다쳐
절단했구.”
고개를 끄덕이며 남형진이 말했다.
“네. 제게도 보여주더군요. 좌골 상지 부분에서 절단했는데, 탭 댄싱이 기가 막힌 분이었어요. 조명
이 밝지 않은 샤워실에서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실리콘 배합 색이 아주 기 막힌 보장구를
착용하고 계시더군요. 세상, 참! 스포츠 보장구는 봤지만 탭댄스를 그토록 기막히게 할 줄이야! 정
말이지 전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어요. 전 그토록 멋진 탭댄스는 처음 구경했어요.”
김성진 박사가 이번에 릴 웨이스에게 부탁했던 것은 인공지능 센서 의족이 아니었다. 특수재질로
된 단순한 기계부품이었고 조립시 인체와 합성이 가능한 기계의 도안은 김성진 박사가 직접 마련
한 것이었다. 머잖아 국내에서도 제작돼야겠지만 시간을 다투는 마당에 금형을 준비하는 일은 시
간과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일이어서 하는 수없이 부분적인 제작을 의뢰하기로 했던 것이다.
“완벽한 샘플은 다음 주에 먼저 사진이 오고 실물은 부사장이 직접 가지고 한국으로 오기로 했습
니다.”
남형준의 단 며칠 만에 획득한 성과로는 놀랄 만한 능률에 대해 환호성을 떠올린 사람은 관절경
검사 및 수술 전문의인 곽규진 박사였다. 그는 오랜 세월 김성진 박사와의 꾸준한 교류 가운데 많
은 의견과 복안을 공유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남 박사와 릴 웨스트 보장구 회사 사장이 호흡이 맞는 듯해서 다행이군요. 그걸로 시간
을 대폭 단축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예요.”
사실이 그랬다. 모든 것은 대화가 원활한 가운데서 오는 능률에서 기인됐다. 긴 토론조차 필요 없
이 점입가경에 이른 이번 연구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서로 다음 차례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최상의 팀워크를 이루고 있는 것이 성공을 가늠하기에 충분한 요소가 되고 있었다. 게다가 모스코
대학의 미생물학 교수가 대기 중이었다.
이번 연구와 미생물학의 연대가 필수적인 것은 생물학적 합성용 신규 미생물 효소의 필요성 때
문이었다. 기존 화학적 방법의 부작용을 없앨 수 있도록 사전 준비를 겸해서였다.
남형준이 장학출을 바라보았다. 차례가 됐음을 알아차린 장학출이 레빈스키의 말을 그대로 전했
고 김성진 박사의 얼굴이 더 없이 환해졌다.
“오, 그래요? 거 아주 잘 됐구만!”
김 박사보다 더 반색을 하는 네 명의 박사들은 잠시 눈앞의 현실이 거의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
이었다. 기업 차원의 부조가 더 없이 원활한 때문이기도 했지만 밀고 당기는 신경전 없이 온갖
경비의 충당이 일백 퍼센트의 능률을 보장하고 있는 탓이었다.
“정말이지 이토록 단숨에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뭘 하나 하려면 연구비
지원예산에 관한 신경전으로 해를 보내던 게 전혀 그렇질 않으니 가능했던 것 같긴 하지만 우리
가 운이 좋았던 것도 한 몫 한 것 같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항생제와 항암제 등 새로운 미생물 효소의 접합이라구.”
김성진 박사팀의 요구에 의해서도 확인된 미생물에 관한 명제가 대두되고 있는 마당이었다. 대명
그룹 원래의 목표는 부가가치가 높은 화합물 합성에 활용할 수 있도록, 섭씨 50도 이상의 특수환
경에서 서식하는 미생물 균주 ‘바실러스 스테오로써모필러스’에 관한 연구였다. 그런데 이번에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단백질 3차 구조분석을 통해 화학적 방법의 부작용을 없애기 위한 미
생물 유전체 활용기술의 획득은 생명과학 분야의 필수적인 요건이었고, 러시아의 모스코 대학
교수가 합류할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정길호 박사와 곽규진 박사 외에 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지 8년 만에 피아제 철학을 연구하
기 시작해 지금은 상당한 경지에까지 올라 있는 오상덕 박사, 그리고 골의학과 말초신경(면역조직
평생을 환자상태 파악과 대처요령에 대해 연구해 온 신경조직의 대가인 구본교 박사는 철학, 종
교, 논리학에 이르기까지 관심분야가 넓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의학계의 막강한 군단을 거느린 김성진 박사야말로 의학 분야에서 제외될 수 없는 생명공
학의 신기술을 고급화할 수 있는 유일한 적임자나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그는 촌음을 아껴 곧바
로 다음 단계를 향해 진입하고 있는 중이었다.
남형준은 회의가 끝날 무렵이 되자 비로소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장학출은 의기가 솟구치고 있
는 박사들을 뒤로 하고 층계를 오르면서 남형준을 향해 씩 웃었다. 새로운 분야의 접목이 윤청 부
회장의 실종에서부터 비롯됐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절로 호탕한 웃음이 터져 오를 것 같았다. 거기에
구경그룹의 덕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더. 둘이서 그토록 혼비백산해 찾고 있던 그녀는 그 와
중에서도 황금을 캐고 있었지 않은가?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둘은 차승조의 방 창문 앞을 조용히 지나쳐 안채로 걸음을 옮겼다. 두
개의 넓적한 계단 아래 잔디가 깔려 있는 곳에 내려서면서 장학출은 문득 알지 못할 감회를 느꼈
다. 언젠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저만치 모과나무 아래 정원용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던 자리가 보였다. 언제부터인가 그곳은 비어 있고 듣기에는 이종국의 장례가 끝난
직후 윤청의 지시로 지하창고에 치워버렸다고 했던 것도 생각났다.
“자네, 처음 내가 이곳에 왔을 때 생각나나?”
“그럼요.”
