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관광업계가 요즘 웃음을 되찾고 있다. 9ㆍ11 사태 이후 발길을 돌렸던 미국인들이
다시 유럽 대륙의 곳곳을 누비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이맘 때 유럽의 역내 여행업계와
관광ㆍ숙박업소들이 울상을 짓고 있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이다.
1년 전엔 비관 일색
지난해 여름 유럽 관광업계는 9ㆍ11 테러와 이라크 전쟁 이후 국제정세가 불안한 데다 세계
경제가 침체를 확실히 벗어나지 못했고 사스(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 바이러스마저 출현해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프랑스 지중해안의 니스와 칸에서 동쪽에 위치한 오스트리아의 빈, 서쪽의 암스테르담 등에
이르는, 유럽의 이름난 관광도시들마다 텅 빈 침대, 썰렁한 점포, 발이 묶인 관광버스를 보
고 한탄하는 소리가 속절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특히 미국인 관광객이 크게 줄어들고 일본인
의 유럽 방문이 예전만 못한 것이 유럽 관광업계의 신경을 건드리는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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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시내 식당과 극장 및 쇼핑가가 밀집해 있어 매력적인 관광지로 꼽히는 독일의 포스트다메르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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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산업의 경제적 기여도가 높은 프랑스에서는 미국인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을 유
력지 ‘르 몽드’조차 1면 만평에서 취급할 정도로 뉴스거리가 됐다. 르 몽드는 종려나무 아래
서 쉬고 있는 두 명의 내국인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이를 희화적으로 표현했다. 한 사람이
“정말이야. 오늘 미국인을 봤다니까”라고 말하자 상대방이 “랜스 암스트롱 말이지?”라고
대꾸하는 내용이었다. 암스트롱은 프랑스의 여름을 뜨겁게 달구는 인기 스포츠 행사인 전국 사
이클 일주대회(투르 드 프랑스)를 5연패한 인물.
이처럼 미국인을 마주치기가 예전보다 드물어진 데 대해서는 우선 미국 달러화의 장기 약세로
미국인의 지갑이 얇아진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했다. 달러화에 대한 유로화의 교환 가치가
지난해 근 20% 가량 상승했다. 이것을 3년 전의 저점과 비교하면 무려 50%가 오른 셈. 그 덕분
에 구매력이 높아진 유럽인들이 오히려 미국을 많이 찾고 씀씀이도 확대되는 현상이 빚어졌다.
유럽의 관광대국 가운데 하나인 스위스가 환율에 의한 타격을 실감한 대표적 케이스. 스위스
프랑이 달러화에 대해 지속적으로 강세를 보인 데다 스위스의 물가가 인접한 유럽연합 국가들도
월등히 비싼 것이 바로 침체의 주요인이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을 찾는 미국인의 발걸음이 줄어든 것은 테러에 대한 우려가 강했고 이라크 전
쟁을 둘러싸고 프랑스, 독일 등과의 정치적 마찰 때문이라는 해석도 설득력이 있었다.
미국에서 ‘프렌치 프라이’를 ‘프리덤 프라이’로 바꿔 부르자는 등 ‘메이드 인 프랑스’ 불매
캠페인이 벌어진 것도 미국인이 느끼는 배신감을 보여주는 한 실례. 유럽 관광업계 측은 반미
감정이란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홍보했지만 미국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왠지 꺼림칙하
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어 있던 것도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오히려 여행사 측에서 만류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파리를 찾은 미국인은 지난 2001년 350만 명이었으나 지난해에는 240만 명으로 줄어들
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것이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였지만 미국인의 지갑을 그리워하는 프랑스의
관광업계로서는 무척 속상했을 것이 분명하다.
양키가돌아온다
유럽 관광업계는 올해 들어 확 달라진 분위기를 실감하고 있다. 미국인들을 자주 볼 수 있고
덩달아 일본과 중국, 그 밖의 국가에서 오는 관광객들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인 관광객의 증가는 유럽 주요 관광국가가 발표하는 통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물론 3년
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올해 1~5월에 프랑스의 파리를 방문한 미국인은 13%가 증가했고 독일인
과 일본인도 각각 21%와 18% 증가했다.
스페인의 마드리드는 올해 3월 알 카에다에 의한 열차 테러가 발생했지만 상반기(1~6월) 동안
미국인 관광객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3%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베를린 관광당국의 통계에
의하면 지난 5월 이곳의 호텔에 투숙한 미국인은 45%가 증가했고 일본인은 무려 115%가 증가
했다. 영국은 지난 2분기(4~6월)에 북미지역 관광객이 20% 증가했다. 지난 6월 로마의 호텔들은
숙박률이 26%나 상승했다. 6월 한 달 동안 모두 130만 명이 로마의 호텔에 투숙했는데 이
가운데 37만 명이 북미에서 온 관광객들이었다.