“그 때 내가 잡상인처럼 떠벌여댔었지?”
“천만에요! 눈 하나 깜짝 않고 하실 말씀 다 하시던 기질 밖에는 생각나질 않는데요!”
“하하…….”
“그런데 하필이면 바로 이 자리에서 차승조 군의 훈련이 시작될 겁니다. 아무래도 여기가 명당자
리가 아닐까요? 형님이 대명그룹에 들어오신 후 장족의 발전이 있었고 이번에는…… 아무쪼록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잘 될 거야. 자네가 조금 전 그러지 않았나? 여기가 명당자리라고.”
장학출은 번득이는 눈초리로 유심히 한 곳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곳에 윤청이 앉아 있었다. 차분
한 얼굴로 바라보며. 장학출은 빙그레 웃으며 얼굴을 돌려 지금쯤 그녀는 이층 내실에 있을 거라 생
각하고 흘깃 위를 바라보았다. 참, 얼마나 가슴이 설레었던가? 그는 낮게 한숨을 쉬면서 앞을 보았
고 여전히 둘은 껄껄대고 웃으며 안으로 향했다. 김하일 비서가 정원 모서리의 안채로 통하는 입구에
서 기다리며 서 있었다. 두 사람이 다가가자 그가 말했다.
“장 사장님. 남 부사장님과 함께 저녁식사나 함께 드시고 가시랍니다. 부회장님께서 식당에서 기다
리고 계십니다.”
장학출은 언뜻 김 비서를 바라보았다. 결코 나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기꺼이 김하일 비서의 뒤를 따
라 천창이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윤청이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서며 두 사람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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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테이블 위에 두 개의 파일이 놓여 있었고 장학출과 남형준이 자리에 앉자 그녀가 말했다.
“방금 김경자 실장이 있다 갔어요. 갑자기 민정애 부사장님이 팔을 다치셨다고
연락이 왔거든요. 함께 저녁이나 들고 가랬는데도 그냥 부리나케 가더라구요.”
“민 부사장님이 팔을 다치셨어요? 어쩌다 그러셨죠?”
남형준이 물었다.
“집에서 넘어졌다는데 골절상을 입으셨대요. 근처 병원에서 깁스를 하고 계시다고 하더군요.”
“저런! 다른 덴 다치신 데가 없대요?”
“다행히도 크게 다치진 않으셨대요. 내일쯤 저도 한번 가볼까 해요.”
식사가 들어 왔다. 김하일 비서가 충주댁을 거들며 식당을 들락거렸다. 식사 시중만은 들
지 않도록 했지만 손님이 있을 경우 그가 말을 듣지 않았다. 두 사람 앞의 포도주잔이 채워졌
지만 윤청에게는 잔이 없었다. 충주댁이 꽃게와 새우가 든 말간 무국을 놓고 나가자 윤청이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자, 드세요. 남 박사님께선 무척 피곤하시겠어요.”
두 사람만의 건배가 끝나자 수저를 집어 들고 국을 한 모금 떠서 마시던 남형준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이토록 맛있는 국은 없을 거예요. 충주댁 아주머니의 요리 솜씨 중 가히 으
뜸일 겁니다.”
그는 다시 수저를 놓고 장학출과 잔을 부딪쳤다. 그가 격찬하고 있는 국이 사실은 윤청의 솜씨라
는 것을 그는 알 리 없었다. 충주댁에게 윤청이 다섯 번 넘게 시범을 보여 완성된 국으로, 오한
수 회장이 즐기던 메뉴였다. 볶음 야채와 생야채 요리 역시 윤청의 주특기였고 충주댁은 특유의
자상한 배합에 솜씨를 발휘해 오한수 가의 요리는 거의 소문이 나있다시피 했다.
“릴 웨이스란 분과 콘드라티바 교수가 한꺼번에 도착하는 건 아니지요?”
윤청이 물었다.
“콘드라티바 교수가 먼저일 겁니다.”
장학출이 말했다. 레빈스키의 활약은 늘 순발력이 엿보였다. 그로 인해 두 가지 사업이 태동을
하고 있었고 그 첫 번째인 미생물학 전진기지에 관한 진척은 서의개발 김경자 실장의 진두지휘로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 김경자 실장이 있었으면 좋았을 걸. 두 분께서 보시라고 이걸 놓고 갔어요. 이따가 댁에
가서 보세요.”
윤청은 파일을 집어 각각 한 부씩 두 사람에게 건넸다. 세부적인 계획서로 둘 다 동일하게 복사
된 파일이었다. 두 사람은 파일을 받아 몇 장 열어 본 후 각각 옆자리에 놓았다. 괜찮았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고 저녁식사는 맛있었다. 그리고 천창이 아름다운 식당의 분위기는 더 없이
호화로우면서도 아늑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포도주 잔이 없는 그녀의 조용한 식사는 마주 앉은 두
사람의 가슴을 조심스레 저미고 있는 중이었다.
“두 분이 오시더라도 절대적인 보안이 지켜지도록 각별히 조심해 주세요.”
윤청이 말했다. 간담이 써늘하도록 냉철한 그녀에 대해 장학출은 다시 한번 놀라움을 느끼며 얼
굴을 들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빈틈이라고는 전혀 없질 않은가?
‘저 정도니 대그룹을 이끌어갈 수 있지…….’
표면에 나서지도 않고 하는 일이어서 더 놀라웠다. 지금도 그녀는 두 남자를 마주하고 화기애애
한 저녁식사를 하면서도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표정 변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마음
이 쓰렸다.
세계적인 보르도산 샤또 마고를 두잔 째 마시는 동안 잔잔하게 혈관 속에 스며드는 향취 때문일
까, 둘 다 점차 말이 줄어들었을 즈음이었다. 윤청은 두 사람이 식사가 끝난 것을 건네다 보며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분 천천히 얘기들 나누다 가세요. 정애 언니가 깁스 끝내고 집에 와 있을 텐데 전화 좀 해
야겠어요.”
두 사람이 일어서 있는 동안 그녀는 식당을 나갔다. 갈색의 질감이 부드러운 원피스가 그녀의 훤
칠한 키에 잘 어울렸다. 오한수 회장 타계 이후 은회색과 갈매기 색 이외의 옷을 입은 적이 없긴
하지만 우아한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그녀의 늘씬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장학출은 머리를 흔
들었다. 차라리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지나칠 걸……. 장학출은 자리에 앉으면서 다시 와인병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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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자 실장은 민정애의 부상을 핑계로 일찍 자리에서 일어섰던 건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며
차를 몰았다. 그녀는 식당 안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솔직히 아무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
다. 천창은 아름다웠고 격조 높은 실내의 분위기는 금방 그녀를 압도했다. 세 번인가 윤청 부
회장과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점심때였고 조명 탓일까, 이토록 샹들리에 아래 아름답고
소담한 꽃장식이이며 크리스털 잔들, 주위의 데코레이션에 어울리는 은기 등이 도드라져 보이진
않았었다.
샤또 마고의 포도주병이 은기로 된 얼음통에 꽂혀 있는 것을 보며 그녀는 이미 일어설 차비
를 갖추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금해야 하는 일은 자신의 자존심에 저촉이 될 만한 일
, 그리고 그런 자리를 피하는 것 등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존심이 다치는 건 싫었다. 그녀는 장학출의 마음을 읽고 있었던 편이고 이미
알려진 비밀이었다. 그가, 또한 남형준 박사가 얼마나 그녀를 연모하고 있는지 모르는 바보는 대
명그룹 안에 한 명도 없다는 것도 알았다. 모두들 익숙해진 나머지 뉴스거리가 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씁쓸하게 자조의 웃음을 머금은 채 잠실 어귀로 접어들었다. 비로소 배가 고파왔다. 보나마
나 민정애 여인이 함께 식사할 처지가 아닐 것은 뻔했다. 그녀는 대시보드에 파랗게 드러나 있는
시계를 보며 이미 저녁 일곱 시가 넘고 있는 걸 알았다. 아무 데서나 뭘 좀 먹고 민정애를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까지는 그런대로 덤덤할 수 있었다. 그러나 먹자거리를 찾아들어 한 분식
집에 앉았을 때 그녀는 벌컥 자신에 대해 화가 나기 시작했다. 자기가 자기를 두려워하다니! 도대
체 뭘?
지금쯤 그들은 샤또 마고를 마시고 있을 것이다. 눈앞에 와인 잔을 들고 있는 윤청의 얼굴이 떠올
랐다. 정말로 그녀는 괜찮은 여자였다. 고혹적인 얼굴 위에 떠올린 미소가 천창 아래 샹들리에 불빛
아래서 눈부시겠지. 그녀는 자신을 죽도록 흠모하는 두 남자를 은근슬쩍 바라보며 부르주아의 냄
새가 물씬 풍기는 표정으로 그룹 총수나 마찬가지의 위엄을 과시하고 있기도 하겠지.
그녀는 또 자신에 대해 더욱 화가 나려고 했다. 장학출. 그는 또 바보같이 사랑하는 여인 앞에 고
작 가신이 되어 쩔쩔매고 있겠지. 오늘밤 그 꼴을 보면 더 많이 그를 단념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런
데 비겁자마냥 피해서 도망쳐 나오다니.
그러나 곧 김경자 실장은 머리를 저었다. 어차피 윤청 부회장과 게임이 안 될 바엔 만약을 위해
그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공연한 경쟁심을 갖는다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난 지
혜로운 여자잖아.
하지만 그녀는 이미 자존심이 몹시 상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김경자
실장을 보자마자 민정애는 눈을 크게 떴다.
“부회장님하고 함께 저녁이나 들면서 의논할 게 있다고 하지 않았어?”
“내일 해도 되요.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그냥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만하니 다행이네요, 부사
장님.”
민정애가 부사장이 된 것은 큼지막한 불상사가 있기 직전이었다. 윤청이 많은 것을 정비하느라 상
당히 분망한 한 때를 보낸 적이 있었다. 그때 민정애 실장은 기획실장에서 부사장으로, 김경자는
기획실 차장에서 실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세르게이가 사살되는 끔찍한 과정을 거친 후 서의개발은
훨씬 더 비중 있는 계열사로서 지금 한참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오른손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이에요, 부시장님. 일주일만 그대로 쉬시다 나오시면 되잖아요.”
그 때 윤청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민정애는 질색을 하면서 말했다.
“오지 말어, 제발……. 그렇게 바쁜 몸이, 그러다 또 기자들이라도 따라 붙으면 어쩔려구 그래?”
민정애는 잠시 후 전화를 끊고 나서 말했다.
“장학출 사장님과 남형준 부사장님이 식당에서 얘기중일 거라고 하는군. 김 실장이 저녁도 안 먹고 와버려서 걱정이라고 전해 달랬어. 파일은 집에 가서 보도록 잘 전했다고…….”
김경자는 물끄러미 허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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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일이었다. 다름 아닌, 바로 돌연한 사태에서 그 일은 비롯되었
다. 거의 어처구니는 한순간에…….
윤청은 오후 세 시경 민정애의 집에 도착했다. 민정애가 어젯밤 전화에 대고 절대 오지 말
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윤청은 기어이 병문안을 위해 찾아온 길이었다. 민정애는 다행히도 팔
목을 접질러서 뼈에 금이 갔고 인대가 조금 늘어지긴 했지만 왼손이어서 그래도 상당히 나은 편이었다.
“어쩌지? 지금 한창 바쁜 때인데.”
둘은 잠깐 현황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설마, 노하우만 유출되는 건 아니겠지? 계속해서 수입에 의존할 것도 아닌데.”