이처럼 상황이 변한 것은 정치적 분위기가 달라진 탓이 크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배적 의견이
다. 물론 세계경제가 올 들어 확연히 회복됐지만 달러화는 여전히 약세여서 미국인의 지갑이 두
터워졌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 이들의 지적.
유럽 관광업계 관계자들은 미국인들은 지난해만 해도 분노의 타깃이 될까봐 걱정했지만 올해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 태도가 뚜렷하다고 말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인들이 테러리즘 시대의
여행에 적응해가는 것 아니냐고 풀이한다.
프랑스의 경우 ‘양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지난 2년간 미국 독립기념일(7월 4일) 행사를
마련했는가 하면 올해 6월 6일에는 노르망디 해변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상륙작전 기념행사가 벌어진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
파리 관광국 측은 노르망디 해변에 가기 위해 많은 미국인들이 파리를 경유했다면서 이 행사를
통해 프랑스가 미국에 빚지고 있음을 결코 잊지 않았다는 것을 과시한 점이 의미 있다고 평하고 있다.
중국인 관광객도 밀물
유럽 국가들은 요즘 중국이 미국과 견줄 수 있는 초강대국임을 실감하고 있다. 적어도 관광산업
에서만큼은 단연코 그렇다. 유럽의 여행사들과 호텔들은 지난해 미국 관광객들이 대거 이탈하는
와중에서 중국인 관광객의 증가로 한 시름을 덜 수 있었다.
중국은 최근 경제활황 덕분에 언제든 해외여행에 나설 수 있는 여유 계층이 늘어나고 있다. 세계
관광기구(WTO)에 따르면 중국의 해외여행 인구는 98년 이후 매년 100만 명씩 늘고 있다. 오는 2
020년에는 매년 1억 명이 해외로 나가리라는 게 WTO의 전망.
현재는 대부분의 중국 관광객이 거리와 비용을 고려해 아시아 지역으로 가고 있지만 최근 들어서
는 유럽을 위시해 목적지가 다변화되고 있는 양상이다. 유럽 관광업계는 중국이야말로 미국에 맞
먹는 관광객 공급처라고 보고 있다. 유럽이 자신하는 것은 문화적 다양성. 중국인들 사이에서 유
럽은 평생에 한 번쯤은 가봐야 한다는 관념이 형성돼 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유럽연합(EU)이 지난해 10월 중국인들의 유럽 방문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해 ‘목적 지체류 허가권
(ADS)’ 협정을 서둘러 체결한 것도 바로 역내 관광산업에 동력을 제공해줄 중국의 잠재력을 간파
한 때문이다.
이 협정에 따라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은 EU 국가들로부터 비자를 얻기가 훨씬 쉬워졌다. EU가 협
정을 서둔 이유는 중국이 협정 체결국에 한해서만 국내여행 판촉을 허용하고 있다는 점도 감안한
것이다.
유럽에서는 독일이 개별국 자격으로 ADS 협정을 체결해 톡톡히 재미를 보는 상황. 덕분에 독일은
중국 관광객이 많이 찾는 10대 국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올해부터 발효되는 ADS 협정은 영국과
덴마크, 아일랜드를 제외한 EU 10개국에 일제히 적용되고 있다. 지난 5월 새로 EU에 가입한 10
개국도 이른바 ‘셍겐 조약’ 가입이라는 절차가 남아 있지만 일단은 협정의 혜택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다급해진 것은 EU의 틀에서 벗어나 있는 스위스. 국내 관광업계가 시름에 빠져 있는 상
황에서 EU에 중국인 관광객을 뺏기면 위험하다고 판단한 스위스는 대통령이 중국을 직접 방문, A
DS 협정 체결을 독촉하기도 했다.
스위스는 지난 98년 유럽국가로서는 처음으로 ADS 협정체결을 추진했으나 99년 장쩌민 주석의 스위
스 방문기간에 티베트 독립시위를 허용한 것이 ‘괘씸죄’에 걸려 최종 결정이 지금까지 유보돼 왔다.
중국인의 단체관광은 유럽의 유명도시를 단기간에 돌아보는 패턴. 선호하는 유럽도시는 파리와 프
랑크푸르트, 암스테르담 등이다. 유럽 관광명소에서 중국어 가이드를 보는 것도 이젠 흔해졌지만
여행사나 호텔들의 웹 사이트마다 중국어 서비스 메뉴가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중국정부가 관광 관련 규제조치를 완화하고 있고 향후 5년간 노동자들에게 유급휴가를 확대하는
계획을 마련하고 있어 경제성장의 과실을 즐기려는 중국인들의 해외, 특히 유럽 나들이는 앞으로도
더욱 잦아질 전망이다.
문정식 제네바 특파원 | jsmoon@yna.co.kr