“다행히도 릴 웨이스란 분은 자기나라보다 김 박사님을 더 사랑하는 분인가 봐요. 남자들 간의
의리가 국적을 초월해서 보장될 정도라니 멋진 얘기 아니에요?”
“우리나라도 기계 제작의 섬세함은 어느 나라 못지않을 텐데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는 게
문제라구. A/S가 필요 없는 기계주문에 남 박사가 그토록 고생을 해야 하니 말이야.”
“정교함은 모방하면서 하자 발생에 대해 근본적인 준비를 할 줄 모르는 게 문제죠. 나중에 꼭
사단이 날 걸 알면서 우선 완성해 놓고 보는 게 우리나라 사람들 특성이잖아요.”
“성질 급한 민족이라서 그래. 뭐든 빨리 빨리니까.”
윤청은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왜, 가려구? 기왕 왔는데 조금만 더 있다 가지 그래.”
“아니에요, 언니. 좀 들러보고 싶은 데가 있어요.”
그녀는 무심결에 막 방을 나서다가 민정애를 향해 돌아섰다.
“나 이상한 꿈을 꿨어요. 그런 꿈 생전 처음 꾼 것 같아.”
“응? 무슨 꿈?”
“요즘 새로운 일을 연거푸 모색해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글쎄 백화점 하나가 무너지는 꿈을
꿨다니까요?”
“뭐어?”
다음 순간 민정애는 픽하고 웃었다.
“대명건설이 새로 또 하나 짓게 될라나 보지, 뭐. 꿈은 반대라니까. 그 무너졌다는 백화점이
설마하니 111년 전 대명건설에서 지은 백화점은 아니겠지?”
“언니! 바로 그 백화점이란 말예요.”
둘은 웃었다. 틀림없이 새로 원청회사의 수주계약이 이뤄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농담까지 하면서
둘은 아파트의 현관 앞에 다다랐다. 윤청은 현관에서 신발을 꿰고 얼른 돌아서며 민정애를 안으로
밀었다.
“더 나오지 말아요, 언니. 내가 올 때마다 걸터앉곤 했던 저 아래 화단 옆이 아쉽긴 하지만 오늘
은 그냥 계시라구요.”
억지로 문을 닫은 윤청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이 아파트는 민정애처럼 살뜰한
데가 있는 데다 조용한 주변환경에 정성들인 흔적이 엿보이는 조경에는 상당한 운치가 엿보였다. 아파
트라도 주거환경이 이 정도면 삶의 질적 향상은 누구나 모색해 봄직 했다.
윤청은 민정애와 둘이서 모처럼 걸터앉곤 했던 벤치를 그냥 지나쳐 한길을 향해 걸어 나갔다. 민정
애에게는 알리지 않았지만 그녀는 오늘 택시를 타고 왔다. 곧 택시에 오를 수 있었고 숨어 살다시피
하는 처지에 모처럼 사람 사는 묘미 같은 걸 느끼며 그녀는 깊숙이 시트에 기대 앉아 차창 밖으로
시선을 내보냈다.
빨간 지붕을 얹은 올망졸망한 상가들을 지나 벽돌색 타일에 짙은 초록색의 지붕을 얹은 초등학교인
듯한 정문을 지나고 한적한 도로가 끝나는 지점까지 왔을 때 윤청은 문득 생각이 났다.
“기사님, 스타백화점으로 좀 가주실래요?”
이윽고 택시가 혼잡한 도로를 밀리고 지체하면서 스타백화점에 다다랐을 때는 다섯 시 10분이 조금
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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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청은 얼마 전 번다한 눈을 피하기가 용하다는 이유로 일부러 이곳에 들러 에스티 로터의
화장품을 사간 적이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1층 매장을 한 바퀴 돌았다. 쇼핑을 하고 싶은 생각
은 없었고 아이쇼핑 삼아 한 바퀴 돌아보고 나갈 심산이었다. 시간관계인지 쇼핑객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에스컬레이터는 별반 붐비지 않았고 그녀는 무심한 눈길로 사방을 돌아보며 2층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다시 에스컬레이터에 올라 4층까지 다다랐다.
윤청은 무심결에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5시 21분이었고 호화백화점치고는 너무 후덥지근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5층으로 오르는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막 몸을 돌렸을 때였다.
누군가 위쪽에서 쏜살같이 아래로 내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거의 펄쩍펄쩍 뛰다시피 에스컬레이터
를 역행해서 곡예를 하듯 내려오는 사람은 키가 훤칠한 남자였다. 미처 몸을 피할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코끝에 강한 향수냄새가 스치는가 했을 때 윤청은 그만 핸드백을 떨어뜨렸다.
윤청은 어이가 없었다. 재빨리 핸드백을 집어 들기가 바쁘게 순간, 상식 밖의 행동을 저지르고 있
는 남자를 후딱하니 바라다보았다. 엄밀히 말해서 옆얼굴이었다. 미남형의, 훤칠한 키에 매끄러운
질감의 갈색 신사복을 입은 남자가 여전히 전후좌우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쏜살같이 시야에서 사
라지고 있는 중이었다.
윤청은 애써 불쾌감을 누르며 5층까지 오르려던 생각을 바꾸어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이해되지 않는 것은 위로 오르고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성큼성큼 아래를
향해 내닫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탔을 때는 오른쪽에 비켜선 채 뛰지도 말아야
한다는 규율쯤 전혀 모를 남자가 아닌 것은 그의 옷차림으로도 알 수 있었다.
윤청은 자신도 모를 정도로 다른 날과는 다른 불쾌감을 억제할 수 없는 채 매장을 한바퀴 돌아
지하로 내려갔다. 핸드백을 날치기 당한 것도 아닌데 그토록 과민반응을 하게 된 스스로에 대해 조
금 언짢은 기분마저 들고 있었다.
윤청은 무심한 눈길로 주변을 바라보며 천천히 지하실을 한 바퀴 돌았다. 그러다 도자기 코너를 바
라보며 막 한 걸음 옮겨놓았을 때였다.
‘아!’
윤청은 멈칫했다. 방금 눈이 마주친 여자는 틀림없이 이예라였다. 윤청은 자신도 모르게 재빨리 얼
굴을 돌렸다. 그러나 좀 늦은 것 같았다! 분명 이예라는 펄쩍 뛰듯이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내어딛고
있는 듯했다. 윤청은 모른 척 4층에서 자신을 밀쳤던 그 남자보다 더 빨리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슬쩍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이예라를 본 적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뒤를 돌
아다 볼 수는 없었다. 이예라가 손짓을 하거나 부를 수도 있었다. 에스컬레이터가 1층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뛰다시피 백화점을 등지고 정문을 빠져 나왔다.
때마침 빈 택시에 오른 윤청은 그제야 흘깃 뒤를 돌아다보았다. 정문 안에서 밖으로 뛰어나오고 있
는 이예라의 모습이 보였다. 윤청은 얼른 몸을 바로 해서 앉았고 차가 달리는 동안 슬며시 자신에
대해 돌아보았다.
오랜만에 그녀를 만나 서로 반가워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예라는 순간적으로 반색을 하지 않았는
가? 그녀가 언제 귀국했는지, 그리고 또 언제 출국할 것인지 다정하게 얼굴을 맞대고 물어볼 수도
있었다. 얼마든지 그랬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돌이켜 보면 이예라는 불순한 취지에서 오해를 하고 인사도 없이 떠났었다. 요사이 늘 마음 잡히던
생각은 하나였다. 어떻게 남형준 박사와 자신을 걸어 그런 오해를 할 수 있는가 하고. 그 생각을 하면
오늘 만약 그녀가 연희동으로 찾아온다 해도 당장은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윤청은 자신을 향해 한번 픽 웃고는 시트 깊숙이 눌러 앉았다. 옹졸하게 자꾸만 그런 식으로 생각을
몰아가다니. 차창 밖으로 울긋불긋한 숨쉴 공간도 없이 들어차 있는 간판들을 바라보며 문득 자신이
너무 철옹성에 갇혀 지내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평범하고 무난한 삶이 그녀는 그리웠다. 늘 초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닌, 인간냄새만이 풍기는
그런 생활이 하고 싶었다. 아침 늦은 시간에 일어나 잠옷 바람으로 베란다의 꽃향기를 맡으며 화분에
물을 주고 진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맨 발로 거실을 오락가락하고 싶었다. 윤청은 다시 픽 웃고는
어느새 연희동의 낯익은 골목에 다다랐음을 알아차렸다.
나갈 때 핸드폰을 깜빡 잊고 두고 나갔던 것이 연희동에 온통 난리가 터진 이유였다. 아니, 그 이전
에 세상이 온통 발칵 뒤집혀 있는데도 택시에 라디오가 고장난 것이 아무 것도 몰랐던 이유였다.
“부, 부, 부회장님!”
경비원 박 씨의 얼굴을 보면서 윤청은 자신이 뒤쪽 연구실을 거쳐 뒷골목으로 나간 이유인 때문으
로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한편 이예라는 동동 발을 굴렀다. 조금만 더 빨리 나왔더라도 윤청 부회장이 택시에 오르기 전에
그녀를 붙들 수 있었을 것이다. 보고 싶었노라고 호들갑을 떨며 어색한 기분 따위를 얼마든지 풀어
버릴 수 있었는데.
어쩌면 윤청 부회장이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오늘 저녁 연
희동에 한번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전화든 뭐든 아무 것도 말하지 말고 그냥 스스럼없이 찾아
가는 것이 나을 거라고. 그런데 이예라의 그 생각들은 순간, 돌연히 몰아닥친 폭풍과 굉음으로 단숨
에 날아가 버린 거나 다름없었다.
무엇이 일어났는지, 처음에 그녀는 얼른 사태를 간파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눈앞을 보았고 겨우
실체를 확인하자 이예라는 그만 혼이 달아나는 듯했다.
“오, 맙소사!”
실로, 뭐랄까, 정녕 믿을 수 없는 정경이 바로 눈앞 전방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불과 2, 3초
밖에 되지 않은 짤막한 순간이었다. 아니, 폭풍에 휘말린 분진이 걷히기까지 영겁의 시간이 흐른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던 것인데 또 자신도 모르게 눈앞 전
방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이예라는 목구멍이 찢어져라 길게 비명을 질렀다.
“아! 아앗…….”
결코 괴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비명이 누가 듣거나 말거나 거듭하여 목구멍 너머로 새어나오는 걸
느끼며, 서너 걸음을 이예라는 앞으로 내달았다. 그러다 우뚝 섰다.
“오, 오…… 하느님!”
갑자기 공포가 엄습해 왔고 그제야 성경 속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의 도시에 우뚝 서있는 듯한 느
낌이 들기 시작했다. 전신으로 공포와 전율이 밀려들었다. 금방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고 사시나무
처럼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길가 전신주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이예라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을 매우고 있는 것은 자
욱한 분진이었다. 뽀얀 안개 속 같은 곳에서 누군가 나타나고 있는 듯했다. 눈을 부비고 머리를 털
며, 또다시 누군가 피투성이가 된 여자를 등에 없고 비칠거리며 나서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뒤를
이어 땅바닥을 기다시피 반쯤 허리를 구부리고 두세 명씩 엉겨 나오고 있는 모습들도 보였다. 길
가던 행인들이 뛰어들고 있었고 분진 사이로 사라졌다가 다시 피투성이의 사람들을 부축해 나오곤
했다.
이예라는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사방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꼼짝도 할 수
없다. 일어선다 한들, 한 걸음도 제대로 발을 떼어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눈에는 잘 보이
지도 않는 것들이 억척스럽게 눈앞에 널려 있었다. 그것들은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고, 사방은 무
엇 하나 분간하기 어려운 물체들로 마치 꿈속인 양 어지럽혀져 있었다.
“오, 맙소사! 오, 오…….”
그녀는 거듭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어느 결에 눈앞에 우뚝 서있던 건물의 형태는 간곳이 없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있었음직한 바로 그곳에는 잔해가 덮여 있다. 그러자 문득 살았다는 생각이 밀물처럼
머릿속에 들어찼고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일어서서 한 걸음 내딛는데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밀치
고 사정없이 내닫고 있었다. 뒤를 이어 미친 듯이 내닫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분진이 휘
덮인 하늘 아래 너덜너덜 찢겨져 나간 건물의 벽을 향해 사람들이 무턱대고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예라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따라가다가 핸드백 안에서 가늘게 울리고 있는 전화벨 소리에 멈칫
했다. 그래……. 아까 도자기를 보러 왔다고 아빠에게 전화를 했었는데…….
“여보시요!”
벼락을 치는 듯한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다. 그녀는 깊이 들어마신 숨을 후-, 하고 내쉬며 전화에 대
고 말했다.
“아빠, 저예요…….”
“오, 오오! 오오, 예라야…….”
그는 숨을 몰아쉬는 듯했다. 잠시 후 그가 허둥대면서 묻고 있었다.
“너, 다친 데 없냐? 지금 어디 있냐?!”
그는 불과 수 분 전에 딸애의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외국인 친구 생일선물로 도자기 하나를 사고
책방으로 올라갈 거라고.
“아빠. 지금 나…… 나 아빠가 보고 싶어요…….”
“그래, 예라야! 거기가 어디냐? 아빠가 곧 그리로 가마!”
거리는 뭐든 물체라는 물체는 모두 밀려들었고 완전히 포화상태였다. 흰 솜뭉치에 빨간 실타래를
드문드문 흩어놓은 듯한 사람을, 부상자를 등에 없고 미친 듯 달리고 있는 사람들. 아비규환의 현
장에서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는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에 파묻혀 떠오를 새도 없었다. 이예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갑자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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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청 부회장이 돌아왔다는 전화가 걸려온 이후 장학출은 두 번째로 피가 마르는 과정을 거쳤
음을 알았다. 자신과 현실 사이에 분명한 괴리였고 거의 자신에 대해 용서할 수 없는 듯한 어
처구니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리다시피 했다. 민정애 서의개발 부사장의 넋을 잃은 듯한 음성은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뇌리에 불현듯 떠오르던 생각을 이제도 지워낼 수 없었다. 그것은 다
름 아닌,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에 대해서, 그런 자신에 대해 열화와 같이 들끓어 오르던 분노
였다. 단 한번 입 밖에 내어 말할 수 없었다는, 하지 못했다는 그 자체야말로 어떤 의미와도 견
줄 수 없는 회한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살아서 돌아와 있다. 지금, 넋을 놓고 있기는 할망정 눈앞에 고즈넉이 앉아
서 테이블 위로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연희동이 다시 터져나갈 듯 붐비기 시작했고
그녀가 소감 한 마디 내뱉지 않고 있는데도 모두들 황홀한 눈빛이었다. 그는 마음속으로만 길게
한숨을 토해내며 조금 전 반쯤 혼이 달아난 바 있는 남형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어이없게도 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 닮은꼴의 바보가 또 한 사람 우두커니 앉아
깍지 낀 손을 내려다보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지 않은가?
방송은 스타백화점 붕괴 원인을 건설 당시 제도적 사각지대의 병폐로 꼽았다. 감독관청이 합법
적인 절차를 무시한 채 허가해 줬고, 민간건축물의 안전관리가 허술했고, 설계변경이 잦아 설계
도면을 완성하지 못한 채 공사에 착수했던 것도.
윤청은 미래의 어느 날에도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길고도 끈질긴 회의에 대해 말할 생각이 없
었다. 지금은 조금씩 충격이 가라앉고 있지만 소름 끼치는 불가사의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지 않
았다. 오싹할 정도로 선명했던 지난밤의 꿈,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윤청은 알 수 없었다.
지난밤의 꿈은 벽장에서 꺼내들었던 쇼핑백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그 안에 넣고자 했던 것은
민정애에게 가져가기 위해 서재에서 뽑아든 두 권의 책과 받침대였다. 다친 손목에 지장이 없도
록 편히 앉아 독서라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무심결에 쇼핑백 한가운데에 있는 그림에
시선이 가는 순간 윤청은 자신도 모르게 소스라쳤다.
그녀를 자지러지게 했던 것은 지난밤 눈앞에 선명히 드러났던 대로 건물 그림이 너무나 생생하
게 시야에 뛰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쇼핑백의 표면에 세워져 있던 건물인 양 허물어져
내리던 정경은 꿈에서도 비명을 질렀을 정도로 너무나 끔찍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와
르르, 소리라도 날 것만 같았던 붕괴 이후 하얗게 떠오르던 분진. 그것을 이예라는 직접 보았다고
하지 않는가? 어처구니없는 환영이었다. 눈앞으로 갑자기 휑하게 넓어진 하늘이 보였다. 게다가
하얗게 매워오던 분진…….
그녀는 이예라가 망연한 표정에 덮인 채 인도에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던 것을 생각해냈다. 그래서
이예라는 무사할 거라 생각했고 실제로 그녀는 무사했다. 자신은 결국 이예라를 구하기 위해 거기
들렀던 게 아닌가? 점차 마음속이 정리되어 갔다.
“현재 증축 공사중인 부산의 희래백화점에 엄청 영향이 미칠 거라고들 하는데 말입니다.”
김효제 사장이 이 때다 하는 듯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조금 전 연락이 왔는데 공사를 중단하고 있다더군요.”
“말도 안 돼요.”
윤청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김효제 사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우리가 증축하고 있는 문제를 놓고 구경그룹에서 대뜸 거론하고 있는 듯합니다.”
장학출이 말했다.
“하지만 억지가 섞여 있는 건 삼척동자도 알 겁니다. 우린 완벽한 검사를 마친 후 공사를 시작
했고 기초공사가 완벽한 상태라서 스타백화점처럼 내력벽과 슬래브 연결 철근의 정착 부실 같은
건 거리가 멀거든요. 고적하중 적재에 의한 설비하중 초과가 이번 스타백화점 붕괴의 원인으로 밝
혀지게 되면 책임은 전적으로 국한되게 마련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로선 얼마든지 할 말이 있을 겁
니다. 설계회사도 마찬가지일 테구요. 하여간 너무 염려마십시오.”
윤청은 이제 스스럼없는 얼굴로 장학출 사장을 향해 물었다.
“그래도 재진단팀을 이미 내보냈다고 하셨나요?”
장학출은 얼른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이제껏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
는 얼굴이었다.
“네. 설계사무소 팀과도 연락이 닿았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별일 없을 겁니다. 좀전에 라디오 방
송을 들으니까 스타백화점 측에서 불과 한 달 전에 옥상에 새로 들여다 놓은 설치물이 있었다고 합니
다. 하중이 견디기 어려운 무게였다는 겁니다. 붕괴원인이 될 만한지 좀더 자세한 원인이 드러날 겁니다.”
“하지만 구경그룹에서 호재라고 여기며 뭔가 열심히 만들고 있을 걸 생각해야 돼요.”
물샐 틈 없이 마지막까지 다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장학출은 다시 한번 번쩍 정신이 드는 듯했다. 생각
지도 않게 달려가 이응렬 변화사의 딸을 살려낸 그 자체 때문에도 지금 대명그룹 내의 전
직원이 아연해 있는 것조차 생각났다. 그녀는 또한 단순한, 그냥 여리고 보호받기에 그치고 있는
여인이 아니라는 사실도. 그는 슬며시 어깨를 내리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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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실에 들어와 윤청이 무심결에 텔레비전을 켰을 때 스타백화점의 참상에 대한 뉴스는 연속
적으로 방영되고 있었던 듯했다. 금세 온 화면에 아수라장이 돼있는 현장이 드러났다. 윤청
은 소름 끼치는 장면들을 보면서 얼굴이 핼쑥해서 앉아 있다말고 얼른 텔레비전을 껐다.
다시는 뉴스에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윤청
은 비로소 외출복 차람인 걸 알아차리고는 실내복으로 갈아입다가 다시 텔레비전에 눈길이
쏠렸다. 공연히 싸우지 말자고 생각했다.
다시 텔레비전을 켰다. 여전히 같은 내용이었다. 엄청난 소음에 섞인 채, 스타백화점의 썩 달라진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뚫어져라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며 연이어 전율을 느
꼈다. 그리고 더욱 자신도 알 수 없었던 요소들이 공포감으로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이건 꿈이야.’
그녀는 다시 한번 중얼 거렸다. 비로소 알 것처럼 느껴졌다. 비로소,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어째서 이토록 전신에서 온 힘이 빠져나간 듯이 느껴지는가를. 그러나……. 도대체
이 불가사의한 느낌을 어떻게, 누구에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녀는 스톡하우스의 대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납작한 샌들을 신은 채 밤늦은 산
책길을 무심히 나선 얼굴로 골목을 벗어났다. 그리고 때마침 옆을 지나던 택시를 잡아탔다.
붕괴현장에서 수 킬로 떨어진 지점인데도 무척이나 차가 밀리고 있었다. 더 이상은 앞으로
나가기가 무리다 싶은 지점에 이르자 그녀는 택시에서 내렸다. 그녀는 사고지점을 바라보며
전방을 30미터 가량 걸었다. 밤이 꽤 늦은 시각인데도 현장은 대낮같이 밝았다.
인근 도로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응급차들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었다. 그리고 무질서의
현장에는 도처에 사람이 밀리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극도의 혼잡 가운데서 도로를 가로질러 사
법연수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건너편 인도에서라면 붕괴현장을 한 눈에 보기가 용이할 것
같아서였다.
스타백화점 맞은편 도로를 따라 걷고 있을 때 점차 아수라장의 단면도가 눈앞에 선히 드러났
다. 그것은 이름하여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모습이라고 9시 뉴스의 앵커는 말했었다. 텔
레비젼 화면으로도 거의 그랬다. 전선 매체를 통해 시청자의 눈에는 그렇게 전달되기에 족했
다. 그러나!
음성만으로 전해진 아비규환의 현장은 실제의 육안으로 보는 것과 큰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지상 위의 어느 곳에서도 함부로 그 정체를 드러내기 어려운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폭삭 붕괴된 건물은 단순한 한 건물에 지나지는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불과 얼마 전까지 거
대하게 살아 움직이는 한 생물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곳은 현란한 색체와 부를 지칭하는 온갖
것들이 일반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호객행위에 몰두해 있던 곳이었다. 사흘 전에는 그녀도 쇼
핑객으로 각층의 매장을 어슬렁거리며 다녔었다.
그녀는 또다시 오싹하는 전율을 느끼며 백화점 북관의 엘리베이터 타워가 껍데기만 남아 덜레
덜레한 것을 바라보았다. 그 위로는 검은 하늘이 덮여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망연히 선 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붕괴 직전에 놓인 잉여분의 건물은 땅바닥에 흐트러져 있는 잔해들보다 더 흉칙한 몰골로 서
있었다. 버틴 채, 자신의 부를 더 많이 늘리고 축적하기 위해 수많은 목숨을 할퀴고도 뻔뻔스
럽게 고개를 들고 서 있는 사주(社主)와 너무나 흡사한 표정을 하고서.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았다. 검은색 독가스의 불길, 차마 부끄러워 그 얼굴을 드러내지
못한 채 연기만 내뿜고 있는 불길. 119 구조대원들, 소방대원들, 민간 봉사자들, 군인, 주민,
행인. 모일 사람들은 다 모인 것 같았다.
그녀는 눈에 익은 마크를 바라보았다. 대명그룹의 권속 또한 중장비를 투입한 모양이었다. 아직
사용이 불가한 상태에서 대기발령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뒷걸음을 치기 시
작했다. 그녀는 걷다가 돌아보고 보다가는 또 걸었다. 대명의 권속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고 있을 게 틀림없다. 장학출 회장이 그녀가 없이도 잘 하고 있다는 걸 그녀는 환히 알고
있었다. 바라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말이다.
공해처럼 남아 있는 미붕괴 건물은 글자 그대로 여직 끝나지 않은 해독처럼, 교훈처럼 눈앞에 우
뚝 서있다. 제2, 제3의 붕괴 위험을 모두에게 절감케 하면서. 그 때문에도 구조작업은 미로를 돌
아가듯 아득한 선회를 하고 있다.
그녀는 많이 걸었다. 방금 주유소 건물에서 들끓고 있던 사람들 사이를 막 빠져나온 길이었다. 그녀
는 천천히 외곽지대를 향해 교대 담장을 끼고 걷기 시작했다. 시간은 밤 11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택시를 잡아야겠다고 문득 차가 오는 쪽을 돌아다보던 길에 그녀는 인도에 연한
상가 건물에 사람들이 몰려 서있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이 모여 서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닥 크지 않은 전파상인 듯 안에 있는 몇몇은 각
자가 의자 같은 것에 앉거나 기대 정신없이 TV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심한 눈길로 두 사람이 나란히 선 사이로 TV 화면을 바라보았다. 들것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곧이어 뒤쪽의 문이 활짝 열려져 있는 앰뷸런스의 상단이 보였다. 인턴인 듯한 남자
한 명이 앰뷸런스 안에서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잠시 후 화면이 바뀌었다. 멀어져 가는 사이렌
소리를 뒤로 한 채 마이크를 든 여자 리포터가 현장 상황에 대해 긴장감이 감돌면서도 침착한
목소리로 상세히 보도하고 있었다.
아비규환의 생지옥을 방불케 하는 모습은 리포터의 주변에선 드러나지 않은 채였다. 단지 리포
터가 보도하고 있는 매몰 현장의 상황은 소름 끼치는 것이 분명했다. 붕괴 건물 잔해들 사이에 수
많은 인명이 마치 시루가마 속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 같다는 표현이 특히 그랬다.
그녀는 방금 화면에 드러난 얼굴을 주시했다. 또다시 그였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어처구니없는
우연이 그녀의 눈앞에 두 번째 영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도대체 전에 어디서 봤을까?
아득하리만치 그저 낯익기만 한 모습은 틀림없이 아내가 매몰돼 있을 거라며 이제껏 구조반원들
사이를 누비고 다닌 듯한 그 남자였다. 기자의 질문을 받은 듯 그가 말하고 있었다.
“집사람에게 전화를 받은 게 저녁 5시 45분 경이었습니다. 그 때는 아무런 이상도 발견한 것 같
지 않았습니다. 나는 멀리 와 있으니 집으로 바로 들어가라고 말했구요. 그러다 뉴스 속보를 듣고
지금 대전에서 이리로 곧장 달려온 길입니다.”
사고현장에서 마지막으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던 시각이 바로 붕괴 직전이었다는 점에서 그 남
자는 지금 막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는 듯했다. 그의 뒤로 목격자들의 증언이 이어졌고 작은 일화
등에 얽힌 보도가 이어졌다. 또다시 보도진에 둘러싸여 얼굴 하나가 클로즈업 되고 있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방금 대전에서 차를 달려온 길입니다. 제 아내가 변을 당한 것 같습니다. 틀림없이 그런 것
같습니다!”
곧 화면이 바뀌었고 눈을 크게 뜬 아가씨 한 명이 새하얗게 바랜 얼굴로 말하는 모습이 비쳤다.
“울 언닌 임신중이에요! 그래서 빨리 걷질 못했어요. 내가 먼저 쇼핑백을 차에 싣기 위해 나왔
댔어요!”
윤청의 눈길은 언니를 잃은 아가씨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낯익은 남자의 얼굴
이 또다시 화면에 드러나지 않을까 했지만 어느새 화면은 바뀌었다. 그녀는 가늘게 눈살을 찌푸
렸다. 뇌리에 각인된 듯한 그 얼굴은 미로를 떠가는 구름처럼 아득했지만 아직 그의 음성은 생생
하게 귀에 남아 있었다. 방금 대전에서 차를 달려온 길입니다. 제 아내가 변을 당한 것 같
습니다! 그는 보도진을 향해 말하고 있었고 거의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불과 1분 정도 지났을까 다시 리바이벌되는 화면이 비쳐졌다. 또다시 그 남자였다. 또
다시 같은 음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윤청은 미친 듯 머릿속을 뒤지기 시작했고 비로소 생각해냈다.
바로 그 남자였다! 바로 그……. 윤청은 핼쑥해진 얼굴로 유심히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리
포터의 음성이 뒤를 잇고 있었다. 그 남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륜설계의 송기영 대표는 대전에서 오늘 오후 스타백화점 붕괴사고가 있기 직전 5층의 식당가
에 와있던 부인과 휴대폰으로 통화했다고 합니다. 그 때가 사고 나기 불과 10여 분 전인 5시
45분경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시각 5층에서 그는 거꾸로 내려왔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지방에 있었다는 말을 상당히
설득력 있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계속-
글 김나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